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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 제2권. 헬레나와 로마 시시대, Période Hellénique et Rome 231
제5장 기원전 1세기에 사상들의 경향들 Les courans d'idées au 1er siècle avant notre ère 348
제1절 중기 스토아학파: 파나이티오스 Le Moyen Stoicisme: Panétius[Παναίτιος] 348
크뤼시포스(Chrysippe, Χρύσιππος, 전281-205)[스토아 3대 학장]를 계승하고서 기원전 204년에서 기원전126년까지, 즉 기원전 2세기의 경과 과정에서 파나이티오스(Panétios, Παναίτιος, 전185-112)에까지 스토아학자들은 [한편으로] 독단적 학설의 느슨해진 상황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토아 사상의 어떤 변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게다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Σέξτος Ἐμπειρικός, 전160경-210)도 더 나아간 정확성 없이, 새로운 스토아학파들은 오직 하나의 내포적 표상이 아니라 장애물들이 없는 내포적 표상을 기준으로써 인정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아카데미학파들에게 내포적 표상들의 예들을 빌려왔는데, 이 표상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la croyance, 신념)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신화에서] 아내 알케스티스(Alceste, Ἄλκηστις)가 지옥으로 끌려갔을 때, 남편 아드메토스(Admète, Ἄδμητος)가 아내로부터 가졌던 믿음과 같은 그러한 표상들이다. 그것은 다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즉 확실하게 해주는 그 무엇이 표상 자체라기보다 표상이 일부를 이룬 총체와 표상과의 연관이다. 이 학자들은 아마도 [아카데미아의 학장인] 카르네아데스(Carnéade Καρνεάδης, 전219-128)에 대항하여 투쟁했다. 사람들은 안티파트로스(Antipater, Ἀντίπατρος, 전성기 전150-129)가 카르네아데스에게 말 걸었던 대인논증[오류](l'argument ad hominem, 인신공격)을 알고 있다. 카르네아데스는, 그가 작어도 어떤 사물을 지각한다는 것을, 즉 아무것도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세계의 개념작업에 대한 본질적인 특성들이, 특히 우주적 격변의 주제가 무너지는 것을 본다. 타르소스 출신 제논(Zénon de Tarse, Ζήνων Ταρσός, 전성기 전200)[스토아 4대학장]과 바빌론 출신 디오게네스(그가 이 주제를 처음 받아들였다)와 그 주제를 과감하게 부정했으나 이들은 자신들의 판단을 유보했다. 시돈 출신 보에토스(Boéthos de Sidon, Βοηθός)는 거꾸로 이 주제에 반대하여 모든 계열의 논증들을 사용하였고, 논증들을 알렉산드리아의 필론(Philon d’Alexandrie, Φίλων, 전20경–후45)[그리스화 된 유대철학자]이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이 논증의 토대는 신적이고 완전한 세계의 특성은 세계의 소멸성과 양립할 수 없다. 루크레티우스(Lucrèce, Lucretius, 전98-전55)는 자신의 아름다운 시구에서 별들을 관조하는 인간을 제시하고는, 스스로 자문하여, “신들 덕분에 스스로를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이 별들이 수많은 세대를 통하여 끝없이 궤도를 지나면서 가없는 지속의 거센 공격을 경멸할 수 있는지”라고 묻는다. 세계가 창조되고 사라진다는 감정은 그리스인들에게는 신의 권능의 증거인 것과 거리가 멀고, 반대로 신의 무능의 징표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보에토스의 생각이다. 세계의 붕괴는 원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붕괴는 외부로부터 다시 말하면 무로부터 올 수 도 없고, 어떠한 질병의 원리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세계의 내부로부터도 올 수 없기 때문이다(이것은 티마이오스편의 가르침이다). 게다가 세계는 분할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계는 아톰들의 집합으로부터 결과되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질의 변질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토아학자들은 이미 보았듯이 질 개별성 또는 고유한 질은 대격변 이후에 이전과 동일한 채 남아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혼란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는다. 따라서 혼란은 불가능하다. 결국 그것이 최고 논증인데, 신은 격변에 이어서 지속하는 동안에 활동 없이 남아있다. 그런데 비활동적인 신은 죽은 신이다. 보에토스는 우리가 그를 보았듯이 스토아주의보다 더 오랜 신학적 전통으로 되돌아 온다. 그리고 그 전통은 헬레니즘 지지자들에게 점점 더 필수 불가결할 것이다.
도덕론 또한 변형되었다. 바빌론의 디오게네스가 부여한 목적의 정식은 이러하다. “ 자연에 부합하는 사물들의 선택에서 이성을 사용하고, 그 반대의 것은 거부한다” 또는 안티파트로스(Ἀντίπατρος)의 정식은 이러하다. “자연에 부합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 반대의 것을 거부하면서 산다.” 이 정식은 선택의 필연성과 이유들에 관해 더욱 힘차게 강조한 것이며, 아리스톤(Ariston de Chios, Ἀρίστων ὁ Χῖος, ?-?)의 무차별주의에 분명하게 반대한다. 의식[양심]의 한 경우에 관한 디오게네스와 안티파트로스 사이의 야릇한 토론(한 상인이 기근 동안에 밀의 화물을 로도스 섬으로 가져간다. 그는 다른 배들이 도착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을 가정하면, 더 비싸게 자기 밀을 팔기 위해 감추어야 하는가?)에서 디오게네스는 말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정립된 어떠한 법도 이렇게 침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티파트로스가 주장하기를, 자신의 의무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사회적 본능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들에게 유용한 모든 것을 행하도록 유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바리세이주의(pharisaïsme)와 의무들의 보다 넓은 개념형성 사이의 대립이다. 바리세이주의는 고대 스토아주의에서 기능들의 개념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고, 의무들에 대한 보다 넓고 보다 자유롭고 보다 인간적인 개념형성은 중기와 새로운 스토아주의의 개념일 것이다. 공동의 삶을 규제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우리는 안티파트로스에서 그가 결혼의 옹호자인 것을 보게 되고, 결혼은 종교적 의무로서 친애와 상부상조의 형식이다. 그 의무의 약화는 사회에서 불길한 징후이다.
우리는 보에토스가 자연학 속에 플라톤주의를 도입한 것을 보았다. 우리는 안티파트로스가 플라톤에게서 정직만이 선이라는 이데아의 기원을 찾으면서 스토아의 도덕론은 플라톤에 일부러 결속시킨 것을 본다. 아마도 플라톤의 이데아들에 회귀에 의해서, 안티파트로스의 제자인 타르소스의 헤라클레이데스(Héraclide de Tarse, Ἡρακλείδης Ταρσός)는 “모든 과오들이 동등하다”는 파라독스를 포기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특징들은 로도스 출신 파나이티오스(Panétios, Παναίτιος, 전185-112)에서 고발되었다. 그는 2세기가 끝나는 시기에 가장 호기심 많은 인물들 중의 하나이다. 파나이티오스가 그의 시대의 탁월한 로마인과, 즉 스키피오(Scipion Émilien, Scipio Æmilianus, 전185-전129)과 렐리우스(Lélius, Caius Laelius Sapiens 전188경-129)와 맺은 친애(우정)은, 로마의 질서가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적이기 시작하였고 그리고 보편적 사회의 꿈을 실현하려는 중에 있으면서 역사를 완수하는 것으로 보이는 시기에, 시대정신의 가장 야릇한 징후들 중의 하나였다. 키케로가 말하기를 그의 성격의 고귀함과 그의 육중함이 그를 이 친숙함을 감당할 만하게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기원전 146년 이래로 129년 앞까지 그는 아테네에서 이 학파의 지도를 행했으며, 그는 142년에도 알렉산드리아 여행에 스키피오와 함께하면서 스키피오를 떠나지 않았다. 이전에,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따라가는 146년에 스키피오에 의해 조직된 탐험 여행에는 폴뤼비오스(Polybe, Πολύϐιος, 전208경–전126경)도 그와 일원이었다. 파나이티오스는 스키피오에서 그가 찬탄해 마지않는 지혜, 신중함, 도덕적 품위를 보았다. 다른 한편 스키피오는 스토아주의에서 로마의 급속한 성장과 그 성장이 자극하는 모든 야망들과 더불어 아주 필수적인 도덕지침을 발견했음이 틀림없다. zl케로가 파나이티오스에 대해 말했듯이 “사람들이 변덕스런 말들을 조련사들에게 맡겼듯이, 자신들의 별에서 너무 자부심강한 인간들을 이성과 학설의 규칙에 맞게 이끌어야만 했는데, 이들이 인간적인 것들의 허약함과 운수의 취약함을 고려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오랜 전통적 교육은 합리적 교육에게 한발 양보해야 만 했다. 파나이티오스의 로마인 제자들은 매우 많았고 영향역이 있었다. 이들 중에, 퀸투스 티베로(Tuberon, Quintus Aelius Tubero, 전2세기영)는 스키피오의 조카이며, 품행에서 열열한 스토아주의자이다. 그는 심판관의 의무에 대하여(Sur l'Office du juge, De Officiis)라는 저술을 썼는데, 거기에서 그는 아마도 자신의 법률적인 인식과 스토아학파의 학설을 조화하려했다. 사제이자 법률학자인 무키우스 스캐볼라(Publius Mucius Scaevola, ?-115), 소아시아 지방의 총독인 루틸리우스 루푸스(Publius Rutilius Rufus, 전158-전78), 앨리우스 스틸로(Élius Stilon, Lucius Aelius Stilo, 전154경—74)도 있는데, 그는 문법학자이며 역사가이며, 박학다식으로 유명한 바로(Varron, Marcus Terentius Varro, 116-27)의 스승이기도 하다. 스틸로는 로마에 오래 체류한 후에, 전129년에서 110년까지는 아테네에서 학교를 이끌었다.
파나이티오스의 우주는 제논[창시자]의 우주와 매우 다르다. 그는 플라톤에 매우 열광했으며, “플라톤은 신인이고, 매우 현명한 자, 매우 성자 같은 자, 철학에서 호메로스 같은 자”라 한다. 그는 학파의 창설자들과 통일한 중요성을 더부룩한 변증법에 더 이상 결부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은 자연학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조화로운 우주의 통일성은 스스로 완화된다. 이성의 전능의 상징처럼 있었다고 여기는 우주적 격변은 부정된다. 매우 아름답고 또한 매우 완전한 이 세계는 우리가 관조하는 세계와 동일한 질서를 항상 보전할 것이다. 격변과 더불어 우주적 공감도 무너진다. “거의 무한한 거리로부터 별들의 영향이 달에까지 오히려 지구에 까지 미칠 수 있다고 하는 어떤 현상이 있는가?” 공감과 동시에 공감에 기초한 예언도 부정했다. 그리고 그는 운명(le destin)에서 어떤 느슨함을 인정할 준비가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론들의] 변형형성들은 사물들의 깊숙이까지 미친다. 파나이티오스는 신학자는 더 이상 아니고 인본주의자이다. 그에게 흥미있는 것은 인간의 문명 활동성, 즉 운동하는 인간 이성, 사물들에 내재하는 신적 이성 보다 훨씬 더 많은 기예들과 과학들의 창조적 이성이다. 또한 그는 영혼에 있어서(그에게 있어서 영혼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숨결일 뿐인데) 물체 속에 영혼의 삶의 바깥에서 주어진 모든 숙명(destinée)을 거부했다. 우리에게 말하듯이 그는 플라톤의 파이돈의 진본을 부정하는데 까지 나갈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영혼은 마땅히 죽는다. 왜냐하면 영혼은 태어났기 때문이고, 영혼이 태어날 때 미리 현존하지 않는 다는 증거, 그것은 어린이들의 도덕적 유사성은 그들의 아버지와 닮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영혼은 소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혼은 질병에 걸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에테르로 되어 있는 영혼의 부분은 죽을 때 그 영혼이 나온 세계의 상층들로 다시 가는 것이 마땅하다.
게다가 그가 단순히 잡답으로 학파들의 신학을 다루었다는 것에 대해 놀라지 않아야 한다. 아마도 그는 신학의 실증적 연구에 대한 책임 있는 작가였다. 사람들은 그의 제자 스캐볼라에게서 그 연구를 볼 수 있고, 스캐볼라(Mucius Scaevola, ?-115)는 그것을 바로(Marcus Terentius Varro, 116-27)에게 전수했다. 사실상 세 가지 신학이 있다. 하나는 시인의 신학인데, 매우 하찮은 것으로 선한 인간들 위에 신들을 놓는다. 또 하나는 철학자의 신학이다. 필연적인 신념들을 도시국가와 잘못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에우에메로스(Évhémère, Εὐήμερος, 전316경-?)와 더불어 사람들이 신들이란 사람들이 신성화했던 실재적 인물들일 뿐이라고 생각하든지, 또는 사람들이 도시국가의 조각상들에서 보는 신들과는 공통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신들을 받아들이는 데. 왜냐하면 철학자들의 신은 성별도, 나이도 한정된 신체도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민의 신학이 있다. 이것은 현자들에 의해 도시들에서 제도화된 숭배의 신학이며, 무엇보다 정치가인 스캐볼라는 이러한 신학에 대한 특별한 애호를 감추지 않았다.
파나이티오스는 기원전 140년에 의무론(De Officiis, Du Devoir)을 썼는데, 키케로에 따르면 그 저술은 주제에 관하여 논쟁의 여기 없는 매우 정확한 토론을 포함하고 있으다. 키케로는 덧붙여서 자신의 저술 의무들에 대해(De Officiis, Des Devoirs)에서 자신이 첫째 두 권 속에서 이 책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의 고치지 않고” 따랐다고 한다. 이 두 권은 파나이티오스에 관한 정보들의 중요한 원천을 형성한다. 그의 이상은 정직한 인간의 품성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정직한 인간은 문명화된 사회에서 자연이 자신에게 부여한 기질들을 강화할 만하고 또 만족할 만한 수단들과 기회들을 찾는다. 자연에 부합하여 산다는 것,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했던 성향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규칙으로서 삼아야 할 것은 우리들의 개별적 본성(notre nature)이다. “틀림없이 보편적 본성에 반대해서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 보편성 본성을 존경하니까, 우리의 고유한 본성을 따르자.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더 잘 우리 자신을 발견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의지들을 우리 자신의 본성에 맞게 규제하면서 이것들을 잘 조절하자” 초인간적 지혜의 과장된 야망들은 없다. 파나이티오스는 “자연주의”라는 구실아래 자기의 모든 정념들을 포기하기를 허용하지도 않았다. 우리 인류성과 우리 인간 존엄성으로부터 우리가 지닌 의식이 우리 스스로 자제하는 데 충분한다. 인류성의 이념은 진실로 키케로의 논제의 중심이다. 그[키케로]는 자신이 그 관념을 사용하는 의미와 경우를 정확하게 하는데 흥미 있다. 그가 말하기를 예를 들어 두 종류의 싸움이 있다. 첫째는 동물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힘의 직접적인 사용이고, 둘째는 인간에게 특별한 것이다. 이것으로는 맹약들의 존중을 포함하여 선전포고를 앞세우는 정당한 전쟁들이 있다. 또한 두 종류의 사회들이 있는데, 동물 사회들과 소위 말하는 인간사회들이다. 이 후자의 가장 강력한 두 가지 유대는 이성과 언어(ratio et oratio)인데, 짐승들에게 인식되지 못한다. 또한 마지막으로 쾌락의 저항이 있는데, 동물들은 이것을 모르며, 반대로 인간은 감당할 만하다. 키케로는 또한 이렇게 말할 것인데, 즉 달변(l'éloquence)의 사용으로 선한 인간들을 상실하게 하는 것은 “비인간적”이다. 사실 달변의 자연적 역할은 인간들을 구출하는 데 있는데 말이다. 그는 또한 말할 것인데, 초대 받은 향연(un banquet)에서 성찰하는 것과 공공장소에서 노래하는 것은 인류성(l'humanité)에 매우 반대되는 것이라 한다. 한마디로 인류성은 동물의 거친 본능을 문명화된 용도로 변형하는 모든 것이다. 그것은 공손함과 품위로부터 만일 그들이 인간들이라면 적들 사이에서도 갖추는 정의의 규칙들에까지 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파나이티오스의 인간은 퀴니코스 학자들의 기초적인 인간이 아니다. 퀴니코스 학자들에게 있어서 문명이란 무용한 복잡성만을 창조한다. 그런데 왜냐하면 사회적 유대는 자연 자체로부터 오기 때문이고, 사회가 유보사항과 우리들 자체의 존중(verecundia)에 우리를 초대하기 때문이다. 기예들은 신화들이 말하듯이 신들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 노력의 결과물들이다. 기예들을 통하여 “문명화된 인간의 삶”은 짐승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매우 거리가 멀게 되었다. 따라서 인류성은 짐승적인 본능을 변형시키는데, 그러나 본능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짐승들에서도 모든 덕성들에 해당하는 경향들이 있다. 즉 보고 들으려는 욕망, 놀이에 무관심한 경향, 용기와 절제 해당하는 자기 보존의 욕망, 선천적인 사회적 경향들 등이다. 인간적 덕목들은 이성에 의해 규제 받는 자연적 경향들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정통 스토아주의가 말하는 것과 반대로 이중적이며, 즉 이성과 비합리적 경향들로 남아있다.
파나이티오스의 이런 학설은 귀가 멍멍할 정도의 [부정적] 반향으로만 우리에게 알려졌지만, [그 당시에는] 경이롭게도 생생하고 정력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약간은 무거운 듯한 중후함 또는 앞선 2세기 동안의 학설들의 매력 없는 비관주의 다음으로 나온 파나이티오스의 사상은 카르네아데스(Carnéade Καρνεάδης)의 사상처럼 그리스 사상에서 새로운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사람들은 세계 속에서 완수되었던 굉장한 정치적 변형에 상응하여, 떠오르는 새로운 지적 삶에 대한 인상을 갖게된다. (48PKE)
제2절 중기 스토아학파(연속): 포세이도니오스 Le Moyen Stoicisme(suite): Posidonius 354 [Ποσειδώνιος]
스토아학파의 빛나는 발전은 아파메우스 출신인 시리아인 포세이도니오스(Posidonius d'Apamée, Ὁ Ποσειδώνιος ὀ Ἀπαμεύς, 전135-51)와 더불어 아주 다른 길을 이어 간다. 위대한 여행가이며 자연에 대한 위대한 관찰자인 그는 지중해의 모든 해안지방들을 방문했다. 시실리,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사이의 바다인] 아드리아띠끄(Adriatique, Adriaticum) 연안지방들, 프랑스 남부 랑그독 지방의 나르본, 스페인 연안지방들, 조수의 현상을 관찰한 대서양까지. 기원전 104년 이후로 로도스 섬에 정착하여, 거기에서 학교장을 지내며, 동시에 의회에서 막중한 정치적 기능을 행사했다. 그와 로마의 관계들은 여전했다. 미트리다테스 전쟁(guerres de Mithridate) 전쟁 동안에 로도스는 동방의 국가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로마 편에 남아있었다. 그는 대사로서 로마에 가서 구원을 요청했다. 폼페이우스(Pompée, Cnaeus Pompeius Magnus, 106-48)는 그의 개인적인 친구였고, 그를 보러 여러 번 로도스를 방문했다. 이들 사이의 대화들의 회고는 키케로, 노(老)플리니우스, 플루타르코스에 의해 간직되어 있다. 폼페이우스는 거기서 포세이도니오스가 수사학자인 헤에르마고라스(Hermagoras de Temnos, Ἡρμαγόρας)의 횡령에 반대하여 철학을 옹호하는 것을 들었다. 그 철학자는 일반적 주제를 유지했는데 반해, 그 연설가는 가설들로 만족해 했다. 그는 또한 키케로의 친구이자 스승이며, 키케로는 기원전 77년에 로도스에 체류했다. 파나이티오스처럼 포세이도니오스 충심으로 로마편에 가담했다. 로마의 통치 속에서 역사의 결론을 보았던 역사가 폴뤼비오스(Polybe, Πολύϐιος)는 이 둘을 연결시켰다. 파나이티오스는 폴뤼비오스의 친구이고, 포세이도니오스는 그의 역사의 이어갔다. 그의 과학적, 수학적, 역사적, 지리학적 저술들보다 더 많지는 않지만 철학적 저술들의 방대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 비교할 만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의 사상을 재구성하기 위하여 키케로의 저술들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De Natura Deorum (De la nature des dieux) 45)의 제2권, 투스쿨룸에서 대담록(Tusculanes 원제 Tusculanae disputationes, 전45)의 제1권, 예언에 대하여(De divinatione (De la divination) 44)를 이용해야 한다. 갈레노스(Claude Galien, Κλαύδιος Γαληνός, 129경-201)는 정념의 본성에 관하여 그와 크뤼시포스와 사이에 있었던 논쟁을 알려준다. 세네카(Sénèque, Seneca 전4-후65)는 자연적 질문들(Questions naturelles, 62)에서 니케아(Nicée, Nicea Νίκαια) 출신 아스클레피오도토스(Asclépiodote, Ἀσκληπιόδοτος)[기원전 1세기경 활동, 포세이도니오스의 제자]의 기상학 작품을 이용하였다. 아스클레피오도토스의 생각들은 포세이도니오스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스트라본(Strabon, Στράϐων, 전64-후21/25)은 자신의 저술 지리학(Géographie Γεωγραφικά)에서 그[포세이도니오스]를 자주 인용한다. 클레오메데스(Cléomède, Κλεoμήδη)[그리스 스토아철학자]는 자신의 순환 운동 이론(Cyclice theoria, Théorie du mouvement circulaire)에서 그[포세이도니오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프로클로스(Proclus, Πρόκλος, 410-485)의 유클리드 기하학 원론 제1권에 관한 주석들(Commentaires sur le premier livre des 'Éléments' d'Euclide)에서 그[포세이도니오스]의 수학적 사유에 관한 플로클로스의 몇가지 자료를 덧붙이자.
이 모든 것은 단편들일 뿐이다. 포세이도니오스의 작품에서 역사적 범위와 의미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의문은 아직도 매우 논쟁이 되고 있는데, 특히 1892년에 크세노크라테스에 관한 교수자격 논문을 쓴 하인쩨(Richard Heinze, 1867-1929)와 1903년에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L’Énéide en lat. Aeneis) 제6권 주석을 쓴 노르덴(Eduard Norden, 1868-1941)가 제기한 이래 논쟁적이다. 이 둘은 포세이도니오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게 해준다. 즉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L’Énéide en lat. Aeneis) 제6권의 종말론의 신화에 끼친 그의 영향과,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의 “달에 나타난 모습에 대하여”(De facie in orbe lunae: fr. De la face qui paraît sur la Lune)의 논술을 끝맺게 하는 그 신화에 끼친 그의 영향이다. 전적으로 이 플라톤적인 신화들 중의 마지막 신화는 특히 천상의 영역으로 올라가는 정화된 영혼을 표현한다. 그런데 이 신화들은, 한편으로 키케로에게 다른 한편으로 포세이도니오스에게 가깝다. 즉 키케로가 죽은 후의 영혼이 세계 질서를 관조하는 것으로 제시하였던 그의 공화국에 대하여(De Republica, De la République, 전54)의 제6권 즉 마지막 권인 「스키피온의 공상」(Le Songe de Scipion, en latin, Somnium Scipionis)에서 접근되어 있었으며, 또한 포세이도니오스가 파나이티오스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스토아주의와는 반대로 영혼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에 되돌아 왔다는 사실에서도 그만큼이나 접근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플라톤의 신화들은 포세이도니오스 안에서 특히 종교적 사상가를, 즉 스토아주의와 플라톤주의 사이를 종합하는 작가를 보게 해 주며, 나아가 네오 플라톤주의의 진솔한 선구자를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설로부터 사람들은 일종의 신비적 금욕주의를 발견하게 하는 포세이도니오스 사상의 흔적을 보고자 원했다. 이 신비적 금욕주의는 고대의 말기에 넘쳐났으며, 영혼의 개념작업과 세계의 개념작업을 가정하는 것이다. 하나는 순수하고 다른 하나는 불순한 두 요소들로 복합된 영혼이 있다. 전자는 후자를 더럽히고, 후자는 전자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 세계는 영혼의 이미지를 따라, 자신 스스로 거기에 있게 되는 순수 영역(하늘 또는 신)을 만든다. 그러한 예들은 많다. 필론(Philon d’Alexandrie, Φίλων ὁ Ἀλεξανδρεύς, 전20경–후45)의 작품에서 수많은 금욕적 문구들(그 중에서 세계의 창조에 대하여라는 논술은 포세이도니오스의 ‘티마이오스’편의 주석에서 온 것이다), 세네카의 문구들, 아리스토텔레스 총서에 있는 짧은 개론인 세계론(Περὶ Κόσμου, Traité du monde)의 우주론적 개념작업들이 그러하다.
만일 사람들인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에 그친다면, 사람들은 포세이도니오스로 하여금 이런 신앙들을 책임질 수 있는 작가로 만드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신앙들이 새로운 세기(기원후)에서부터 많은 형식들 속에 슬며시 끼어들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포세이도니오스의 우주에 대한 이미지는 키케로의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De Natura Deorum (De la nature des dieux), 전45)의 제2권과 분명하게 관계있다. 사람들이 라인하르트(Karl Ludwig Reinhardt, 1886-1958)가 이에 대해 행했던 아름다운 비판적 분석을 받아들이게 되면 말이다. 그는 이 키케로의 저술을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Σέξτος Ἐμπειρικός, 3세기 초)에서 해당하는 문구들과 비교하면서, 키케로가 매우 다른 두 특성을 지닌 스토아의 두 개론서를 이용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첫째 것은 학파의 이론들을 전개하는 것으로써, 여러 형식들에서 축적되고 통상적으로 반복되는 삼단논법을 만들었다. 둘째의 것은 아주 다른 스타일의 것인데, 삼단논법을 사용하지 않고서 직관과 경험에 커다란 지위를 부여하였으며, 키케로가 이 개론서를 이용할 때마다, 사람들은 섹스투스에게 해당하는 어떠한 원문도 더 이상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한 것은 17장에서 22장에 그리고 39장에서 60장에 해당하는데, 이것들은 섭리에 관하여 하나의 전체, 즉 하나의 논문을 형성한다. 섭리는 원리들의 파생명제로서 증명되지 않고서, 오히려, 비유기적인 것에서부터 유기적인 것과 인간에 이르기까지 존재들의 상승하는 모든 등급 일체에서서 직접적인 통찰로서 파악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목록표를 매우 생생하게 하는 이국적인 세부사항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11장, 15장, 16장에서도 섭리의 원리가 (옛 스토아의 방식으로) 하나의 이성으로서 정의 되었다기보다는 자연적 대행자로서 열(熱)과 같이 정의되었다는 것을 알아 보는 것은 쉽다. 열은 특히 별들에서 표출되는 것이다. 결국 32장에서 37장에서는 식물의 특수한 생명으로부터 - 생명이 땅으로부터 나왔기에 - 땅의 보편적 생명에까지, 통하는 생명체들의 등급에 관한 일체의 똑 같은 관점이 있는데, 라인하르트의 올바른 정식에 따르면, 옛 스토아의 사상에서 “이성은 유기적이고, 따라서 유기적인 것은 합리적이다” 신적 불이 우선 이성이 더 이상 아니고, 그것은 유기적 힘이다 - 세네카가 말한 대로 생명적 힘(vis vitalis), 즉 역동적 생명성(ζωτική δύναμις)이다.
따라서 포세이도니오스의 자연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생명의 팽창과 살아있는 존재들의 점진적 복잡성에 관한 역성(dynamisme)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그것들의 충만한 의미에서 세계의 정의를 이해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가 제7장, 138에서 그 정의를 포세이도니오스에게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하늘, 땅 그리고 이것들 자체로 있는 자연물들로 이루어진 체계이다. 그러한 체계 속에서 세계라는 통일성은 위계질서로 정돈되어서 풍부하고 유연한 존재들의 다양성으로 펼쳐져 있는데, 그 통일성이 주된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필론(Philon d’Alexandrie, 전20경–후 45)의 증언을 - 학설사가인 아에티우스(Aétius, 후 1세기에서 2세기)와는 반대되는 원전임에도 불구하고 - 믿고자 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필론은 포세이도니오스가 우주적 대화재(la conflagration)를 포기하고 세계의 영원성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동일한 특징이 그의 신학에서도 또다시 발견된다. 옛스토아주의도 동일시했던 거기에서, 포세이도니오스는 구별하고자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에티우스가 말하기로, 그는 제우스, 자연, [인간의] 운명 등 셋으로 분리하고, 이 항들의 각각은 앞선것에 종속된다고 한다. 제우스는 자기 통일성 안에서 힘(la force)일 것이고, 운명을 그의 여러 측면들 하에서 생각되었던 동일한 힘일 것인데 반해, 자연은 운명의 다수 힘들을 다시 묶어내기 위하여 제우스의 유출된 잠재력으로써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삼원소 또는 삼신성은 키케로에서 재발견되는데, 포세이도니오스사 동일한 주제에 관해 썼던 다섯권의 저술에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저서 예언에 대하여(De divinatione (De la divination) 44)에서 예언에 대해 다룬 것에 속한다. 예언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신으로부터이며, 이때에 신은 영감을 받아들이는 여사제의 입을 통해 홀린 듯이 예언한다. 영감을 얻는다 란, 때로는 관찰에 의해 그 규칙들이 잘 정초된 점성술의 경우에서 숙명으로부터든지, 때로는 예를 들어 잠 속에서 신체에서 해방된 영혼이 예언적 몽상을 갖게 될 때 자연[본성]으로부터든지 오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은 신비적 열정에 의해 신과 직접적 관계들을 갖는 반면에, 운명은 관찰의 단순한 대상인 법칙들을 허용하고, 그리고 자연은 모든 사건들의 원리들을 포함한다.
결국 그의 심리학에서 사람들은 동일한 경향을 재발견한다. 크뤼시포스(Chrysippe)와 반대로 만일 사람들이 플라톤에 의해 발견되었던 능력들의 구별과 위계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념[수동성]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갈레누스(Claude Galien)이 행한 크뤼시포스에 대한 그의 비판의 세부사항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가 우선 묻기를, 만일 인간 안에 이성이 있다면, 정념[수동성]을 구성하는 경향의 얼토당토않은 과장이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들은 말하기를 쾌락은 하나의 선에 대한 견해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면 자신들의 행복을 인식하는 현자들은 쾌락을 간직하고 있어야만 했을 것인데 말이다. 제논에 따르면, 쾌락이란 하나의 선에 대한 최근 견해라는 것은 진실이다. 만일 쾌락이 이처럼 지속에 의존한다면, 쾌락은, 견해에 대해 순수하게 지적인 사실과는 다는 원인을 갖는다. 크뤼시포스는 정념[수동성]의 원인에 대해 우리에게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영혼의 질병으로 치부했으며, 이 질병의 원인을 발견하려 하지 않았다.
다. 그가 말하기를 그것을 체험하기 위하여 거의 공통점 없는 연약함, 즉 거짓인 것을 필요로 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정념의 등급들이 있는 만큼이나, 지혜로 향한 진보의 등급들로 있기 때문이라 한다. 결국 선과 악에 대한 견해가 동일할 때, 정념도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으며, 습관 또는 악이 동일한 견해에서도 매우 심한 정념들을 일으킨다. 정념들의 진실한 원인은 우리 안에 두 가지 부분들이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신과 동일한 본성으로부터 나온 다이몬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짐승같은, 이성없는, 무신론적 부분이다. 정념은 첫부분을 둘째 부분에 굴복시키는 데 있다. 크뤼시포스가 말한 것과 반대로 그 자체로 나쁜 경향들이 있다. 우리의 신체적 기질 그 자체가 우리를 이러저러한 정념의 성향을 띠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정념을 부드럽게 다루거나 또는 정념과 싸우는 것은 논증들에 의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비합리적 수단들에 의해서만 비합리적 것에 작용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몇가지 음악적 리듬들이 화 또는 욕망을 누그러뜨린다.
대부분 포세이도니오스는 사물들의 역동적 연결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 같다. 그가 말하기를 “선한 지리학자는 지상의 것을 천상의 것들과 연결을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원리를 기반으로 그는 사물들의 불가사의한 주장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으로 원인들을 탐구하였다. 전체적인 면에서, 그는 수학적인 천문학에 의해 규정된 지대들 영역으로부터 기후의 조건들과 그 조건들이 미친 유기체의 영향을 연역하려 시도했다. 이리하여 동화 같은 사실을 거부하는 순수하게 자연학적인 지리학 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르세이유 출신 퓌테아스(Pythéas Πυθέας 전4세기경, 325년 북유럽 탐험)의 이야기를 인정했다. 퓌테아스는 겨울에 가장 짧은 낮의 길이가 4시간이고 여름의 가장 긴 날은 18시간인 나라를 관찰했다고 했다. 심지어는 조수간만의 이론에서는 경험적인 동시에 수학적인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는 그것에 대해 하루, 한달, 일년의 다양함을 관찰 하였고, 그리고 그 외 다른 몇 가지를 관찰한 후에 이 다양성은 달의 영향에 속한다고 하였고, 그는 이 영향에 태양의 작용들 덧붙였다.
과학들을 향한 포세이도니오스의 취향은 자연적으로 기예들(les arts)에 관해 보고 하고 있는데, 기 기예들이 문명을 만들었다고 보고, 또 그 기예를 그는 인류의 가장 높은 지혜의 결실이라고 생각했다. 이점에 관해서 그의 생각을 비판하는 세네카는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사람들이 디오게네스와 다이달로스(Dédale, Δαίδαλος)를 동시에 찬탄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포세이도니오스 철학의 수준이 어떤 점에서 퀴니코스학자들의 빈약한 금욕주의 그 보다 위에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포세이도니오스는 자연과 인간의 가장 복잡한 표출들 속에서도 자연과 인간을 유일한 관점으로 포용했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지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은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서였다. 현자들이 왕이었던 과거 황금시대에서는, 현자들은 인간들의 악이 증가하는 것에 대처하기 위하여 입법자로서 자처해야 했고 법들을 발명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건축을 짓는 것과 같이 일상적 생활을 편하게 할 기예들을 발명했다. 그들은 광물들과 그것들의 사용법을, 농업기술들을, 밀을 빻는 방아를 발명했다. 데모크리토스는 도자기 굽는 화덕[요 窯]를 발명했다. 세네카는 이런 차원 낮은 지혜를 약간 빈정거렸다. 포세이도니오스에게서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고, 인간의 이성이 동등한 등급으로 기계적인 면과 이론적인 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위대한 발견물들은 자연의 차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숲의 불이 처음에 광물질을 녹였다. 이간의 아래 윗 이가 밀의 낱알을 빻기 시작했다. 기예와 자연 사이에 사람들이 기꺼이 표시할 만한 대립은 없다는 것이다.
포세이도니오스는 문명의 역사에도 동일한 생각을 적용했다. 그리스 역사가 폴뤼비오스(Polybe, Πολύϐιος 전208경–전126경)를 이어받아서 기원전145년에서 전86년까지 일어났던 사건들을 다룬 52권의 책에서 그는 로마 문명에 앞선 문명들, 즉 에트루리아(Etrusque, Etruria) 문명와 그리스 문명들의 연속으로서 평가했다. 그러나 로마 문명은 앞선 문명보다 완전하고 완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포세이도니오스에게서 역사는 지리학과 마찬가지로 또 도덕론과 자연학과 마찬가지이며, 철학의 대상이 도처에서 재발견되는 것과 똑 같은 역동적 연속성으로써 증언하였다. (48QKA)
제3절 기원전1세기경 에피쿠로스학자들 Les Epicuriens du 1er siècle. 359
에피쿠로스주의 또한 로마의 정복 후에 철학의 이러한 르네상스에 참여했다. 이 학파의 인물로서 아폴로도로스(Apollodore Ἀπολλόδωρος, 전130-87/81)는 기원전 81년에 죽었고, 키케로는 기원전 79년에 아테네에서 파이드로스(Phèdre, Φαῖδρος, 전1세기경 활동)의 강의를 들었으며, 시돈 출신 제논(Zénon de Sidon, 전155-전75)은 전76년에는 늙은이였으며, 키케로의 친구인 가라다 출신 필로데모스(Philodème de Gadara, Φιλόδημος 전110경-전40경)도 있는데, 이들의 여러 저술들은 기원후 79년에 베수비우스화산 폭발로 묻힌 도시 헤라쿨라네움(Herculanum, en latin Herculaneum)의 폐허에서 발견되었다. 마지막으로 루크레티우스(Lucrèce, Lucretius, 전98-전55)가 있다. 자 이 많은 이름들은 에피쿠로스주의가 로마 세계에서 어떤 점에서 주목받았는지를 증거한다.
에피쿠로스학자들은 다른 학파들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방어해야했다. 필로데모스는
자신의 저술 기호들에 관하여(Sur les Signes, περί σημεῖον)에서 스토아학자인 퀴레네의 디오뉘시오스(Deny, en, Dionysius of Cyrene, Διονύσιος, 전150경)와 에피쿠로스학자들인 시돈의 제논(Zénon de Sidon, 전155-전75), 디오뉘소스(Διώνυσος) 계보인 브로미오스(fr. Bromios en. Bromius, ??), 데메트리오스 라콘(Démétrios Δημήτριος, Demetrius Lacon 전 2세기후반) 사이의 토론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사람들은 에피쿠로스가 현상들에서 보이지 않은 실재성들로 즉 빈 것과 아톰들로 가기 위하여 기호들을 사용했다는 것을 안다. 예를 들어 운동은 빈 것의 기호이다. 디오뉘시오스는 그것에 대해 반대했는데, 사람들이 부질없는 현상들로부터 빈 것과 원자와 같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어떤 다른 질서인 실재성으로 이행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는 만일 사람들이 관찰한 것[대상]을 가지고 어떤 비유 위에 근거한다면(예를 들어 종들의 불변성으로부터 아톰들의 불변성로 결론을 끌어내면서), 사람들은 동일한 경우들에 그것[유비]을 제한해야 하거나 또는 닮음의 정도를 지적해야 하는데, 그러면 전자[제한]의 경우에 유비는 생산성이 없는 것이 되고, 후자에서는 사람들이[정도차를 인정하게 되면] 완전히 임의적이 될 것이다. 제논은 에피쿠로스의 귀납추론을 옹호하면서 “닮은 것에서 닮은 것으로 이행”이라고 응답한다. 그의 원리는 보이지 않는 것(l'invisible, ἄδηλον)이 그 작음 때문에 우리들에게만 그렇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축소해서 있는 현존의 조건들이 우리가 확대해서 관찰하는 조건들과 동일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모든 운동들 안에서 우리가 공동의 특성을, 장애물들이 멀어지는 경우에만 생산될 수 있는 그런 특성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하면서, 우리는 감춰진 운동 속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당연히 결론짓는다. 게다가 브로미오스는 수많은 사실들이, 특히 차이 있는 것들을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동반하는(τό συνεδρεὺον ἀχωρὶστως) 상황을 더 잘 분간하게 해주고 또 다르지만 동시에 닮은 사실들이, 닮아야 한다는 것을 재인식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데메트리오스는 덧붙여서, 사람들이 모든 측면으로부터 겪었던 경우들로부터 그리고 반대 주장에 그럴듯한 미광도 남기지 않는 경우들로부터 결론을 내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두 가지 본질적인 관점들만을 분간해낼 뿐인 이 매우 흥미있는 토론은 변질할 수 없는, 게다가 귀납적 결론들이 지지하게 되는, 자연에 대해 일종의 신뢰를 가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에피쿠로스학자[데메트리오스]는 안정된 개념들을, “불변하는 공통 특성들”을 인정하였다. 그가 또한 말하기를 “그러한 사물들은 저러한 다른 사물들의 고유한 개념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물체가 그런 그대로 덩어리이며 저항하고 있다고 말할 때처럼, 또한 인간이 그런 그대로 이성적 동물이라고 말할 때처럼” 말이다.
합리론과 경험론의 이 같은 혼합은 데메트리오스 라콘이 회의주의자들에게 행했던 응답에서 보여진다. 회의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증명의 불가능성을 제기했다. 왜냐하면 그 증명은 항상 그 자체로 이미 증명된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무한소급하면 증명될 수 ㅇ없는 것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특별히 결론이 난 증명을 정립한다. 예를 들면 원자들과 빈 것이 있다는 증명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증명을 확실하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때에 그 증명에서 류적인 증명의 증거를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한 류의 종이 있다고 하는 바로 거기에서, 사람들은 그 한 류는 [일반] 류의 종이기 때문이다.” 이 동일한 특성이 여전히 에피쿠로스 학자들의 지적 태도를 매우 공감하게 해 준다. 에페쿠로스학자들에게서는, 언어집착과 변증법에 대한 그들의 반감이 있고, 사건들 한가운데(in medias res) 처해져 있는 것에 그들의 용감함이 있다.
필로데모스의 책 수사학에 관하여(Sur la Rhétorique)는 양식에 따른 질문, 즉 수사학은 하나의 기예[예술]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에피쿠로스 학파에게 대답한 것이다. 사람들이 소피스트들의 학교들에서 받은 교육이 인민의회와 재판정에서 실천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특히 관건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미 말했다. “동등하고 [때로는] 대립된 시기들의 소란에 의해 유사한 타락에 유혹받는 젊은이들이 소피스트들에게 보수를 지불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돈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곧바로 알았다.” 따라서 그것은 기예이지만 정치학에서 무용한 기예이다. 그러나 이점에 관해 그 학교의 내부에서는 토론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필로데모스가 심각하게 로도스의 에피쿠로스학자들을 비난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학자들이 에피쿠로스 속에서 수사학은 기예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았다고 소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의 저술 음악에 대하여(De la Musique)에서 그는 스토아 학자인 바빌론의 디오게네스의 견해들을 토론했는데, 이 책은 그만큼 큰 흥밋거리이다. 그 스토아학자는 여기서 진실한 보수주의자로 스스로 자처하고, 음악 덕분에 전통적 그리스 문명과 자신과의 내밀한 연관을 또한 신들에게 경건과 숭배에도 자신의 연관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즉 음악이 정념들을 고요하게 해주고 인간들을 묶어주기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 에피쿠로스 학자는 반대로 진실한 합리주의자로서, 그것의 용도들과 관습들에 강한 인상을 받지 않은 자유로운 정신이며, 그래서 예를 들어 노래는 시의 사유들의 중대함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못한다고 그는 이의 제기 한다.
분노에 관하여(Sur la Colère)라는 작은 책자는 정념의 서술에서 크뤼시포스(Chrysippe, 전281-205)를 이용하여, 헛된 분노를 자연적 분노(une colère), 즉 분개(l'indignation)와 구분한다. 이 분개는 고약한 이들로서는 겪어보지 못하는 것이고, 현자들에게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필로데모스가 소피스트라 불렀던 학파의 이설학설에 반대하여 또 특별한 저술을 쓰면서까지 이 소피스트들에 반대하여 에피쿠로스의 정통학설을 옹호하기 위하여 취했던 잘못을 이미 보았다. 최근에 연구된 이 저술의 짧은 글 조각에서 보면 그는 모든 악[잘못]에 대하여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사중 치료제(le qusdruple remède, tetrapharmakon)를 지적한다. “신은 걱정할 것이 없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선은 쉬운 습득이다. 위험은 참아내기 쉽다.” 에피쿠로스가 그의 제자들에게 이런 종류의 정신에 대한 취향을 불어넣었다.
결국, 루크레티우스(Lucrèce, Titus Lucretius Carus, 전98-전55)의 경탄할 만한 시 사물의 본성(De rerum natura)(De la nature des choses)가 태어나게 하는 시대가 온다. 이 시는 사물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통찰에 의해 평온해진 정신의 평정(la sérénité)을 노래한다. 우리에게 이 에피쿠로스 찬가들은, 그의 관념들이 로마의 최상위의 정신 소유자들에게서 발견했던 열렬한 수집의 증거이다. 거기에는 막중한 강조가 있는데, 그 강조는 그리스 다른 학파들의 변증법의 경쾌함(l'agilité)과 로마에서 아직 덜 평가받았던 이 생동감(cette virtuosité)을 대조하는 것이다. 이 광활한 시에서 모든 것이 에피쿠로서로부터 나온 것인가? 확실히 아니다. 제4권에서 기상학 설명의 상세한 기술들은 오히려 포시도니오스 또는 테오프라스테스에서 온 것이다. 그는 가끔은 또한 엠페도클스에게 직접적으로 편을 든다. 사람들은 거기에 에피쿠로스학파들에게서는 거의 습관화되어 있지 못한 비유적 해석들을 발견한다. 게다가 감정 자체는 완전히 에피쿠로스 학자의 것이 아니며, 루크레티우스 평정은 비관주의가 섞여있다. 제5권 마지막에 있는 인류의 역사는 에피쿠로스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그 역사는 문명 속에서 진보라기보다 오히려 타락(une déchéance)을 보여준다. 수천 번 표현되는 이 치료할 수 없는 퇴폐의 감정은 그 스승을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들은 제3권에서 영혼의 도덕성에 관해서 생각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영혼이 죽는다는 것을 수많은 논증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러한 것이 한 에피쿠로스 학자에게는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전체는, 일단 이 주제가 인정되면, 불안하지 않음[고요함]을 간직하는 자들에게 이야기한다. 루크레티우스는 그래도 “불사(不死)”에 대해 명상하면서 무의 공포에 대하여 우리를 보호하고자 원했다. 그 유명한 자연의 활유법(la prosopopée)은 에피쿠로스의 논증이 아니며 오히려 그 활유법[열변]은 사물들의 단조로운 영원함을(eadem sunt omnia semper: 모든 것은 항상 동일하다)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보다 훨씬 더 많이, 우리가 비난들 속에서 만났던 비관주의의 주제들을 이용한다. (48QKH)
제4절 새로운 아카데미의 종말 La fin de la Nouvelle Académie
기원전 1세기 전반에서 제반 학파들에게 닥친 위기는 아카데미에서도 만찬가지였다. [아카데미 11대 학장인] 클레이토마코스(Clitomaque, Κλειτόμαχος 186-109)를 계승한 학장들은 110년에서 85년까지는 텟살리아 지방의 라리사(Larissa, Λάρισα) 출신인 필론(Philon de Larissa, Φίλων, 전145경-전79경)이 그리고 85년에서 69년까지는 안티오코스(Antiochos d'Ascalon, Άντίοχος ὁ Ἀσκαλώνιος, 전125경–전68경)가 학장이었다. 이 두 학장들은 아카데미 학설에 부여할 의미에 관하여 그들의 계승자들 사이에도 그들 사이에도 합의를 보지 못했다. 우리는 키케로의(Cicero, 전106-전43)의 초기 아카데미학자들(Premiers Académiques)을 통해서 이 논쟁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키케로는 기원전88년에서 전85년 사이에 로마에서 필론을 알았고, 또 기원전 79년에는 아테네에서 안티오코스의 제자였는데, 그는 기원전 46년에 첫 저술로서 초기 아카데미학자들들을 썼으며, 그 저술의 제1권은 카툴루스(Catulus) 인데 소실되었으며, 카르네아데스의 이론에 대한 진술을 포함하고 있다. 제2권은 루쿨루스(Lucullus) 인데 보존되어 있으며, 루쿨루스에 의해 안티오코스의 학설에 대한 진술을 정확하게 포함하고 있으며, 그 뒤편에는 키케로가 행한 그 학설에 대한 반박이 실려 있으며, 키케로는 라리사의 필론과는 부합하였다. 다음해[45년]에 그는 동일한 시론의 둘째 편집본을 4권으로 썼는데, 둘째 아카데미학자들(Seconds Académiques)이다. 그중에서 제1권만 보존되어 있는데, 바로(Varro, 전 116-27)의 입을 빌려서 쓰여진 것으로 안티오코스 학설의 진술을 포함하고 있다.
논쟁의 주제를 잘 이해하도록 하기위하여, 우리는 시대를 앞서서 둘째 아카데미학자들의 제1권의 내용을 먼저 진술할 것이다. 바로-안티오코스가 가장 낯선 역사적 주제들 중의 하나를 진술한다. 즉 플라톤과 아카데미아학자들의 진실한 계승자들은 제5대 학장 아르케실라오스(Arcésilas, Arkesilaos 전315-241)도 제10대 학장인 카르네아데스(Carnéade Καρνεὰδης, 전219-128)도 결코 아니고, 스토아 학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잘 이해되고 순화된 스토아주의를 다시 다루면서, 그의 일관성 없는 내용을 사람들은 아카데미의 전통에다 다시 관련시키려 할 것이다. 키티움의 제논(Zenon, Ζήνων, 전335-264)은 폴레몬(Polémon d'Athènes, Πολέμων, 전314-270)을 통해 그 전통을 받아들였고, 몇몇 이름[용어]들을 바꾸었을 뿐이다. 즉 플라톤이 선한 것들(des biens)이라고 불렀던 부와 건강을 선호할 수 있는 것들(préférables)이라고 부르면서, 품행의 규칙들에는 아무 것도 변경하지 않았다. 게다가 영혼의 비물체성을 거부하면서도, 그는 능동자와 수동의 이원성으로 되어 있는 플라톤의 자연학의 본질을 간직했다. 결국에는 그도 플라톤처럼, 그 확실성을 감관들 속에 두었다고 할지라도 그 학실성을 인정했다. 여기서 안티오코스는 모든 뉘앙스를 지우는 혼합주의적 독단론의 창설자이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사람들이 파나이티오스와 포시도니오스에게서 확인했던 플라톤주의와 스토아주의의 접근에 협조한다.
그런데 키케로가 이야기하기를, 기원전 87년 루쿨루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재무관으로 있으면서, 그의 친한 친구들 가운데에는 안티오코스와 그의 친구인 헤라클레이토스(Héraclite de Tyr, Ἡράκλειτος, s.d.)가 있다.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에 필론의 책 두 권을 가지고 왔다. 안티오코스는 이것들을 읽었고, 자극을 받아서, 헤라틀레이토스에게 질문하기를, 필론 또는 어떤 한 아카데미학자가 이러한 사정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도대체 들어보았는지를 그에게 물었다. 그때는 안티오코스가 자기 스승에 반대하여 소수스(Sosus)란 제목이 붙은 책을 썼을 때이다.
안티오코스의 분노[자극]을 일으킨 것은 아마도 그가 역사를 쓰는 데 그 자신이 갖는 독특한 방식에 기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루쿨루스와 베로에게 응답으로 키케로는 필론을 재현하면서 이들의 견해에 대해 다른 역사적 진리를, 즉 회의적인 전통의 진리를 대립시켰다. 회의적인 전통은 자연학자들인 아낙사고라스와 엠페도클레스과 더불어 시작하여, 안티오코스가 플라톤과 분리시키기를 원했을 지도 모를 소크라테스에서도 계속되며, 그리고 플라톤 자신과 퀴레네학자들과 더불어서도 계속된다. 신플라톤학파인 누메니오스(Numénios, Νουμήνιος 후2세기 후반)가 필론에 관해서 말하면서, 그 필론은 의견을 바꾸었고 그리고 그가 클레이토마코스의 독단을 익히고 나서 좀 과장하더니만 그자신이 독단론자가 되었다. 독단론자가 된 것은 “수동적인 인상들과 이 인상들 사이의 일치 속에서 그가 발견했던 명증을 통해서”였다. 따라서 필론은 안티오코스의 독단론에 이끌려지는 경향에 있었던가? 섹스투스에 따르면, 동일한 문단 속에서 필론은 사물들은 이해 불가능하기도 하고 또 사물들은 이해가능하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키케로는 이것을 이해 가능한 표상작용에 대한 제논의 정의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이해될 수 없다는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소개한다. 결국 사람들은, 사물들이 [똑같이] 지각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신 속에서 각인되어 있는 명증한 사물들(perspicua)을 단번에 그가 인정하는 것을 본다. 많은 시간동안에 그의 자제였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그를 잘 알았던 안티오코스가 그에게 모순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잘못을 범했을까? 모순은 아마도 피상적일 뿐일 것이다. 필론은 스토아학파의 기준을 인정하지 않고서도 저항할 수 없는 명증함들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섹스투스의 원전도 다른 것을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 만일 사람들이 스토아학파의 기준을 사용하기를 원한다면(말하자면 표상이 대상에 상응할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구별될 수도 있는 표상[이라는 기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연의 자발성으로 가게 내버려 두면은, 이해 가능한 사물들이 있다. 이것이 키케로가 말한 명증한 사물들(perspicua)이다. 따라서 필론은 회의론자 아이네시테모스(Énésidème, Αἰνησίδημος, 전80-후10)가 말했던 철학자들 중에 속한다. 이 철학자들은 많은 사물들에 관하여 독단적으로 말하지만, 그들의 주장들이 이해가능한 표상에 근거하게 하고자 원하지 않는다고. 사실상 스토바이오스(Jean Stobée, Ἰωάννης ὁ Στοβαῖος, 5세기경)는 우리에게 그 자신의 이름으로 진실한 도덕 교육의 초안을 남겨주었다. 그 초안의 서술은 스토아학파의 교육 초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것이 독단으로 점점 굳어지는 경향이 있는 아카데미학파 사상의 결말이다. 다. (48Q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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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 48Q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