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정끝별
천변 오동가지에
맞댄 두 꽁무니를
포갠 두 날개로 가리고
사랑을 나누는 저녁 매미
단 하루
단 한 사람
단 한 번의 인생을 용서하며
제 노래에 제 귀가 타들어가며
벗은 옷자락을 걸어놓은
팔월도 저문 그믐
멀리 북북서진의 천둥소리
처서(處暑)
정양
냇물이 한결 차갑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이
뒤돌아보는 일 없이
어제도 이렇게 흘러갔었다
흘러가서 아주아주 소식 없는 것들아
흘러가는 게 영영 사라지는 몸부림인 걸
흘러오는 냇물은 미처 모르나 보다
24절기 중 14번째 절기인 처서(處暑). 한자 그대로 ‘더위가 그친다’는 뜻. 예부터 처서 무렵 비가 내리면 그 해 벼농사를 망친다고 할 만큼, 농가에서는 이 시기 비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옛말처럼, 이때부터는 파리·모기의 기세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돈다고 여겨졌다. 이런 현상이 마법 같다고 해 ‘처서 매직’이라는 신조어도 탄생했다. 그러나 최근엔 기후변화로 이 처서 매직을 체감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논두렁 풀 베고, 책 볕에 말리고
조상들은 처서가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져 풀이 더는 자라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 무렵부터 논두렁과 산소의 풀을 깎는 벌초가 시작됐다.
여름 내내 눅눅해진 옷과 책을 볕에 말리는 포쇄(曝曬)도 이때 이뤄졌다. 사고(史庫)에 보관된 실록은 습기가 차면 곰팡이가 슬고 좀벌레가 슬기 쉬워 나라에서는 정기적으로 사관을 보내 상태를 점검하고 볕에 말렸다.
포쇄는 정해진 날짜가 없었지만 대개 봄이 아니면 장마가 지나고 맑은 날씨가 많은 가을에 이뤄졌는데, 처서 무렵이 바로 그 시작점이었다. 사관들은 실록을 볕에 말릴 때마다 언제, 누가, 왜 열람했는지 등과 실록의 보존 상태를 낱낱이 ‘형지안(形止案)’이라는 문서에 남겼다. 임진왜란 전후부터 조선 말까지 포쇄를 위해 사고에 사관이 파견된 것만 234차례에 이른다.
조상들은 처서 무렵 비 소식에 마음을 졸였다. 이때는 벼꽃이 한창 피는 시기라, 비가 내리면 꽃가루받이가 제대로 되지 않아 쭉정이만 남는다. 반면 햇살을 잘 받으면 알곡이 무럭무럭 자란다. 무엇이 한꺼번에 성하게 자라는 모습을 “처서에 장벼(이삭이 팰 정도로 다 자란 벼) 패듯”이라 표현했을 정도다.
처서에 내리는 비를 두고는 “처서비가 내리면 십리에 천석이 줄어든다”거나 “처서비에 독 안의 쌀이 줄어든다”라는 말이 있다. 경남 통영에서는 “처서에 비가 오면 십리 천석을 감하고, 백로에 비가 오면 십리 백석을 감한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 시기는 산과 들에 먹거리가 넘쳐나 특별히 절식으로 꼽는 것은 없다. 참외와 수박이 여름 내내 식탁을 채우다 서서히 물러나고, 그 자리를 복숭아가 이어받는다. 특히 조상들은 처서를 지나 물오른 복숭아라야 제맛이 난다고 여겼다. 복숭아가 저물면 곧이어 배가 그 자리를 채운다.
포도도 이 시기 존재감을 더한다. 포도는 칼슘·마그네슘·인이 풍부해 뼈 건강에 좋고, 레스베라트롤과 안토시아닌 같은 항산화 성분도 넉넉하다. 아삭한 식감의 오이도 막바지 더위를 씻어내기 좋은 채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