제28화
- 사랑을 찾았다 -
가을의 끝자락에서
- 유동원
간밤에 비가 많이 내렸는지
거의 마지막 잎새 꼴이 된 나뭇가지는
팔순 할아버지 정수리처럼
하늘이 보일 만큼 휑뎅그렁하다.
산책길에는
아직도 무슨 한恨이 남았는지
꺼져가는 잿불 같은 희미한 눈빛을
차마 거두지 못하고
힘없이 나뒹구는 낙엽들의 모습이
참 애잔하고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이제 화려했던 가을 잔치도
거의 다 끝나간다
달력이 딸랑 두 장 남은 걸 보면
저 혼자 멀리서 놀다가 지는
동지섣달 짧은 하루해처럼
또 한 해가 다 저물어간다
내 나이에 또 한 톨을 보태주면서.
머잖아 가을은
단풍축제 때 쏘아 올렸던
화려했던 불꽃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대지에 남겨둔 채
터덜터덜 빈 수레만 끌고
춥고 어두운 겨울 나라로
긴 여행을 떠나겠지.
그러나 초겨울이 되면
바스락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와
얇게 얼은 서릿발이
발아래서 ‘뽀도독 뽀도독’하고
작은 비명을 지르며 부서지는
작년에 들었던 그 정감어린 소리가
참 정겨웠다는 생각이 나
나 혼자 지긋이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휑뎅그렁하다 --- 속이 비고 넓어 매우 허전하다.
* 유동원 : 경남 창녕군 남지 출신. 경상국립대학교 사범대학 외국어교육과(영어전공) 졸업. 경남자영고등학교 외 8개교 중등학교 교사, 삼천포제일중학교 외 2개교 교감, 남해 미조중, 사천중학교 교장 역임. 현 필봉 문학회 회원.
양산의 펜션에서 눈을 떴을 땐, 오후 2시가 넘었다. 거실에는 연희를 제외하고 직원들이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서 연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빤히 바라보았다. 새벽에 연희를 먼저 방으로 보낸 뒤, 나는 테라스에서 홀로 술을 많이 마셨다. 그 후론 나는 내가 언제, 어떻게 방에 들어가 잤는지조차 기억이 없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테라스에서 일어설 때 멀리 동이 트고 있었다는 정도였다.
“직원들은 다 물놀이 갔어요. 뭐라도 좀 드셔야죠? 과장님은 테라스에서 술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그렇군. 그런데 배고프지 않아. 연희야. 우리 이야기를 좀 더 할까?”
“무슨 이야기요?”
그녀는 시원한 물 한 잔을 내게 건네며 되물었다. 내 생각인지 몰라도 그녀의 표정은 내가 무척 한심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유희가 말이야.”
“그만두세요. 새벽에 한 그 정도 이야기로 끝내요. 과장님은 지금, 이런 말 드리는 저도 조심스럽지만, 정상이 아니에요.”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돌아섰다. 자신도 내가 깼으니 직원들이 있는 곳으로 갈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뭐? 정상이 아니라고?”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얼른 물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제가 방으로 들어간 쉬, 과장님이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모르시죠? 이 동네 펜션이 떠나갈 듯 고함을 질렀단 말이에요. 덕분에 직원들이 다 깼어요. 김 대리가 보다 못해 과장님 앞에 앉으려는데, 필요 없다며 술잔을 뿌린 것도 기억이 안 나시죠?”
“내가?”
“정말, 실망이에요.”
“내가 무슨 고함을 질렀단 말이야?”
나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유희 이름을 불렀죠. 나더러 유희를 이곳으로 데려오라고 얼마나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지. 이제 그나마 몰랐던 직원들도 다 알아버렸어요. 아시겠어요? 그러니 오늘은 이만 집에 들어가세요.”
연희는 냉정하게 그 말만 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멍한 정신으로 서 있다 거실에 주저앉아버렸다. 정말 내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설령, 했다면 나로서는 직원들 앞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한 셈이었다. 갑자기 한기가 들면서 기침이 심하게 나왔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주차장으로 갔다. 그리고는 행여 직원들이 볼까 서둘러 무산 시로 차를 몰았다.
운전하는 내내 나는 그녀로부터 환청이 들렸고 환시가 보였다. 어제 서울에 올라가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과 지리산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중첩되면서 나는 마치 꿈속에 있는 듯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 놀았다. 입으로는 그녀를 향해 욕지기가 나오면서도 마음은 그녀를 지독히 그리워했다. 호흡은 가빠왔고 머리는 자꾸 어질거렸다. 심호흡을 몇 번 했지만 좀처럼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감기는 눈을 억지로 비비며 겨우 양산IC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잠시 뒤, 뒤따르던 트럭의 빵빵하는 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차와 함께 몇 바퀴를 돌았다.
병원이었다. 설핏 눈을 떠보니 내 팔엔 링거가 꽂혀있었고, 얼굴과 손 부위에 붕대가 감겨있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나는 그날, 피곤한 몸으로 차를 몰다 양산IC 부근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실신했고 병원까지 어떻게 왔는지 도통 기억엔 없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병실엔 아무도 없었다. 아내와 아이는 물론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좀 이상했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외삼촌이었다.
“이제 눈 떴냐? 물 뜨러 가는 사이에 일어났나 보네. 그래, 이젠 좀 괜찮냐?”
그는 그때보다 더 늙어 보였다. 나는 병실에 아내가 아닌 외삼촌이 있다는 게 아무래도 께름칙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 이놈아.”
“아내는 어디 가고, 외삼촌이 어떻게 알고 여기 오셨어요?”
그러자 그는 계면쩍은 듯 대답했다.
“네 주변에 내가 제일 시간이 많잖냐. 사고 다음 날, 네 처가 전화가 왔더라. 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자신은 학교일 그리고 전시회 때문에 몹시 바쁘다고 좀 올 수 있냐고 해서 달려왔지.”
나는 아내의 처사가 못마땅했지만, 그녀로서도 그럴만하였다고 생각했다.
“애들은?”
“다 다녀갔어. 네 처도 이틀 정도 여기 있었고 아이들도 그랬어. 회사에서도 대표를 비롯한 간부들 일부는 다녀갔어.”
“그랬군요.”
그는 내 팔에 꽂힌 링거에서 수액이 잘 떨어지는지 몇 번이나 보더니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뭐가요?”
“난 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하길래, 필시 그때 같이 왔던 아가씨, 유희라 했던가? 그녀와 함께 있는 줄 알았다. 만약 그랬으면 넌 진짜 마누라에게 칼부림 당했을 텐데. 그건 아니더구나. 하하.”
“참! 삼촌은. 그건 그렇고 제 상태가 어떻다 그래요? 언제까지 병원에 있어야 하는지?”
“의사 말로는 전치 6주라고 하던데, 최소 두어 달 이상은 입원해 있어야 할걸?”
“두어 달이나요?”
“그래, 좋은 것 아냐? 치료비야 보험사에서 다 해결해 줄 거고. 회사에도 병가 처리하면 기본 월급도 나오잖아. 그러니 이 기회에 좀 푹, 쉬어. 그동안 직장생활 하느라 고생했는데.”
“그동안 삼촌도 여기 계시려고요? 펜션은 어떡하고.”
“그 점은 좀 고민이야. 한 달 정도는 마을 분에게 얘길 해 두었어. 그 후론 가야지.”
나는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의사에게 사정하여, 한 달만 병원에 입원해 있고 나머지 한 달은 외삼촌이 있는 지리산으로 가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답답한 병원에 있어 봐야, 내게 득 될 게 없었다.
“쉬고 있거라. 난 잠시 은행에 좀 다녀오마.”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날 다독이고선, 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유희가 병실을 찾은 것은 내가 입원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금요일 저녁이었다. 그동안 나는 그녀에게 일절 전화나 문자를 하지 않았고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침 이런 시점에 사고를 당하고 나니, 나도 어느 정도 정신이 번쩍 들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녀에게 남자가 있다는 사실은 한편, 내게 너무 충격이었고 슬픈 일이었지만, 나는 이게 그녀와의 관계를 끊은 시발점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와 그녀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태생적 한계, 그러니까 유부남과 처녀라는 불륜관계였다. 아무리 애정이 없는 아내라도 그녀는 나의 조강지처였고 우리 둘 사이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유희가 날 찾아온 날은 외삼촌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녀는 그날 내가 그녀를 만나러 서울에 갔을 때 산 것과 비슷한 장미와 안개꽃을 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어색했다. 그녀 또한 어떤 말로 날 위로할지 무척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고심 끝에 말문을 열었다.
“많이 걱정했어요. 죄송해요. 이렇게 늦어서.”
“…….”
“내게 많이 화났어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연희에게 들었어요. 그날 아저씨가 우리 아파트까지 온 것 말이에요. 그리곤 양산으로 내려가 나 때문에 화가 많이 나서 술을 엄청나게 많이 마신 것까지. 결국,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운전하다 이렇게 된 것. 모두 다 저 때문이에요. 정말 죄송해요.”
내 앞에서 죄인처럼 빌고 있는 그녀를 보자, 나는 갑자기 그녀가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엔 그녀는 별로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내게 사과를 할 걸면, 그녀는 그사이에 전화나 문자를 해야 했다. 입원한 지 일주일이나 지난 시점에 날 찾아오는 것은 이건 정말 아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저씨 사고 소식을 오늘 오후에야 들었어요. 그래서 사무실 일을 급하게 끝내놓고선 지금 오는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제가 사무실을 오늘 오후에야 왔거든요. 그동안 서울 쪽 출장 기간이라 지난 토요일부터 오늘 오전까지 줄곧 인천공항에 일 보러 다녔어요. 아저씨 사고 소식을 우리 대표님도 언급을 안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전혀 몰랐죠. 오늘 사무실에 출근해서 연희를 만나니 그 애가 말을 해주었어요.”
나는 이상하게 그녀의 해명을 듣고 나니 점점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 왜 내게 그동안 전화나 문자 안 했어?”
“그건, 바쁘기도 했고 저번 주 금요일 사건 때문에 마음이 너무 상해서, 먼저 연락해주길 기다린 거죠. 그런데 아저씨도 특별히 제게 연락하지 않아, 미루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그녀의 말에 일부 수긍은 갔지만, 오늘은 그녀의 말이 진심으로 들리진 않았다.
“그건 핑계야.”
“변명이라 생각하셔도 할 수 없어요. 저도 그동안 많이 힘들었거든요.”
나는 그녀의 말에 콧방귀를 꼈다.
“무엇 때문에? 설마 나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자꾸 왜 제 말을 곡해하세요? 제가 힘든 게 그럼, 아저씨 때문이 아니란 말인가요?”
나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유희, 너! 연희에게 다 듣고 왔다면서. 내가 그날 네가 사는 아파트 앞에서 어떤 장면을 봤는지 알고 있으면서 그런 말이 나와!”
나는 크게 화를 냈다. 그런데 그 순간, 갈비뼈가 결리면서 기침이 계속 나왔다. 의사는 입원 기간 내에 절대 흥분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뭘 봤다고 그렇게 화를 내세요? 아저씨가 지금 제 남편인가요? 아님, 결혼을 약속한 약혼자인가요?”
그녀는 내가 환자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어이없게 내게 대들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남자가 있었다고 내게 왜 진작 말 안 했어?”
“뭐예요?”
“도대체 그놈은 대체 언제 만난 거야? 왜 내게 미리 말을 안 했느냐고! 아니, 그놈과는 어떤 사이지? 결혼할 건가?”
갈비뼈가 계속 결렸지만, 나는 화를 참지 못했다. 오히려 오늘 이왕에 이렇게 된 것, 그녀와 끝이 나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나는 마음 먹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만 제 분을 못 이겨내고 앞에서 왈칵, 울음을 쏟아내었다.
“어떻게 아저씨가 제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나는 그녀의 울음에 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