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의 시력 보호를 위해 원본에 없는 문단 띄우기를 하였습니다.
연무대서 지은 죄
권예자
나는 지금도 연무대를 지날 때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작은아이가 논산훈련소에 입소하던 해 3월 첫 일요일에 내가 저질렀던 부끄러운 일이 생각나서.
대학 때부터 집을 떠나있던 큰아이와는 달리 언제나 우리 곁에 있어온 터라 그런지, 작은아이가 입대하자 나는 가슴이 허해서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잘 참았는데 한 달을 넘긴 때부터는 정신없이 아이가 보고 싶고, 걱정되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은 건강한가? 식성도 까다로운데 음식은 잘 먹을까? 훈련은 너무 힘들지 않을까? 일해도 쉬어도 잠자리에서도 그 애의 생각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음식도 먹을 수 없었다.
그 애의 방에는 부대에서 보내준 아직은 몸에 잘 어울리지 않는 군복을 입고, 경례하는 사진을 걸어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며 어루만지고 또 만졌다. 길을 가다가도 얼룩무늬 군복이 멀리 지나가는 것만 보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텔레비전에서 군인들이 등장하는 프로그램만 나와도 그냥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는 하였다.
그날, 나는 아침을 일찍 해 먹고 어림없는 일이니 포기하라는 남편의 말을 못 들은 척, 훈련 중인 작은아들을 만나러 갈 준비를 하였다. 그 애가 좋아하는 질 좋은 오징어 두 마리를 구워서 한 주먹이 되도록 잘게 자르고, 오백 원짜리 동전 스물세 개를 필름 통에 넣었다. 남편은 말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면서, 자기도 아들이 보고 싶은지 그럼 연무대 주위라도 한 바퀴 돌고 오자며 차를 몰았다.
싸늘하게 맑은 3월의 하늘은 푸르고, 가로변의 마른 나무줄기 끝은 물기가 어린 듯 촉촉해 보였다. 논두렁의 잔디도 푸른빛이 비칠 듯 말 듯 부드러운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승용차 안의 나는 어떻게 하면 연무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듯 아파서 논산에 도착할 무렵엔 거의 파김치가 되었다.
드디어 연무대 위병소 앞에 도착하였다. 남편은 소용없는 일이니, 여기나 한 바퀴 돌고 가자며 멀찍이 서 있다.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가 싶게 시치밀 딱 떼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위병소로 다가갔다.
“수고하십니다. 저 말씀 좀 묻겠어요. 이 안에 성당이 있다는데 사실인지요?”
“예,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요?”
부동자세를 한 위병의 대답이었다.
“집안일로 논산에 왔는데 일요일이라 미사를 드려야 하는데 성당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그래요. 이 안에서 미사를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가슴이 쿵쿵 뛰는 중에도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 군인의 얼굴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여기서 거절을 당하면 그냥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어쩌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짧은 동안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신자라는 무슨 증표가 있습니까?”
천상의 소리 같은 위병의 대답. 나는 일요일이면 가지고 다니는 가방 속의 성가 책과 미사포, 손가락에 끼고 있는 묵주반지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남편과 나의 주민등록증을 받아서 조회하더니 그것을 맡기고 들어가서 미사를 보고 나오시라면서, 친절하게 성당이 있는 위치까지 안내해 주었다.
연무대 안으로 들어서니 종교행사를 하러 절이나 교회 그리고 성당으로 향하는 군인들이 줄을 맞추어 질서 있게 움직이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였다. 모두가 똑같은 옷에 모자, 같은 동작으로 움직이는 그 많은 군인 중에 내 아들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것도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나는 속으로 많이 떨렸지만, 겉으론 태연하게 일단 성당으로 향하였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성당의 아래층 뒤편에 서서 내부를 가득 채운 군인들을 주의 깊게 둘러보았지만 우리는 아들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꾹 눌러쓴 모자에 얼룩무늬 군복만이 가득히 보였을 뿐. 게다가 누구인가가 거짓말을 했다고 금방 뒷덜미를 낚아챌 것 같아서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우리는 아래층에서 찾는 것을 포기하고, 이 층에서 내려다보면 나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 층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계단을 한 코너 돌아서 다시 오르려는데 “엄마!” 부르며 나타나는 작은아이의 모습!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얘야!”
“엄마, 어떻게 여길?”
“네가 보고 싶어…….”
그 말뿐, 우리는 아무 말도 더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주변의 훈련병들이 부러운 듯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작은아이는 그들에게 미안한지 아래층에 내려가서 미사를 드리시고, 끝날 때 조금 일찍 나오시면 제가 문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 애는 입대할 때 같이 입소한 친구들과 매주 일요일 종교행사 때 성당 계단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단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 엄마 아빠가 지나가더라며 저도 깜짝 놀랐다며 반가워하였다.
우리 부부는 아래층 가운데 맨 앞자리에서 미사를 보았다. 그 자리가 훈련소의 제일 윗분들이 앉는 자리였던지, 조금 후에 장교 세 사람이 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덜컥 겁이 나고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분들은 낯선 민간인에게 친절하게 방석까지 권해주며 이곳에 아시는 분이 계신가 물었다. 내친걸음이었다. 나는 다시 위병소에서와 같은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였고, 옆의 장교는 예식에 갈 때 시간이 부족하면 차편을 제공해 주겠다고 한다. 나는 차를 가지고 왔노라고 사양하면서도 지은 죄가 있어서 가슴이 떨려 성가조차 부를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젊은 신부님(그분도 군 복무 중일 것이다)의 차분하고 꾸밈없으신 강론, 남자들끼리 부르는 우렁찬 성가가 주는 뜨거운 느낌. 나는 맨 뒷자리에 있을 아들의 음성이 들리기라도 하는 듯 자꾸만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특히 감동적인 것은 봉헌 때에 가진 돈도 없을 훈련병들이 헌금하려고 앞으로 나오는 모습이었다. 지금 그들은 자기 자신을 국가에 봉헌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 생애의 가장 중요한 젊은 시기를 어떤 대가도 없이 국가와 민족의 부름 앞에 내어놓고 있는 그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헌금하러 제대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메었다.
미사 후에 일찍 나오니 아이는 친구들과 문 앞에 있다가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잘하고 있어요. 20일 정도 지나면 훈련 끝나고 전체 면회 있으니까 그때 뵐게요.” 한다. 우리는 문 앞에서 다시 한번 그의 손을 꼭 쥐여주고는 몇 번씩 뒤를 돌아보며 연무대를 나왔다.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쏴 하고 불어와 더운 얼굴을 식혀주었다.
차에 돌아와서야 내가 사순시기에 기막힌 거짓말을 몇 번씩이나 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다른 부모들은 입대한 자식이 보고 싶어도 다 참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나는 아무래도 조금 모자란 엄마였던 것 같다.
그 후 작은아이는 강원도 홍천에서 복무하면서 강릉 무장 공비 토벌에 투입되기도 했지만,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치고 우리 곁으로 돌아와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지난 11월 24일에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짐을 느낀다. 국가의 부름에 잘 적응해온 수많은 장병과 그 부모들 앞에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용서를 바란다. (2002)
첫댓글 군대간 아들이 얼마나 보고싶었으면~
깜찍하고 애틋하고 뭉클하고 재밌습니다.
표현이 별로 없으신 울 엄마도 오빠 군대 가던 날,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우셨는데, 전 오빠가 전쟁터에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요. 나는 아쉽게 딸이 없고 아들만 둘이었는데,
그 중 둘째가 엄마를 참 많이 챙기던 아이였지요.
당시에 군대 2년도 참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둘째가 ...
오늘, 11월 24일이 우리 둘째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