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느웨는 누가 갈 것인가? 요나 1: 1~3 9월7일주일
25년간 딸을 찾아 헤맸던 송길용씨가 지난 26일 세상을 떠났다.
‘실종된 송혜희를 찾아 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을 전국에 붙이며 25년간 딸을 찾아 헤맸던 송길용씨가 끝내 딸을 만나지 못하고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딸이 실종된 직후부터 송씨는 딸을 찾는 현수막을 전국에 설치했다.
25년간 고속도로 휴게소, 수도권 대학가, 도심 교차로 등 곳곳에 걸려 있었던 터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송씨는 현수막뿐 아니라 트럭에 실종된 딸의 사진을 붙이고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여러 차례 방송에도 출연했지만 딸 혜희씨의 행방을 찾지는 못했다.
송씨의 아내는 딸이 실종된 후 우울증을 앓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나>라는 사람의 이름은 대단히 부드러운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을 보면 그런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순종하기는커녕 오히려 반발하고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칩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그 이스라엘 땅에 수많은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들을 다 제끼고 하나님은 요나를 지명하여 불렀습니다.
부르시고 하시는 말씀이 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니느웨가 어떤 도시야하면..니느웨는 자그만치 3일을 걸어야 끝에 닿을 수 있는 큰성습니다
그런데...그땅에 죄악이 가득하니 하나님이 사람을 보내어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지만...그 도시로 요나를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거룩한 사역에 요나가 지명을 받았으면 기뻐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요나는 도망을 칩니다..
주님은 복음을 들고 가서 외치라고 명령하셨는데,,,,
이 명령이 요나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니느웨이 ...대상이 맘에 안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너 예루살렘으로 가라하든지 아니면.... 베들레헴으로 가라든지 가버나움으로 가라 하면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의 나라 니느웨로 가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구원해도 충분할 터인데, 왜 이방인을 구원하려고 그러시는가?
왜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필이면 나보고 가라고 그러는 것인가?
하나님은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도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방인은 좋으나 저 니느웨 놈들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요나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나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 땅 백성들은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여기 “그러나”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해가 안되는 선지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있나요?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 일어났고 방향이 니느웨와는 정반대인 다시스로 도망을 칩니다.
니느웨가 있는 동쪽으로 가야하는데 다시스가 있는 서쪽으로 도망칩니다.
왜요? 그 땅 백성은 죄악이 가득하기에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심판이 아니고 회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요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좁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들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조상대대로 조국 이스라엘에 원수 나라입니다.
그러니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문제는 3절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신기하게 불순종하는데도 순탄 합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기서...“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했습니다.
“마침”, “때를 맞추어” 배가 출항 직전인 것입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입니다. 아마도 요나는 이랬을 것입니다.
“거봐라 하나님이 실수 한거야” “그러면 그렇지, 내가 저 다시스로 가서 전하는 것이 하나님이 뜻일거야”
그러나 여러분! 착각하지 마세요.
일이 잘되고 길이 열린다고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가봐야 압니다.
계속 착각하면 앞에 대풍이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가는 길이 순탄하다고 그 길이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 길이 형통하다고 고집부리고 도망치면 머지않아, 십리도 못가서 발 병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인간은 모든 것을 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해석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잡아야 합니다.
말씀이 명한대로 가야하고 말씀이 명한대로 행해야 합니다.
길이 열린다고 다 길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넓은 길로 갑니다.
그러나 그길이 하나님의 길은 아닙니다.
좁은 길이지만 고난의 길이지만 주님이 명하는 길로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어긴 요나는 엄청난 돈을 들여가며 도망칩니다.
3절 하반절에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했습니다.
욥바는.... 지중에 이쪽 끝이고 다시는 저쪽 끝입니다.
도망치는 일에 돈을 내고 도망칩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 헛수고입니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돌아서야 하는데 그러지 못합니다.
오히려 돈을 지불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국 헛수고입니다.
어떻게 되었지요?
그는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고생하고 가는 만큼 고생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3일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요나가 니느웨로 가길 원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자기들만 누린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유대인만의하나님이 아닌 이방인의 하나님도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셔서 심판하시기 전에 반드시 한번은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고전9:16에서 말하기를...“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나 한 사람이 니느웨로 갔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나요?
3일 길의 니느웨를 하루길 외쳤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귀찮으니 다운타운에서만 몇 번 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엄청납니다. 그 성에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12만 명이라고 하십니다. 이 12만명은 성 전체인구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회개하여 돌아온 백성들의 숫자만을 말하는 것인지 분별이 어렵습니다.
어떻튼 12만명이 삽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데 12만 명이니 어찌 하나님이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가라. 그리고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가야 할 니느웨는 어디입니까?
여러분 가정일수도 있고 직장일수도, 친척일수도 있습니다.
. 저 북한 땅 일수도 있습니다. 누가 가야 합니까?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갔듯이 여러분이 가기를 축원합니다.
능력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도구로 쓰임 받을 뿐이고 구원을 얻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런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 앞길에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