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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마51010주사위26행운
유유상종(類類相從)과 알고리듬
- 알고리듬의 접속(연결)의 방식은 상사구조를 닮은 것 같다. .
- 생명종에서는 상사구조(고래 지느러미 새 날개)와 상동구조(패류 눈, 동물 눈)가 있다.
- 놀이판은 다양체(주사위) 놀이와 상사구조이다. 어느 집단의 공론장과 다르다.
- 자연이 스스로 노니는 곳에 신(들)이 들어오지 말라, 물 흐린다고 한다.
- 오일러는 상수(e)와 닮은 상수를 제기하고 디드로에게 신을 모른다고 핀잔을 주었다.
- 보어는 신의 완전성을 믿었던 아인슈타인에게, “신 좀 그만 괴롭혀라”라고 하였다.
- 우아(右我)가 비례중항의 반역(叛逆)이라면, 좌아(左芽)는 조화중항의 정역(正易)이다.
- 아멘(ἀμήν, “certainly, verily(참으로)”)이 아니라, 나도 “여시아문”이라 하고 싶다.
- 공화정은 의미를 생산한다. 입말 덕분으로 새로운 공화국의 건설의 길이 열렸다.
- 공화정에서는 ‘뿌리깊은 나무’, ‘새미깊은 물’과 더불어 화이부동(和而不同)이 있다.
# 아래 글은 공안(公案, 이다, 아니다), 선문답(禪問答, 있다, 없다) 화두(話頭: “뭣”은 누가 정하는가) 그리고 보살행(의미의 생산)이라는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1969) 도식에 응용해보려는 시도 중의 하나이다.
# 말놀이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고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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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이다와 아니다라는 지시체계(désignation)이다. 어린이 교육에서 필수적이며, 산술학적으로 구구단과 소수(素數)의 관심이다. 이에 몰입할 경우에 오티쯤(앵글로색슨에서 말하는 대인공포증이 아니라, 하나에 몰입되어 다른 것을 관심이 없는 경우이다) 철학에서 존재론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경우이고, 하나의 공리를 먼저 두고서 체계를 정립하려는 것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오일러, 다윈, 뉴턴도 이런 사유에 포획되어 있었다. 프랑스어를 배우는 이뭣꼬 다음에 이것은 책이다(c’est un livre)의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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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있다와 없다, 그리고 있을 수 있다와 없을 수 있다는 것 등에 연관된 말투에서 제기된다. 자기와 상대 사이에서 견해의 표명에서 나온다. 있다와 없다는 단정으로서 말하는 이의 의도와 의향이 포함되어 있다. 프랑스어에서 있다(il y a)에 속한다. 의도가 의지(욕망)를 포함하여 있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있을 수 있다와 없을 수 있다는 많은 철학자들이 양태론으로 다루면서 가능성과 연결시켰다. 현실에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지금은 없지만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포함한다.
그런데 의식의 역량에서 있을 수 있다는 미래의 가능성과, 의식의 내부에 들어 있는 과거의 가능성 사이에 차이가 있다. 미래의 가능성은 허구와 착각일 수 있으며, 과거의 가능성은 드러나지 않은 역량이라 한다. 이로써 가능성의 두 방향이 현존에서 쓰인다. 이는 존재론의 현재 상황과 다른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자의 표명 또는 표시는 현 상황의 변화 또는 사실(만들어진 것)의 이행을 포함한다. 그래서 의식에서 있다는 사실들의 여러 방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있다는 이다와 다른 상황 또는 다른 조건 속에서라는 점에서, 있다는 삶의 구성과 구축과 연관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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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하나는 있어야 한다이다. 그래서 다음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기도 하며, 또는 있어야 할 텐데 등과 연관지어 말한다. 이런 있어야 한다를 존재론에서 당위성처럼 설명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 그 대상이 이미 규정되어 있는 경우이다. 규정성에서 어떤 기호(또는 상징) 그리고 개념(대상의 항목)이 규정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그 규정된 대상(기호)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논리학자는 선전제처럼, 수학자는 공리처럼 다룬다. 이런 대상이 있어야 논리도 수학적 계산도 기하학적 분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다루는지를 알 수 없다. 그 무엇이 이들에게서는 이미 정지된 단위로서 주어진 것이라 여긴다. 여기서 기호라고 여기는 쪽에서는 다루어야 될 대상이 이런 기호로 약속하자는 것은 전제하고 있고, 이 전제에 대해, 다루는 이들 사이에 공감(또는 직관)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공감(직관)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다’의 존재들의 존재, 류로들의 최고류를 설정하는 직관과 전혀 다르다고 한다. 이런 공감성의 대상을 공유하는 사유의 방법은 수학에서, 과학에서, 사회학에서, 생물학에서 등등에서 달리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랜 철학사는 그 원리는 하나이고 통일성(또는 완전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파동이론 이나 비유클리드 기하학 등의 정립과 성립에서 하나의 원리가 모든 이론들과 체계들에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철학에서 주로 난제(apori)라고 하거나 안티노미(이율배반)라고 하는 것들에서 등장하고 있었고, 게다가 집합론 이래로 파라독사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그러면 묻기를 하나의 원리가 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 ‘하나’라는 단위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단위 구성, 구축, 조성, 생성 등에서 달리 재현된 것이 아닌가?
이다(아니다)와 있다(없다)를 넘어서, 있을 수 또는 있어야할 것에 중요성이 포함되어 있다. 프랑스어에서 il s’agit de처럼 있을 수가 아니라 있어야할 것에 대해 여러 분과학은 관심을 갖는다. 무한(infini), 무한정(indéfinit), 무한계(illimite) 등이 수학에서 물질적 규정작업과 더불어 달리 다루어지듯, 공동체에서 사건들에서 무규정(indétermination)도 있다.
한 인간을 예로 들자. 현재 살아있는 인간(김어준, 털보)은 아직은 무규정적에 속한다. 그렇다고 무한하다고 하지 않기에 그를 두고 김어준이다 라고 한다. 그렇다고 김어준이 있다고 하는 것은 살아온 과정의 전부에서 있다고 할 것인데 아직도 살아가고 있느니, 정의를 내릴 수 없다는 점에서 아직은 무한정이고, 그리고 김어준 여기 지금 있다고 한다고 해서 그의 관계(그의 친구, 시청자, 등등)에서 무한계라고 할 수 없지만, 무규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어디에 있을 것이고, 유유상종(알고리듬)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 이점에서 이다의 범주(영역)을 넘어서 있다. 흥미롭게도 ‘김어준’은 용어(단어)이며, 대부분 고유명사라 하다. 그런데 그의 규정과 재현 상으로 그는 인간들 중의 하나로서 항목(보통명사) 중의 하나다. 그는 입말을 쓰는 이들 사이에서 하나의 기호이다. 기호 표시방법에 따라 그를 잘 알거나 조금 알거나 또는 가짜로 알고 있다고 한다. 이는 대통령 이재명을 두고 한 쪽은 진짜로, 다른 쪽은 가짜로 알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기호에 대한 표시를 기화작용(signification)이라 한다. 여기에서부터 들뢰즈가 진위 구별이 아니라 의미(sens, 방향)를 생각하자고 한다. 윤구병 형님은 “있음과 없음”에서 당파성이 객관성을 우선하다고 하였다. 가치는 탐욕(이익, 권력)보다 우선한다.
인간은 수학을 하듯이 기호(단어든, 개념이든 이미지든, 상징이든)들을 창안해 내기도 한다. 그래서 한쪽은 인간이 창안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오만에 빠져 수렁으로 들어간다고 하고, 다른 쪽은 새로운 발명으로 인간이 한계와 장벽을 넘어 새로운 놀이판을 만들어간다고 한다. 이는 유유상종에서 각각의 평가(가치)가 다르다. 우호적인 쪽에서 좋다고 하고 비우호적인 쪽은 싫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 젊은이들은 노는 물이 다르다고 한다. 이 말은 진리이다 또는 거짓이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축구장을 찾는 자들의 알고리듬이 있고, 전자 게임판을 찾는 알고리듬이 있다. 또 다른 판들이 있고 또한 다른 판들을 만들 수 있다. 새로운 혁명의 정당을 만들 수도 있다. .
새로운 놀이터 또는 기호발명 들 중에서, 어떤 놀이판이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신이 만든 것이고 여기는 쪽이 있고, - 운명의 실타래처럼 - 이들도 겸손을 주장한다. 이들 중 다른 이들은 자연이 스스로 생산하고(니체) 또 자연이 이런 방식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놀이터에서 - 주사위 놀이판처럼 - 즐겁게 살아보자고 한다. 또는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인간의 노력이라고 하며(돈수돈오), 인간의 자연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지만 그래도 자연을 알아가는 과정이 곧 인간 자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길이라고 여긴다(초기 스토아). 자연을 이해하는 두 부류 중에서 전자의 겸손과 후자의 노력에서, 요상하게도 겸손자들은 거꾸로 (신을 믿지 않는다고) 노력자들에게 오만을 말한다. 그런데 거꾸로 노력자들은 겸손자들의 말투가 신의 지위에 올라선 것과 같은 오만이라고 한다. 둘 사이의 대립은 기호화 방식을 이해 또는 의미부여에서 차이를 지닐 것이다. 기호화(상징화)의 방향은 의미의 두 방향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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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하나는 낯설고 또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어느 집단(사회)에서도 통용되지 않지만, 어떤 결사체(une société)에서는 징표 또는 계열로서 암암리에 소통된다. 소림사의 무예도 그러하고, 바뵈프의 결사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야체이카에서도, 인혁당과 통혁당의 동지들에게서도 있어 왔고, 지금도 어느 집단에서는, 마치 환ㆍ단ㆍ도처럼 신흥종파 같은 곳에서는, 또는 알려지지 않은 모임들에서도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실재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이런 가능적이고 가상적인 ‘있을텐데’의 세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입말의 소통에서도 지시, 표명, 기호와 달리 의미(un sens)가 있다는 것을 들뢰즈가 말한다.
이 가상이 왜 현실에서 의미를 갖는지를 그는 “영화이론”에서 전개했다. 그런데 이재명 대통령이, 대통령임에도 새벽 2시나 3시에 트윗을 내보내는 것은 마치 지구의 자기장과 공중의 전기장을 이용하는 거미(가제거미)의 생태방식처럼 보인다. 살기 위한 방식이기도 하지만 유유상종에서 의미(le sens)의 소통일 것이다. 생명있는 존재가, 인간의 입말, 말투, 말씀과 달리, 자기의 삶의 영역을 확장해가는 노력은 놀랍다. 그 놀라운 방향(le sens)은 사방(팔방, 36방)으로 퍼질 것이다, 그 거미줄에 걸리는 것 처럼 그 쪽과 소통하는 것이 그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인간의 경지도 거미의 방법처럼 SNS로 통해서 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리라. 그와 연결방식(연접, 선접, 역접, 연결)의 방식 중에서 연결(접선)의 방식에서 선택이 그의 삶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방식이 가우스 곡선의 우측 끝에서 만난다는 것은 개인으로서는 무관하겠지만, 그것은 참주제를 만든다. 영화 “오딧에우스”는 동료들을 모두 희생시키고 상대들을 처참하게 제압하는 ‘참주제’ 성립을 말하면서도, 화자는 청동기시대가 끝났다고 말했지만, 파라독사하게도 제국주의를 옹호하며 참주제를 견고히 하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측면을 제공하지만, 가우스 곡선처럼 전체를 만드는 집합론의 여집합과 같은 자연에서 생성과 조성을 통하여 그리고 이런 사건들의 공감성을 통해서, 새로운 공화국을 성립할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 흥미롭다. 어쩌면 조화중항을 찾는 그 속에서 유쾌, 상쾌, 통쾌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2:26, 59UKB) (3:31, 59UKG)
# 찹조1
* 유유 상종 2
대통령 이재명과 기호로서 이재명 사이에 놀이터가 다른 것으로 느끼는 이들이 많다.
현 상황에서 유유상종의 놀이터들(기성 언론의 공론장과 다르다)
공화정으로 가는 길에서 알고리듬의 망을 형성하는 계열들
유시민, 이병철, 최강욱, 김경호, 정필승,
김어준, 장인수, 봉지욱, 장용진, 홍사훈, 조성은,
이종원, 정진호, 황희두, 김대호, 김승현, 언론바로알기
추미애, 조국, 정청래, 김용민, 박은정의 놀이터
* 이재명을 옹호하는 계열들의 놀이터도 유유상종이다. 이익, 권력 추구에서,
“정예능”의 분석에서: 뉴이재명 세력들의 분화
1) 팬덤 스타일 여초 뉴이재명, 개딸 포함 [김민석, 민티 수호파]
2) 이재명의 오랜 지지자 손가혁, 반문 세력 [이동형, 김현지]
3) 친이재명 참칭(국짐당파) 강팀선호 [이언주, 김용남]
이들은 문조털래유를 비판하는 유투버를 보면, 그 알고리듬 옆에 끼여있다. (59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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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상종(類類相從), 즉 알고리즘은 친근성과 친화성에 의한 영역을 만든다. 모든 운동경기와 음악 등은 이런 영역의 망을 따른다. 축구를 좋아하든 마라톤을 좋아하든, 바하를 좋아하든 조용필을 좋아하든, 영역들 사이에 유유상종이 있듯이, 정치판에도 이야기판에 유유상종이 있다. 공론장과 공감장이 다른 것도, 형상형이상학과 질료(자연)형이상학이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언어에서 주장하는 자의 독사(doxa)가 있고, 이에 대립 또는 반대(모순이 아니라)되는 파라독사(paradoxa)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은 19세기 후반의 수학자들이었다. 철학자들은 불합리, 순환논증(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 허수아비 논증이라고 하였지만, 수학자들은 수들의 종류를 넓혀가면서 다양한 수들이 있음을 증거하였고(실수와 허수), 게다가 같은 실수의 정수체계에서도 수들의 정의하면서,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무한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는 정수의 체계로 환원가능하다고 믿는 초한정수와, 정수와 달리 다루어야 한다는 초월수가 다른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런 수들의 종류를 나누기에 앞서서 벩송이 기억과 추억들을 구별하였고, 또한 순간과 찰나도 구별하였으며, 추억들을 다루는 신체적 습관과 사회적 습관이 다르다는 것도 말하게 된다. 벩송은 경험적 증거를 찾는 이런 습관과 달리 기억의 실행에서 의식의 지속이 직관이라고 하면서, 부분과 전체를 구별하지 않는 의식이 있음을 알렸다. 이 질료(자연)형이상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직관의 논의가 수학 체계 안에서 단위 설정의 수들의 종류를 구별하면서 무리수, 초한수, 초월수, 허수들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학에서도 직관의 종류들이 다양하며, 친근성(유유상종, 알고리듬)에 따라 직관적으로 이해한다고들 한다.
[무한에서 끝 점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찰나(un moment)와 같다. 그래야 수학이든 과학이든 정합성을 성립시킬 수 있다고 한다. 불교와 유교는 그 찰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un instant)을 계속해서 이어가면서 학습 또는 수행을 계속하여 창발스러운 자아를 만들어간다고 여긴다. 순간에 우월성을 두는 것이 중세 신학과 스콜라주의 신앙이라면, 이 세상 더불어 살기를 노력하며 세상을 열어놓는 불학과 유학이 유일신을 갖지 않고 또한 변증법적 통일을 말하지 않으며, 보살행 또는 평천하를 이야기할 것이다. 둘의 방식은 전혀 다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혁명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기억 속에 있다. 그 모습은 합의과 계약에 따른 터전에 맞는 공화정일 것이다. 공화정을 만들 수 있는가? 수학적 담론이든 과학적 담론이든, 형이상학적 담론이든 자연배후학의 담론이든, 논리적 추론이든 로가리듬적 친근성이든 수렴의 방식(다음측정)을 만들고, 또한 수정과 조율을 통하여 이어갈 것이다. 사람들은 다음 세상을 ‘다음 측정’의 노력에서, 이기심이 아니라 조화심(공감심)에서 찾으려 할 것이다. (59UKG) (4:41, 59UKG) (5:07, 59UK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