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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 제2권. [고대]그리스와 로마 시대, 231-462
제2권.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Période Hellénique et Rome 231
제1장 소크라테스 학자들 Les socratiques 233
제1절 일반적 개관 Caractères généraux 233
소크라테스적인 관념들의 운동은 개념의 철학으로부터 나왔는데, 역사는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이 붙은 동시대 학파들의 그룹에게 소크라테스와 같은 자격을 결합시킨다. 이 학파들은 이 관념들의 운동에 아주 단호하게 적대적이며, 게다가 이 학파들은 자기들 사이에도 적대적이다. 이 학파들 중에는 메가라의 에우클레이데스(Εὐκλείδης, 전450경-전366경)가 설립한 메가라학파가 있고, 안티스테네스(Ἀντισθένης, 444-365)가 주재한 퀴니코스학파, 퀴레네 출신 아리스티포스(Ἀρίστιππος, 전435경-356)와 결합되어 있는 퀴레네 학파가 있다.
이 학파들의 역사적 중요성은 다양한 이유들 때문에 규정하기 어렵다. 우선 그들의 명성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웃해 있기에 축소되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의 신봉자들의 작품들 중에서 총서의 제목들만, 때로는 그 자체들이 의심받는 작품제목들만이 남아있다. 그들의 학설들 중에서 학설사적 요약들만, 종종 후기 학파들의 언어로 쓰여진 것만 남아있다. 몇몇 인물들에 관해서는 독자들이 학설의 뼈대를 알도록 해주는 일화들 또는 유용한 문장들의 모음집만이 남아있는데, 이것들은 역사라기보다는 성인전으로 더 많이 남아있다. 결국에는 그들의 추억은 에피쿠로스주의와 스토아주의라는 독단적 중요학파들의 추억에 의해 가리어져 있다. 이들 학설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죽음 이후에 이루진 것이다. (2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요학파들은 “소(小)소크라테스 학파”들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들이 은밀하게 폭파장치를 했던 플라톤의 정신이 그들의 공격들에 지배받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시대의 지적인 삶을 지배했던 학자들에게서는 분명한 자리를 차지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의 몇몇 학파들은 에피쿠로스(Ἐπίκουρος 전342-270)와 제논(Ζήνων, 전335-264)의 학설들 측면에서 다소 오래 존속했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와 마주하는 퀴레네주의는 그의 고유한 독창성을 가졌다. 또 다른 학파인 퀴니코스학파는 사라진 후에(적어도 겉으로는) 기원후 초기 경에 다시 나타나서, 이교도 철학의 마지막 잔존 뒤에도 기원후 4세기까지 계속해서 존속한다. (234)
이 학파들과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철학 사이에는, 학설의 충돌보다 훨씬 더 깊은 어떤 것이 작동하고 있었다. 문제가 되는 것, 그것은 철학의 지위와 역할이다. 외면적으로 이미 소크라테스학파들의 대부분은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에게 심하게 비난했던 특징들 중의 하나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의 교육에는 수업료를 지불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학파들 속에는 아카데미아 또는 뤼케이온에 닮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 학파들은 청강자들이 수업료를 지불했던 한 스승 주위에 모인 단순한 회합들과 같은 것이고, 이 설립자가 생존하는 때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법률적으로 인정되는 종교적 연합체들과 같다. 심지어는 교육의 권고에 있어서도 대조를 이룬다. 즉 플라톤은 철학자에게 막중한 과학적인 준비를 요구하였는데, 안티스테네스는 또는 아리스티포스는 그들의 제자들에게 완전히 무용한 과학들인 천문학 또는 음악으로부터 우회시켰다. 아리스티포스가 말하기를 수학들이 무슨 소용 있는가? 왜냐하면 수학들은 선들에 대해서도 악들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수학과 동시에 모든 변증법을, 말하자면 진리 확립에서 모든 토론의 사용을, 거부했다. (234)
따라서 가르치고, 토론하고, 증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수사학을 수단으로 암시하고 설득하며,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인상에 호소했다. 사람들은 플라톤의 방법의 대척점을 보다 더 명료하게 다룰 수 없었다. (234)
또한 사람들은 사유의 작업들, 즉 반성에 의해 교묘하게 만들어진 작업들이라고 하는 모든 것 속에서 협약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을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것들로는 특히 법률들이 그러하고, 법률들과 더불어 그것들의 구조로 된 도시국가들도 그러한다. 여기서 플라톤의 취향과는 매우 대조가 되는, 정치학에서 완전한 무차별성이 나온다. (234) (48SME) (57VLE)
제2절 메가라 학파 L'école mégarique 235
메가라학파의 우두머리인에우클레이데스(Εὐκλείδης, 전450경-전366경)는 그래도 플라톤과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다른 제자들이 스승이 죽고 난 후에 아테네를 떠났는데, 에우클레이데스가 메가라에서 이 제자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에우클레이데스에 의해 수집된 소크라테스의 한 대화로서 테아이테토스편을 소개하면서, 그는 비극적인 사건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우정의 인연을 증거 하기를 아마도 원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몇 구절에서 그의 학설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라 하더라도, 그의 학설은 플라톤의 학설에 대척점에 있다는 것은 그래도 사실일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이것을 상기해보자, 즉 사람들이 관념들 사이에 통합되고동시에 그럼에도 구별된그런 관념들의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유 즉 모든 지적인 삶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에우클레이데스가 “온선(le Bien)이 과학, 신, 지성, 또 다른 이름들처럼 다른 이름들로 불리어진다하더라도, 그 온선은 유일한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가 반대되는 것들이 현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온선의 반대되는 것들을 제거할 때, 그의 의도는, 개념들을 동일하다고 선언하는 것과 달리 개념을 통합하기 위하여, 또는 개념들을 서로 배제하는 것과 달리 개념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모든 시도들에 저항하는 것 같다. 과학(φρόνησις), 신, 지성, 이것들은 정확히 항목들이다. 예를 들어 티마이오스편에서 플라톤은 이것들을 그 자체들 사이에서 구별하고자 애쓰고, 그리고 이것들을 통합하면도 이것들의 위계를 정하면서 이것들을 최고선과 구별하고자 애쓴다. 에우클레이데스는 항목들을 동일시하면서도 이것들의 대립 용어를 무화시키면서, 티마이오스편 또는 필레보스편의 사색들의 모든 류적(du genre) 변증법적 사색을 불가능하게 한다. 다양성은 이름들 속에만 있고 사물들 속에는 더 이상 없다. 사람들은 또한 얼마나 비교에 의한 추론이 플라톤에게 친숙하고 필수불가결한지를 안다. 에우클레이데스는 그것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동일하지도 차이 있지도 않은 유사한 것을 인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또는, 비교의 항목들은 사물들과 비슷하며, 그리고 이때에 사물들을 이용하는 편이 훨씬 더 가치 있다. 그런데 또는, 그 항목들은 사물들과 다르며, 그 때에 결론은 가치가 없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가 에우클레이데스의 후계자인 밀레토스 출신의 에우불리데스(Εὑϐουλίδης, 전4세기 전성기 활동)에게 부여한 유명한 소피즘들은 보다 분명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목표로 삼았고, 또한 키케로(전106-43)가 아카데미학자들(전45)에서 이 유명한 것들을 소개하는 형식에서는 스토아학파의 논리학을 목표로 삼았다. 모순율이란 동일한 질문에 관하여 예와 아뇨를 동시에 말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소피즘들은 우리에게 이런 경우들을 제시한다. 즉 이 원리[모순율] 덕분에 사람들은 예와 아뇨를 동시에 말하도록 강요하는데, 이 때에 그 결과로서 그 사유는 그 자체로 부정된다는 의미이다. [첫째] 그러한 것으로 거짓말쟁이 궤변[파라독스]이 있다. “만일 너가 거짓말을 한다고 말한다면, 그리고[동시에] 너가 진실을 말한다고 한다면, 너는 거짓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거짓말하고 또 동시에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 된다. [둘째] 논리학의 이름으로 그 메가라학자는 자신의 반대자에게, 그가 뿔들을 지니고 있다고 고백하기를 강요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잃어버리지 않은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 뿔들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그가, 반대자에게 그의 아버지를 너울에 씌워서 소개하면서, 그 반대자가 자기 아버지를 모른다는 것은 인정하도록 강요한다. [넷째] 그는 반대자에게, 엘렉트라가 동일한 사물들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다고 인정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남동생]를 아직 알지 못한 체 만났을 때, 그녀는 오레스테스를 알고 있으나, 그녀는 이자가 오레스테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그는 반대자를 침묵하게 하는데, 더미(un tas)를 형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밀알들이 있어야 하는지를 물으면서이고, [여섯째] 또는 대머리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머리카락을 잃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236)
이 모든 논리적인 농담거리들은 예와 아뇨 사이에서 선택의 가능성에 이르고, 따라서 정해진 개념들의 도움으로 토론할 수 있다. 이 농담들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메가라학파의 스틸폰(Stilpon, Στίλπων, 전360경-280년경)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테오프라스토스(Théophraste, Θεόφαστος, 전372-287)와 동시대인이었으며, 자기의 강의에 소요학파 제자들과 키레네학파의 제자들을 끌어들였다. 그의 교육에 대해 우리는, 개념의 철학을 살아있는 것에 접근시켰던 두 가지 부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우선 관념들에 대한 비판이 있다. 이 비판의 방법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가 지적했던 대로, 그의 반박들은 에우클레이데스의 방법이었다. 에우클리데스는 전제들을 비판하면서가 아니라 오히려 결론의 불합리성을 알게 하면서, 증명들(les démonstrations)을 공격했다. 마찬가지로 관념들의 현존을 가정하는 스틸폰은 관념들로부터 불합리한 귀결들을 연역해 냈다. 이상적 인간은 예를 들면 말을 하고 또는 말을 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이런저런 인간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하는 그 인간이 인간이라고 말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그 인간은 개념에 응답하지 않는다. 이상적 채소는 영원하다. 당신이 나에게 제시한 그것은 따라서 채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천 년 전에는 현존하지 않는다. 또는 만일 당신이, 그런 개별적 인간이 인간이란 개념에 대답한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또한 만일 이 인간이 예를 들어 메가라에 산다면, 아테네에는 그 인간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념의 속성은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판의 범위에 관한한, 사람들은 그 범위가 플라톤의 이데아만큼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비판들에 응답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한 노력들을 단지 회상한다. (237)
사람들은 또한 이웃하는 문제, 즉 술어의 문제에 관하여 스틸폰의 입장을 안다. 그 문제는 플라톤이 소피스트편에서 많이 고민했던 것이고, 그리고 그 문제에서 자신의 반대자들에 대해 모든 노력들이 집중되어 있다. 더욱이 이 주제에 대한 스틸폰의 주장은 우리가 막 검토했던 주장의 새로운 국면일 뿐이다. 만일 사람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각 개념이 자기 본질을 갖는 정의되고 안정된 개념들에 의해 사유하고자 원한다면, 어떤 명제를 발언하는 것이 금지되는데, 두 가지 구별된 본질들의 동일성을 주장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 말이 달린다 또는 그 인간이 착하다고 주장하는 것, 그것은 말과 인간이 그 자체로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또는 만일 사람들이 효과적인 면에서 선은 인간과 동일한 사물이라고 응답한다면, 치료의 선, 영양의 선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금지된다는 것이다. 콜로테스는 그의 저술인 철학자들에게 반대하여에서 우리에게 스틸폰의 학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아마도 에피쿠로스학파인 콜로테스(Κολώτης, 전 320경- 268경이후)처럼, 이 주제가 “삶을 제거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이 주제가 판단들의 해석을 제거한다는 것이며, 그 주제가, 말하자면 마치 개념들의 관계들처럼, 아테네의 관념론 전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237)
사람들은,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정되고 규정된 본질 이외에 비규정적인 실재성들이란 용어들을 도입함으로써만이, 그러한 난점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 실재성이란 잠재성과 같은 용어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사유의 생명은 사람들이 현존을 비존재에 일치시키기를 요구한다고 그의 사상적 아버지인 파르메니데스(Parménide, Παρμενίδης, 전540-450)에 반대하여 주장하면서, 익살스럽게 부친살해라고 스스로를 고발했다. 따라서 메가라학자들이 파르메니데스에 가까웠다는 것,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의 혁신자들로서 간주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은 그 사상자체에서는 그들에게 그렇게 많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무엇보다도 제시하고자 한 것, 그것은 고정된 본질들만을 인정하는 개념의 한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원했던 비규정적 실재성들을 도입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디오도로스크로노스(Διόδωρος Κρόνος)의 이름이 붙은 논증의 의미일 것 같다. 디오도로스는 에우불리데스 제자이며 프톨레마이오스 1세(Πτολεμαῖος, 전367경-전283)와 동시대인이다. 사람들이 ‘승리자(le triomphateur)의 논증이라 불리는 이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동일한 뿌리들에 도달한다. 이 철학에서 가능이라는 개념은 비규정적인 잠재성의 귀결로서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제시한 것이다. (238)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논증의 아주 단순한 형식을 (게다가 그 논증을 디오도로스에게도 심지어는 메가라학자들에게도 부여하지 않고서) 제안했다. 당신들이 모든 명제는 진리 또는 허위일 것이라고 일반적 방식으로 인정하자마자, 그 원리는 현재에 또는 과거에 만큼이나 잘 미래의 사건들에도 적용된다. 이어서 미래 사건을 위해서 어떠한 비결정성(또는 있을 가능성 또는 있지 않을 가능성)도 없는 것이 나온다. 가능의 긍정 주장은 모순율과 양립할 수 없다. 이 논증의 저자는 (자기 주제의 실천적 귀결을 통해서 그 논증을 반박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을 믿는 체 한 것처럼) 필연성을 증명하기를 원하는가? 모순원리는 미래에 관한 모든 의지와 모든 숙고를 불가능으로 이끈다. 에픽테토스(Epictète, Ἐπίκτητος, 50-125/30)는 우리에게 보다 복잡한 형식을 논증과정으로 보여주었으나 불행하게도 매우 모호하다. 이 추론작업은 과거에 근거한 모든 진실한 주장은 거짓이 될 수 없다는 것에, 그리고 다른 한편 불가능성은 결코 가능의 속성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남겼던 전개방식과 유사한 전개방식에서) 반대자에 따르면 모순의 원리는 보편적 범위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다시 말하면 미래에 상대적인 주장들에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서, 추론은 거기로부터 다음의 것을 연역한다. 즉 한 대안(그러한 사건을 일어날 것이다 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속에서 일어나지 않을 사건을 표현하는 단언은 가능성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왜냐하면 가능적인 것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또 있을 없는 것이기 때문인데, 반면에 문제 중인 사건은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결코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따라서 불가능이 가능이라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개념의 철학은 엄격하고 완전하게 규정된 실재성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239)
모든 메가라 학자들에게서, 사람들은 단지 공격들만을 보고 어떠한 긍정적 학설도 보지 못한다. 그들은 개념의 철학의 부정합성을 제시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 “반박술”들은, 사람들이 가끔 그들에게 빌려오는 의도를, 즉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론 대신에 고유한 관념론을 대체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추론이 그리스의 사상가들에게 - 그가 플라톤이라 할지라도 - 도대체 진리를 확립하려는데 사용되었던가? 그래도 그 추론은 여전히 변증법이 아닌가? 다시 말하면 반대자들에게 이의 제기된 단언의 귀결을 연역하고자 하는데 만 쓰인 변증법이 아닌가? 뛰어난 문장전환에 의해서, 플라톤은 이 변증법을 정신적 삶의 원리로 만들었다. 메가라학파와 더불어 이 변증법은 무겁게 땅으로 내려와서, 반박술의 용도로 쓰였다. (239)
그러나 이것은 플라톤에서와 아주 다르게 이끌어간 것으로, 정확하게 새로운 정신적 삶에 자리를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니다. 변증법과는 다른 교육의 수단들이 있다. 그 수사학자는 유용한 사물들에 대해 말할 줄 알고, 그것에 대해 설득적인 방식으로 말할 줄 안다. 그런데 이 수사학적 교육 방법을 엘리스 출신 알렉시노스(Ἀλεξῖνος, 전339-265)가 찬양 하였다. 그는 스토아학파의 제논과 같은 세대의 메가라학자이며, 에피쿠로스 정원학당의 초대학장인 헤르마르코스(Ἕρμαρχoς, 전325경-전250경)는 알렉시노스의 교육에 관하여의 한 구절을 인용하였다. 사람들은 거기서 그의 스승 에우불리데스만큼이나 잘 알려진 알렉시노스를 아는 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하는 개인적인 논쟁들로 가득 차있으며 비방하는 한 권의 책을 썼다. 알렉시노스는 철학적인 많은 것을 멀리하는 하나의 이상을 제시한다. 당시 그리스에서 그리고 그리스의 영혼에서 항상 있었던 수사학과 철학 사이의 논쟁에서, 주제들을 가르치는 형식적 교육과 사물에 도달하는 과학적 교육 사이의 논쟁에서, 그는 주저없이 첫째를 방편으로 취하였다. 그리고 그가 만일 문학적인 교수들에게 원문의 비평에 관하여 이들의 너무 촘촘한 탐구를 비난했을지라도, 그는 문제들에 결단을 내리기 위하여 그럴듯한 것을 사용하면서, 그들이 철학적 주제에 속하는 담론으로 유용한 것들을 다루었다 점을 찬양했다. 우리는 여기서 겉 표면을 유지하는데, 그 논쟁은 겉면의 안 표면일 뿐이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다른 학파들에서 유사한 리듬을 발견할 것이다. (239) (48TMB) (57VLF)
제3절 퀴니코스학자들 Les Cyniques 240
기원전 4세기 사상에서 공통적 특징, 즉 소피스트까지 올라가는 그 특징은 합리적 방식에 따라 인간을 형성하고 변형하기 위한 교육에 대한 거의 무한한 신뢰였다. (240)
이 특징은 예를 들어 크세노폰(Ξενοφῶν, 전440경- 전355경)에게서 발견된다. 그의 주요 작품들 중의 하나인 퀴로스 교육이 저술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퀴로스대왕(Κῦρος, 전559-전530)의 예를 들면서, 인간들 지배하는 기술이 있다는 것이고, 이 기술의 인식은 혁명들의 시기에 완성되어야만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를 괴롭히는 권력의 위기를 더 이상 계속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다. 크세노폰은 회상록에서, 니코클레스의 대화편에서 이소크라테스(Ἰσοκράτης, 전436–338)가 말한 것처럼, 명령하기 위하여 왕이 갖추어야 할 품성들과 덕목들을 강조하고 있다. “운동선수가 자기 신체를 훈련하는 것만큼이나, 왕이 자기 영혼을 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이 처럼 우두머리의 교육으로부터,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의 향상을 기대한다. “각 개별자들을 교육한다는 것은, 그것은 그들 각자들에게만 소용이 있다. 그런데 힘 있는 자들을 덕목에 참여하게 하는 것, 그것은 그 잠재력을 소유하는 자들과 동시에 그들의 신하들에게도 유용한 것이다.” 결국 플라톤에서 철인왕의 개념형성은 이 동일한 경향에 대한 대꾸이다. (240)
어떠한 곳에서도 이 특징이 퀴니코스학자들에게서보다 더 잘 표현되지 못했다. 이 학자들은 무엇보다 인간의 인도자들로서 스스로를 소개했다. 기원전 3세기 퀴니코스학자인 메니포스(Ménippe, Μένιππος, 전300경-전260?)는 디오게네스 판매라는 그의 작품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예 시장의 판매에서, 디오게네스는 자기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 구입자에게 대답했다. “인간들에게 명령한다.”를 안다. (240)
어느 곳에서도 이 퀴니코스학자들 자체의 내부 개혁에만 그치는 그런 퀴니코스문제는 없다. 만일 그들이 스스로를 개혁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그리고 모델로서 제공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그들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고 감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 왕들 자체에게 그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들을 비난하기 위해서이다. (240)
“덕목은 배울 수 있다”, 그러한 것은 안티스테네스(Antisthène, Ἀντισθένης, 기원전 444-365)(79살) 학설사의 첫 이야기 거리이다. 그러나 이 교육은 순수하게 지적인 것은 아니다. 안티스테네스는 메가라학자들과 더불어, 변증법에 의해서 그리고 과학들에 의해서 정신의 형성 작업을 한다는데 대한 결정적인 반대자이다. 또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 대해 경멸적인 부가어들을 남발하지 않고서 말한 적이 없다. 그보다 거의 스물다섯 이나 어렸던 플라톤이 말하기를 ‘느려터진 정신의 늙은이’,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보 이며 허접한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이 둘과 달리 그는 메가라 학자들의 논증들과 유사한 논증들을 사용했다. 플라톤은 토론하기를 원했고, 오류를 반박하기를 원했고, 정의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토론도, 오류도, 정의도 불가능하다. 그러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왜냐하면 한 사물에 대해 사물 그 자체만을 진술하거나 사유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토론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무엇이 있다는 것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고, 오류는 있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의(定意)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한편 구성된 본질의 문제가 중요한데, 그 때 사람들은 그것을 구성하는 원시적 요소들을 열거할 수 있으나, 그러나 정의할 수 없는 항목들에서 멈추어야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본질은 단순하며, 그리고 사람들은 무엇에 그 본질이 닮고 있는지 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241)
안티스테네스가 수학자들과 천문학자들에게 경멸을 적지 않게 하듯이, 크세노파네스도 회상록에서 소크라테스를 통해 표현하는 경멸도 마찬가지다. (241)
이런 결과로 퀴니코스학자들 중의 첫 학자(안티스테네스)가 모든 지적 교육을 거부했던 것인가? 그리고, “만일 사람들이 현자이라면, 타인에 의해 타락되지 않기 위해 읽기를 배우지 않아야 했을 것이다”라는 이런 독설을 소중한 것으로 생각해야 했던가?실제로는 그(안티스테네스)가 퀴노사르게스(Κυνόσαργες)에서 가르쳤던 교육은 소피스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소크라테스(Ἰσοκράτης, 전436–338)는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서 그를 자주 공격했다. 예를 들어 엘렌 찬미(전390과 전380 사이)와 소피스트들에 반대하여(전390경)의 초반부에 상당히 정확하게 이런 교육을 묘사했다. 즉 제자들은 그[안티스테네스]에게 4민(mines 화폐단위) 또는 5민을 지불했다. 쓸데없는 토론으로 가득 찬 논쟁술(반박술)을 가르치면서, 그[안티스테네스]는 제자들에게 행복의 길을 알게 해준다고 약속했다. 이소크라테스의 작품인 파네귀리코스(Πανηγυρικός, 전380) 마지막 부분에서, 이소크라테스는 광범위한 약속들과 쩨쩨한 토론들 사이를 대조한다고 그를 비난했다. 사실상 이소크라테스는 그에게서 한 경쟁자를 보았으며, 그리고 자신의 책들의 여러 제목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제시한다. 게다가 고르기아스의 제자인 안티스테네스가 법률적인 수사학을, 즉 변론들의 작성 기술을 가르쳤다는 것이고, 또 그가 이소크라테스와 논쟁들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쟁들에 대해 이제 막 지적한 그 수사학자[이소크라테스]의 구절들이 또한 증언한다. (242)
이 학파에서 큰 지위를 유지했음이 틀림없는 주제들 중의 하나는 호메로스(Ὅμηρος)의 알레고리 같은 설명이었다. 이런 설명으로는 안티스테네스 작품들로 분류된 열 권 중에서 두 권의 작품들 전체에 가득하다. 특히 오뒤세우스(Ὀδυσσεύς)의 모험은 여러 책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안다. 이후 알레고리의 문학에서 오뒤세우스의 방황들은 감각적 세계의 공격들에 대한 현자의 영혼의 승리를 표현한다. 아마도 안티스테네스에서 이런 해석의 기원을 찾아야만 한다. 어째거나 그가 처음은 아니라도, 적어도 이런 사상 수립의 수단을 호메로스에서 보았던 초기 인물들 중의 하나이다. 이미 아낙사고라스(Ἀναξαγόρας, 전500경-428)는 호메로스의 시들이 덕목과 정의에 관계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크세노폰도 향연(3, 6)에서, 어떻게 안티스테네스가 알레고리스트들 중의 하나에 속하면서, 알레고리스트들이 호메로스를 암송하는 단순한 음류시인(rapsodes)과 대립되는지를, 그리고 도덕적 교육을 위해서 전통적으로 외워서 알았던 시들을 이용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플라톤이 폴리테이아(378d)편에서 이 위험한 교육을 발견하고 항의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젊은이가 그 시 속에서 알레고리인 것과 알레고리가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온편에서도 호메로스의 주석가들 중에서 자의적이고 신중하지 못한 자를 잘 보여주었다. (242)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알레고리들이 우리가 보기에 매우 유치한 것으로 보이지만, 퀴니코스 학설의 가장 중요한 특성에 응답한다. “탁월함은 현실행위[작동]들 속에 있다”는 것이 안티스테네스의 원리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담론도, 학문도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한 작동[현실행위]이란 소위 말하자면 말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사람들은 행위하는(ascèse 고행, [ἄσκησις 훈련])데 이른다. 말하자면 지적 교육은 거기에 여지가 없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퀴니코스학자에게서 가장 높은 탁월함은 지적 질서의 덕목, 즉 신중함(la prudence, φρόνησις)이다. “이 덕목은 성채들 중에서 가장 확신하는 것이다. 난공불락의 추론들로 이 성채를 세워야 한다”. 그럼에도 추론 또는 이법과 같은 단어들을 그는 매우 자주 사용하는데, 그 단어들은, 플라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처럼 방법적이고 증명된 일련의 사유들의 어떠한 것도 지칭하는 것 같지 않다. 우리는 퀴니코스학자들로부터 경구들만을 얻는다. 이 경구들은 그들이 가르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암시하고, 그들이 증명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성찰하게 한다. “현자는 사랑하리라. 왜냐하면 현자만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크세노폰이 자신의 향연(4, 34-45)에서 그럴듯하게도, 안티스테네스 방식의 생각을 자신의 입으로 말한 진실한 부(la vrai richesse, 富)에 관한 담론 속에 넣었다면, 우리는 거기서 안티스테네스의 두 가지 그림을 보게 된다. 한편으로 그 부가 끌어내는 모든 잘못을 지닌 명시적인 부, 즉 돈(재산)의 부를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장점을 지닌 실재적인 부, 현명함의 부유함을 말한다. (243)
따라서 지적 교육은 추론으로 이루어진 구축, 즉 행동을 준비하는 성찰과 진실한 것의 순수한 관조와 더불어 매우 강하게 대비되는 성찰이라기보다, 오히려 경구의 무매개적이고 묵중한 행동, 즉 한 주제에 관한 성찰이다. 그러나 이 성찰들에서 가장 중요한 성찰은 우리에게 지혜의 영웅으로서 제공되었던 표본[모범]들에 대한 성찰이다. 그런 성찰에는 교육의 대중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이 있다. 이 교육은 헤라클레스(Héraclès, Ἡρακλῆς, « Gloire d'Héra ») 또는 테세우스(Thésée, Θησεύς)의 공적들에 감명 받은 정신들[젊은이들]에게 충격을 주어 사로잡는데 알맞다. 왜냐하면 이 방법이 일반적 사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소크라테스의 「데모니코스와 담론」에 나오는 젊은이에게 충고를 주는 평범한 편지에서, 이 저자[안티스테네스]는 스스로를 철학의 스승이라 자처 하고, 항상 이 방법을 사용했다. 간단하게 덕목의 장점들을 나열한 후에, 예를 들어 그가 말하기를 “헤라클레스의 작업들과 테세우스의 공적들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은 쉽다”고, 또는 “너의 아버지의 현실행위들을 회상하면서, 너는 내가 말했던 것의 좋은 표본을 가질 것이다”라고 한다. 사람들은 호메로스의 알레고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해하고, 그리고 우리에게 그 제목들이 알려주는 안티스테네스의 작품들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 제목들로는 헬렌과 페넬로페, 퀴클롭스와 오뒤세우스, 키르케(Κίρκη), 오뒤세우스와 페넬로페와 개 등인데, 이 작품들에서 그는 여러 시도들에서 영웅적인 승리를 제시했다. (243).
그러나 탁월한 퀴니코스학파의 영웅은 헤라클레스이다. 그에 관해서 그는 세권의 책을 썼다. 그 퀴니코스학자의 삶은 제우스에게 사랑받는 아들 헤라클레스의 진실한 모방이다. 제우스는 그의 덕목들 때문에 그를 불멸의 신으로 만들었다. 이 삶은 좀 더 나중에 디오게네스(Διογένης, 전413-327; 87살)가 모방하게 될 것이다. 안티스테네스는 항상 어떤 역할을 하고자 원했으며, 스스로를 모델로서 제시하거나, 또한 모델들을 알고자 원했다. 하나의 극장으로 간주된 세계에 대한 유명한 비유가 있다. 여기에서 각 인간은 신적 드라마의 배우이다. 대중적인 도덕 문학에서 그러한 지위를 차지할 이 비유는 아마도 안티스테네스의 아르켈라오스(Ἀρχέλαος)에서 나왔을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지칠 줄 모르는 의지의 전형이자 완전한 자유의 전형이다. (244)
율리아누스(Julianus, 331/332 -363) 황제는, 그의 “담론 VII”에서, 퀴니코스주의는 철학적 학설인지 또는 삶의 양식인지를 자문하였다. 이런 이유로 퀴니코스 학자는 안티스테네스에서부터, 인민의 일상적인 사람들의 의복과 옷차림을 하였다. 즉 홑두루마기(겨울에는 그 위에 덮게 입었다)를 걸치고, 수염을 기르고 긴 머리를 하고서, 손에는 막대기를 들고, 바랑을 등에 맸다. 그러나 그 학자는 마케도니아 영향 아래 유행이 변했을 때도 이 의복과 옷차림을 유지했는데, 크리스트교 수도사들이 그 설립 시대에 일상적 옷을 입었던 것과 거의 같은 방식이다. 그때부터 어느 누구도 자신을 구별하려는 복장으로 다니는 이 별난 통행인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 만큼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인내를 보여주기 위하여, 그 학자는 비가 내리는 데도 벗고 있었고, 겨울에 눈에 맨발로 다녔으며, 여름에 태양 볕 아래 그대로 서 있었다. 이 현자는 부자들도 왕들도 가리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며, 이런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마도 후안무치 또는 무례라 불렀다. 그 현자는 사회적 집단과 더불어 연계할 어떠한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상습적인 거지들보다 더 잘못 취급 받았는데, (디오게네스가 한 비극을 인용하여 그 자신에 대해 말 하듯이) “국가도 없고, 집도 없고, 조국도 없고, 일상적인 빵을 얻기 위한 떠돌이 거지”인, 이 현자는 공공장소에서 살았고, 사원들 안에서 은거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초대 받았다. 이렇게 해서만이 그는 자신의 임무를, 즉 인간들의 악행들과 오류들을 관찰하도록 책임진 제우스의 메시지 전달자로서 임무를, 완수할 있었다. 이러한 임무를 암시하게 하는 안티스테네스의 관찰자에 관하여라는 책의 제목이 있다. 이 임무를 주장했던 디오게네스는 필리포스(Philippe, Φίλιππος, s.d.)에게 자신이 자기의 채울 수 없는 욕망들의 관찰자라고 말했다. 결국 퀴니코스 학자이며, 필라델포스(Φιλάδελφος, 전309/308-247/6)[프톨레마이오스 2세, 재위 전285-247]의 동시대인인 메네데모스(Μενέδημος, 전345/4–전261/0)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를 보게 해주었다. 즉 에리뉘에(Ἐρινύε, 박해받는 자)의 옷차림으로 지내며, 사람들의 죄들을 다이몬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스스로를 하데스(ᾍδης)로부터 온 관찰자로서 모습을 보여주었다. (244)
시노페 출신인 유명한 디오게네스(Διογένης, 413-327; 87살)에 관하여, 전설은 퀴니코스학파의 삶에 대한 모든 특징들을 모았다. 특히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와 디온(Δίων, 30-116)에 의해 수집된, 수많은 인용 문장들(gr. χρεία), 좋은 말들, 수집된 경구들로부터 사람들은 디오게네스의 진정한 인품을 분간해 낼 수 있을까? 사람들은, 모든 문헌자료들의 그 자체로는 일치하지 않으며 복잡하게 섞여서, 근거에 따라서, 두 가지 디오게네스의 초상화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주목했다. 한편 이런 디오게네스, 즉 방탕하고, 제약 없이 무례하고, 난봉꾼이며, 플라톤의 금욕주의를 조롱하는 디오게네스가 있다. 그는 [퀴레네 학파] 아리스티포스의 좋은 말들을 그게 부여하기에 알맞을 정도로 가장 느슨한 쾌락주의자들과 닮았다. 그는 매우 비종교적이어서 사람들은 그에게 무신론자인 테오토로스(Θεόδωρος, 전340경-250경)의 조롱거리들을 덧씌워 놓았다. 다른 한편, 다른 디오게네스가 있는데, 보다 검소하고, 긴장된 의지를 지니고, 금욕하는 늙은이로서 그에게 휴식을 충고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리고, 만일 내가 긴 경기장을 달리는 선수였다면, 나는 나의 경주의 마지막에서 쉬게 할 것인가? 반대로 나는 나의 노력을 증가시키지 않을 것인가?” 합창을 지휘하는 자처럼 학생들이 취 해야할 (목소리의)톤을 강조하는 스승이며, 노동(le travail)과 노력(l'effort), 즉 포노스(πόνος)의 영웅이다. 이 두 초상화들 중에서, 둘째가 진실한 디오게네스일 것 같다. 가장 오래된 퀴니코스 학자들 중에서 스승인 안티스테네스는 “자신은 쾌락을 좋아하기보다, 미치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선언했는데, 이점에서 아리스티포스와는 비교될 수 없다. 반대로 우리는 다음 장에서 보게 될 것인데, 기원전 3세기 퀴니코스 학자들에게서는 쾌락주의로 일종의 미끄러져 들어감이 일어난다. 이 순간에 쾌락적인 퀴니코스주의가 생겨난다. 이런 종류의 무례한 뻔뻔스러움이 단어의 현실적이고 습관적인 사용에서, 즉 간단히 말해서 퀴니코스주의[냉소주의]이다. 아마도 이러한 새로운 정신에 디오게네스의 삶에서 많은 새로운 일화들이 도입되었음이 틀림없다. (245)
따라서 디오게네스의 퀴니코스주의는 학설보다 더 실천적이었던 것 같다. 그가 학문들에서 멀어진 만큼이나, 그 만큼 그가 자기의 철학을 노예적이고 교과서적인 기술들에 접근시키는 척 했을 것이다. 덕목은 타고난 천성의 재능도 학문들에 의한 획득도 아니고, 오히려 훈련(ἄσκησις)이라는 그 증명, 그것은 “사람들은 노예적인 기술들과 또 다른 기술들에서도 기술자들을 보는데, 그 기술자들은 훈련에 의해서, 일상적이지 않은 제작-지식을 획득한다”. 그러한 예로서 운동선수들과 풀륫 연주자들이 있다. “삶에서 훈련 없이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한다. 훈련과 더불어,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 게다가 내적 명상만큼이나 우리에게 정력을 불어넣는 신체적 훈련도 그 만큼 중요하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완전하게 한다. 노력을 통한 일종의 완전한 신뢰, 경험에 근거한 신뢰는 디오게네스의 퀴니코스주의의 중심을 형성한다. 그럼에도 어떤 노력이 아니라 추론된 노력을 이해하는 조건에서이다. 그것은 노력 그 자체가 선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용하지 않는 수고”들도 많다. 그리고 철학 작업은 “행복하기 위하여 자연에 부합하는 노력들을 선택하는 데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의미 부족 때문이다". 여기에서부터 중요한 역할이 나오는데, 그 역할은 이성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퀴니코스학설에는 많은 주지주의가 남아있다. 왜냐하면 지성만이 해야 할 노동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246)
이런 특성이 없이, 사람들은 왜 퀴니코스학자들이 편견들과 거짓 견해들을 그렇게까지 추적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모든 견해는 연기(煙氣)이다"라고 희극시인 메난드로스(Μένανδρος, 전342-292)는 퀴니코스학자인 모니모스(Μόνιμος; 전4세기경)에게 말하게 했다. 도처에서 협약을 고발하는 것, 협약을 자연에 대립시키는 것, 그러한 것은 디오게네스의 교육의 결실들 중의 하나이다. 디오클레스(Διοκλῆς, 전375경–295경)에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승에 따르면, 디오게네스는 시노페의 한 은행가의 아들이었다. 그 아버지는 위조화폐를 제작하기였기 때문에 그 나라로부터 추방되었다. 디오게네스는, 마치 아버지의 죄가 그의 고유한 임무를 예시했던 것이나 한 것처럼 그것에 공모했던 것을 자랑하였다. 그리고 그 단어들을 가지고 유희하면서, 그는 화폐(νόμισμα)를 위조하는 작동들에서 모든 협약적인 가치들(νόμος)의 경멸을 보았다고 한다. 게다가 사회적 편견들을 폐지하면서, 사회를 개혁한다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퀴니코스학자들이 플라톤처럼 여성들의 공동체를 인정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플라톤처럼 사회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유대를 완화하기 위한 것이고, 현자에게 느슨하고 더 많이 자유롭기 위해서이다. 이 학자들의 목표는 사회를 개혁하자는 것이 거의 아니고, 이들은 오만에 의해 세워진 부자 도시들의 모든 이점들을 떳떳하게 이용하자는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제우스의 회랑이 그가 거기에 거주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조롱조로 말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편견들로부터 해방으로 내적이고 개인적인 개혁을 하는 것이다. (246)
퀴니코스학자들이 꿈꿨던 도시국가는 실재적인 도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오히려 도시가 실재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크라테스(Κράτης, 전365-285년)는 디오게네스의 제자이며, 스토아학파 제논(Ζήνων, 전335-264)의 스승이인데, 그는 우리에게 남겨진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브자스(La Besace, 우화에서 긴꼬리 원숭이)가 세웠던 것은, 즉 퀴니코스 학자의 도시가 세웠던 것은 오만함의 붉은 연기 가운데서 이다. 이 도시에는 어떠한 기생충도 접근하지 못한다. 그 도시는 백리향(du thym), 무화과, 빵만을 생산한다. 이러한 것들 소유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서로서로 대항하는 무기들은 가지지 않는다.” (247)
플라톤의 정신과 심지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과 대각선으로 대립되는 정신에서 퀴니코스 학자는 도덕적 삶을 사회적 문제와 분리했으며, 동시에 그 학자는 현자의 지적 성찰밖에 있는 정확한 과학들을 거부했다. 그렇다고 그 학자는 과학적 정신에서 훨씬 벗어난 인간이 아니었듯이, 시민적 정신에서도 훨씬 벗어난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247)
퀴니코스 학자는 플라톤 같은 또는 이소크라테스 같은 그리스인들이라는, 또한 페르시아 침공을 물리친 아테네인들의 후손들이라는 그런 자부심에 공유하지 못했다. 안티스테네스는 페르샤인들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승리는 행운의 사건일 뿐이었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퀴니코스 학자가 세계 시민을 선언했다면, 만일 “그의 정치학이 도시국가 덕목들 보다 더 많이 덕목의 법률들을 따랐다면”, 그는 그리스 도시국가와 양립할 수 없는 정치적 형식들을, 페르샤 제국 또는 알렉산드리아 제국과 같은 형식들을 편애한 것이다. 안티스테네스의 세 저술은 퀴로스(Cyrus, Κῦρος)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아마도 왕의 전형으로서 퀴로스에 위대함에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점을 크세노폰의 퀴로스의 교육에서도 본다. 그리고 이런 전승은 퀴니코스 학자들에게 계속되었는데, 왜냐하면 디오게네스의 제자인 오네시크리토스(Ὀνησίκριτος; 전360경–290경)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듯이, 퀴로스의 교육을 베낀 알렉산드로스의 교육을 썼다. (247) (48UKE) (57VLH)
제4절 아리스티포스 그리고 퀴레네 학자들 Aristippe et les Cyrénaiques 247
퀴레네 학파의 아리스티포스(Ἀρίστιππος, 전435경-356)와 그 제자들에게서 심지어 정확한 수학과학들에 대해 비난(décri 평가절하)하고, 그보다 더하여 사회적 조직화를 위하여 무차별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이 관점에서 메가라학자들과 퀴니코스학자들과 동일한 선상에 (플라톤으로부터 분화되어) 있었다. 수학과학들에 전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 수학은 가장 낮은 기술들보다 열등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수학은 선에도 악에도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철학자가 자제했던 사회적 역할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 역할은 어떤 의미에서 퀴니코스학파의 역할에 대각선적으로 대립된다. 비록 그 역할이 실천적으로 동일한 무차별[무반응]성에 귀착한다 하다라도 말이다. 이런 이유로 (만일 적어도 크세노폰이 자기 입으로 했던 말씀들이 자기 사상을 너무 과도하게 일그러뜨리지 않았다면), 아리스티포스는 퀴니코스학파의 대척점에 있게 되는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명령하고자 원하는 자들의 서열에 스스로 끼어들지 않는다.” 오직 어떤 정신 나간 자가 법관들이 감당해야 할 모든 수고들과 모든 비용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 법관들의 도시들은 마치 그의 노예들의 개별 노예처럼 쓰이게 될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그[아리스티포스]는 단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이끌 것만을 생각할 것이다. (248)
아리스티포스는 플라톤과 동시대인이며, 소프라테스의 교육을 받을 욕망으로 아테네에 매료되었으며, 그러고 나서 시라쿠스의 참주 드니1세(전431-전367)의 손님이었던 플라톤처럼, 그 참주의 책략에 관해 널리 퍼진 적대적인 전설에 따르면, 참주는 그에게 최악의 모욕을 감당하게 했는데, 그의 사치스런 욕망과 우아한 삶의 욕망이 그에게 모욕에 항의함이 없이 받아들이게 했다. 그의 학설을 발견하는 것은 실로 어렵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게서 우리가 갖는 자료들로서, 많은 작품들이 고대로부터 이의 제기되고 있었던 작품들의 목록이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퀴레네 학자들에 속하는 학설사들이, 특히 몇몇 관점들을 강조한 것으로 보이는 학설사들이 있다. 그 관점들에 의하면 퀴레네학파의 쾌락주의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와 구별된다. 마지막으로 회의주의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160경-210)에게서도 퀴레네 학자들의 인식이론의 진술이 있는데, 엠피리쿠스는 진술에서 스토아주의에 고유한 어휘적 용어들을 많이 사용했다. (248)
사람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몇몇 원문들을 통해서 이 깊이를 풍부하게 만들고자 원했다. 이 원문들 속에서 사람들은 아리스티포스에 대한 암시를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원문들은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필레보스편, 니코마코스 윤리학, 폴리테이아의 원문들 속에서, 쾌락주의가 진술되고 비판되어 있으며,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스의 이름으로 진술한 테아이테토스편 본문은 아리스티포스의 인식에 대한 학설을 제시했을 것이다. 쾌락주의에 관한 이 원문들 중의 첫째 것들은 아주 모호한 의문을 제시한다. 이것들은 쾌락주의자들에 대해 말하는데, 이것들이 아리스티포스에 대해 말하는가? 이 첫째 원문들 중의 하나는 확실하게 그렇지 않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제10권 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말하는 쾌락주의자를 지명하는데, 그 사람은 에우독소스(Εὔδοξος ὁ Κνίδιος, 전408경-355)이다. 그는 플라톤 학당에 자주 드나들었던 유명한 천문학자이다. 소위 말해서 에우독소스는 쾌락주의자였던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바로는, 그의 간결하고 신중함 때문에, 이 인물이 알려진 것은 쾌락의 취향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모든 존재가 즐거움을 구하고 고통을 멀리한다고, 그리고 쾌락은 그 존재 자신을 위해 욕망된다고, 결국에는 이미 선한 것에 보태어진 그 쾌락은 선한 것의 가치를 증가하게 한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거기서 온선의 특성들과 최고선의 특성들이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인정된 특성들이 있다. 흥미 있는 것은 쾌락이 최고선이라는 주제를 선호한 에우독소스의 논증을 인용한 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레보스편의 논증과정들을 연구하고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 논증과정은 에우소독스의 논증과정을 하나씩 하나씩 가까이 대조하여 응답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것에 따르면, 필레보스편 속에서 플라톤이 목표로 삼았던 쾌락주의자는 아리스티포스가 아니라 에우소독스일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다.(249)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이 친구들의 입으로 쾌락을 다룬 주제들 중의 한 주제, 즉 쾌락은 움직이고 있는 중에 있는 것이라는 주제는, 이 주제는 에우소독스에는 없는 주제인데,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가 그의 견해들로 만든 나열 속에서 아리스티포스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중대한 이유를 가지고 최근에 평가를 행하기를, 사람들은 플라톤이 쾌락의 찬성자들에게, 쾌락을 움직이는 중에 있다는 이 주제를 부과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그는 그런 말을 전혀 하지 않았고, 또 그가 이 주제를 이용한 것은, 만일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쾌락은 선한 것들의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이 주제를 다시 다루었는데, 이 주제를 오직 쾌락주의자들에 대하여 반대의사로서 이지 그들의 주장들 중의 하나로서 다룬 것이 아니다. 사실상, 쾌락의 찬성자들과 반대자들의 논쟁은, 그 논쟁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제1장에서 소개되어 있는 대로, 플라톤이 필레보스편에서 서술할 기회가 있었던 이와 같은 동일한 논쟁은 아카데미아 내부에서 스페우시포스(전407-전339)와 에우독소스(전408/395경–355/341) 사이에 있었던, 학당 내의 논쟁인 것 같다. 전자는 쾌락이 항상 악이라고 주장했고, 후자는 쾌락이 항상 선이라고 생각했다. 이 두 주제의 각각에는 약간 인위적인 성격이 있는데 (스페우시포스는 자기 주제가 진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사람들을 쾌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주장하는 것인데), 아카데미아학자들 사이에 아마도 문제의 토론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49)
따라서 이 원문들은, 쾌락주의가 세속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폴리테이아편(505b)의 원문이 아리스티포스를 겨냥한 것이 아닌 것 같듯이, 우리가 그에 대한 인식으로 넓일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반대로 이 원문들은 쾌락의 가치에 대한 문제가 기원전4세기에 어느 곳에서나 생생하게 토론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249)
게다가 에우독소스의 논증과정은(모든 사람이 쾌락을 구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며, 목적에서처럼 쾌락에서 멈춘다) 매우 일상적인 논증과정이었으며, 또한 아리스티포스도 이 논증과정을 사용했던 것은 쾌락이 선들의 목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목적을 규정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어떤 명증함을 확정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것과는 다른 것일 수 없다. (250)
퀴레네 학설에서 매우 독창적인 것은, 거기에 어떠한 합리적 관점들을 가정하지 않으면서 이 명증함에 만족하기 위한 노력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학파의 학설사의 많은 좋은 견해들은, 이 견해들의 직접적인 인상들 또는 평가들에 자부심을 가지기보다 오히려 삶에서 이 견해들의 이상을 합리적으로 구축하는데 익숙해진 사람들의 반대의사에 응당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확실하다. 즉 쾌락의 덧없고 유동적인 특성이 현자가 꿈꾸는 안정되고 손상 없는 행복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훨씬 더 나중에 쾌락을 목적으로 삼고자하는 에피쿠로스를 볼 것이다. 그는 현자의 안정성을 거부하기보다 쾌락의 용어를을 변형시키고 변조하기를 더 좋아한다. 그는 조용하고 안정된 쾌락을 추구할 것이고, 그 쾌락은 고통의 부재이면서, 퀴레네 학자들의 움직이고 있는 중인 매우 매끄러운 쾌락은 아니다. 그런 것에 아리스티포스가 (또는 그의 계승자들이) 대답했는데, 소위 말하는 쾌락은 잠의 상태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며, 게다가 현자는 안정되고 연속적인 행복으로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다고 하고, 또 그것[행복]의 목적은 찰나의 쾌락이었다고 하고, 행복은 모든 쾌락의 통합으로 이루어진 결과이었을 뿐이며, 전혀 목적이 아니었다라고 한다. 또한 동일한 종류의 반대의사가 있는데, 이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들에 의해 이루어긴 쾌락들은 그자체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쾌락의 평가에서 지적인 표상을 개입하게 하는 것이며, 지적인 표상이란 거기에서 해야 할 마땅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또한 이런 경우에서 쾌락은 아리스티포스에게는 선한 것이다. (250)
우리는, 어떻게 에피쿠로스가 쾌락을 목적으로 보존하면서도 인간을 자기 행복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를 조금 더 나중에 보게 될 것이다. 현존했던 쾌락만이 신체의 쾌락인 것으로 충분하며, 정신의 쾌락은 단지 그러한 쾌락들의 추억과 예견일 뿐이다. 인간이 자기 추억과 자기 사유를 지배할 주인인 것처럼, 인간은 쾌락을 축적할 수 있다. 거기에 퀴레네 학자에게서는 가치없는 하나의 구축이 있다. 우선 정신은 자기의 쾌락과 자기의 수고를 따로 가지고 있으며, 이 둘은 신체의 쾌락들과 함께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게 아무 것도 없다. 예를 들어 조국을 구출하는 즐거움이 그러하다. 그러고 나서 시간은 재빨리 신체적 쾌락의 추억을 지운다. 결국에는 신체의 쾌락은 사실상 정신의 쾌락을 항상 넘어서는데, 마치 신체적 고통들이 도덕적 고통들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것과 같다. (251)
이런 조건들에서 퀴레네 학설은, 퀴니코스주의가 그의 현자에게 제안했던, 수고를 제외한, 아주 덕성이 있으면서도 무감동한, 삶에 도달할 것을 전혀 제안할 수 없었다. 사실상 현자는 수고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악한 자도 가끔 쾌락들을 느낀다. 현자도 더 이상 정념에 제외되지 못하듯이, 확실하게 현자는 지적인 구축물 위에, 즉 “허황된 견해” 위에, 근거하는 정념들 중의 어떠한 정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숙명적으로 무매개적이고 확실한 인상이라는 모든 것을 느낀다. 따라서 현자는 수고하는 주체이고, 또한 수고로부터 정당화되는 이해라는 걱정거리를 지닌 주체이다. (251)
사람들은 더 멀리 나아가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쉬운 운동” 또는 “무딘 운동”처럼 무매개적으로 느껴지는 쾌락과 고통 바깥에서 선과 악의 기준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분쇄했기 때문이다. 만일 거기에 아직도 약간의 이유가 남아있다면, “비록 모든 쾌락들이 그자체로 욕망 가능할 수 있다 하더라도, 몇몇 쾌락들의 대행자들은 자주 고통스럽다는 점이다. 또한 행복을 형성하는 쾌락들의 재통합은 아주 다르다. 이리하여 좋거나 말거나 간에, 그 퀴레네 학자는 쾌락들의 조합의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찰나로부터 그 학설은 핵심에 타격을 입을 위험에 처한다. 우리는 이것을 다음 장에서, 즉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티포스의 계승자들에게서 보게 될 것이다. (251)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아리스티포스의 도덕 학설과 그의 인식론 사이에 완전한 소통이 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품행처럼 인식도 무매개적인 인상에서만 확실함과 지지점을 얻을 뿐이다. 인식은 확신에 머물기 위하여 이 인상에 만족해야 한다. “우리가 희거나 또는 부드러운 인상을 증거 하는 것, 그것은 진리와 확실함 덕분에 거짓말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상의 원인이 희거나 또는 부드럽다는 것, 그것은 사람들이 주장할 수 없는 무엇이다.” 인상은 어떠한 결론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은 우리에게 인상 이외에는 어떠한 실재성에도 도달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인식은 심지어 인간들 사이의 일치도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은 엄격히 말하자면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그리고 내가 나의 인상으로부터 이웃의 인상으로 결론을 낼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어만이 공통적이다. 그러나 동일한 단어가 다른 인상들을 지시한다. (252)
메가라주의, 퀴니코스주의, 퀴레네주의는 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반대편을 형성한다. 이들은 지적 문화에 대한, 심지어는 모든 문명에 대한 인간적 관심을 보이기를 거부한다. 이들은 인간에게서 지지점을 그 자체로, 그 안에서만 탐구한다. (252) (48UKG)
(옮17:25, 57VKE) (15:18, 57V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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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문헌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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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48UKG) (16:02, 57V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