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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칼의 파티마는 1917년 5월 13일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기적으로 유명하다. 파티마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 이 곳 양치기 어린이들에 의해 확인된 뒤 이 곳을 찾는 포르투갈 국내외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던 자리에는 1928년 예배당이 세워졌다. - 파티마 시내의 회전 로타리에 있는 성모 마리아상 -
포르투칼의 파티마는 1917년 5월 13일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기적으로 유명하다. 파티마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 이 곳 양치기 어린이들에 의해 확인된 뒤 이 곳을 찾는 포르투갈 국내외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던 자리에는 1928년 예배당이 세워졌다. - 파티마 시내의 회전 로타리에 있는 성모 마리아상 -
동정녀 마리아는 1917년 5월 13일과 10월 13일 사이에, 포루투갈, 파티마 근처에서 3명의 목동 어린이들( 프란치스코 당시 9세, 히야친따 7세, 루치아 10세 * 참고-프란치스코와 히야친따는 남매간이며 루치아와는 사촌간이다 )에게 6번에 걸쳐 발현하였다. 어린이들에게 발현해서, 동정녀 마리아는 우리 세기에 살고 있는 모든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한 메시지를 지니고 하느님에 의해서 파견되었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였고. 전쟁과 유혈적 폭력에 의해서 문명이 처참하게 파괴되었던 시기에 나타나, 성모님이 요청하신 기도, 배상(보속), 그리고 봉헌이 받아 들여지고 이행된다면,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에 평화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광장의 오른쪽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곳이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장소란다-
1928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53년 10월 7일에 축성되었으며 로자리오의 15개의 신비를 기리는 15개의 제단이 있다. 제단의 벽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모 마리아의 계시를 묘사하고있으며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과 기도 장면등 파티마의 기적이 묘사되어 있다. 네오 클래식 양식의 대성당으로 중앙에 64m 높이의 탑이 있고,좌우의 주랑에는 예수님의수난을 그린 벽화가 있다. 제단 왼쪽에는 자신타 마르투와 프란시스코 마르투의 묘가 있다.
광장 가운데에는 은혜의 물이 나온다는 수도꼭지가 있다. 앉은 뱅이도 이 물을 먹으면 벌떡 일어 났다는 물.....그러나 지금은 안타깝게도 한방울의 물도.........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때인 1917년 5월 13일,지금의 성모 마리아 발현 성당이 있는 언덕에서 양을 돌보던 세 어린이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앞으로 5개월 동안 매월 13일 이곳에 나타나 평화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다. 이 일은 그 해 10월 13일까지 5개월 동안 수 많은 사람에 의해 확인되었으며, 1930년 10월 13일 레이리아 주교가 공인을 하였다.이어 로마 교황이 확인하여, 1953년 이곳에 대성당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성당 앞은 3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광대한 광장(The Recint)으로 로마의 바티칸 광장 보다도 더 넓다. 오른쪽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던 자리에 세워진 성당. 원래는 초라한 성당이었으나 딴 건물을 덧 씌워 지었으며, 수 많은 참배객을 위해 스피커 시설까지 해 놓았다.
대성전 입구 상단의 부조
파티마 성모상의 특징은 양손을 가슴에 모아 합장하고 있으며, 합장한 손에 묵주가 걸려 있다.
파티마의 성모(포르투칼어 : Nossa Senhora de Fátima)는 파티마에서 세 명의 어린 목동에게 나타났다는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칭호다. 파티마의 성모는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매월 13일 여섯 번 나타났으며, 처음 나타난 5월 13일은 파티마의 성모 발현 기념일로 제정 되었다고 한다. - 소나무와 잘 어우러진 대성당앞 광장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동상 뒤편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십자가
요한 바오로 2세는 터키인 저격수 "아그자"로부터 불과 3m 거리에서 저격 당했으나,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총격을 받은 직후 병원 침상에 파티마 비밀의 내용이 담긴 봉투를 가져오게 했으며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즉시 티 없이 깨끗한 성모 성심에 온 세상을 봉헌하기로 마음먹고, 직접 [의탁 기도문]이라 이름 붙인 기도문을 작성하였으며 그는 저격 사건이 있은 바로 다음해인 1982년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파티마로 순례를 떠났다고 한다.
동전을 넣었더니 초에 불이 켜졌다.....경건한 마음으로...
오비도스, 죽기전에 꼭 가봐야 할 곳에 들어가 있는 작은 마을이란다. 포르투칼의 리스본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다, 오비도스의 특징은 성으로 둘러 쌓여져 있는 중세시대의 마을이라는 것. 중세 시대의 분위기가 아직 남아 있고, 관리가 잘 되어 있어서 예전 분위기를 마음껏 느낄 수 있다.
무어식 방어벽에 둘러쌓여 있는 도시. 아주 자그맣고 회반죽을 바른 집들이 있는 마을로 오비도스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여왕에게 세습되었고 1282년 디니스왕은 이사벨 왕비에게 이 마을을 결혼선물로 주었다. 이후 600년 동안 포르트칼의 군주들이 오비도스를 결혼선물로 왕비에게 선사하는 일은 관습처럼 행해져 "왕비들의 집" 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남았다고 한다. 오비도스를 진입 하기전에 멀리서 보이는 성곽들이 마치 요새 같은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 왔다.
입구에 들어서니 푸른색의 타일벽이 우리를 맞이한다. 지구상의 타일 문화가 시작된 곳 이란다.
오비도스에 도착하니 나는 흑기사가 되어 성곽에 도착 한양 그 모습은 웅장 했다. ( 오비도스성의 입구로 성 안쪽에서 촬영한 것이다 )
포르투칼의 오비도스는 12세기의 곤살로 메데스 다마이아 장군이 이곳을 침략 정복한 후에 빛이 나기 사작했다. 보로우족 오비도스는 게르만과 무어인(아랍인)의 침략을 받았다. 아랍의 지배에서 벗어난 후 거부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탈바꿈 되었으며 1282년 다니스왕이 오비도스의 아름다움에 놀라 이사벨에게 이 오비도스를 선물로 안겨 주었다고 한다.
성안의 좁은 길가의 대부분 건물들은 가계인데, 이렇게 벽면을 꽃으로 장식해 두었다.
나무의 줄기가 레스토랑 건물을 감싸고 있다, 이런 모습은 오비도스 마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오비도스의 원래 이름은 '보로우(Borough)'였다면서 기원전 308년경, 겔트족이 성벽을 쌓아서 자신들을 보호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곳의 역사는 12세기 부터 시작된다. 보로우(오비도스)’는 게르만(고트족)과 무어인(아랍인)의 침략을 받아 그들의 지배를 받았으나 12세기 ‘곤살로 멘데스 다마이아'장군이 이곳을 정복한 후 아랍의 지배에서 벗어난다. 그후 ‘오비도스’는 귀족들이 거주하는 마을로 성역화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그 후 약 6백여 년동안 이사벨 왕비와 관계를 맺게 되어 1834년까지,'왕비의 집'으로 불렸다. 그리고 1441년에는 국왕 ‘아폰소 5세‘가 왕자 시절에 사촌이었던 8살의 이사벨과 이곳 ‘산타마리아’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도 유명하단다.
1775년 포르투갈에 대지진이 일어나, 이곳의 많은 건축물이 파괴되었으나 산티아고 교회나 상 페르도 교회, 바르티칸 탑 등과 성벽의 서쪽 일부는 오비도스의 백작들 요구에 의해 다시 재건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성벽에 올라서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중세기(中世紀)속으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마을의 좁고 오밀 조밀한 골목길을 거닐다 보면 더욱더 그러하다. 골목 쪽으로 면하고 있는 집들은 대부분이 기념품가게나 수공예품 등을 파는 상점으로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포르투갈 중서부 해안에 위치한 도시로 자연경관이 수려해 '계곡의 진주'로 불렸단다. 1282년 포르투갈 다니스왕이 왕비에게 오비도스를 선물 받은 후 여왕의 직할시로 지정되었다. 성 안에 있는 마을은 중세시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며, 성벽은 포도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위풍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 15세기의 성은 본래 요새로 지어 졌다가 16세기에는 궁으로 그 용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모든 집들이 하얀 벽에 황토색 기와 지붕을 하고 있는데 하얀 벽은 여름의 뜨거운 햇빛과 높은 기온을 피하기 위한 것이고, 붉은 지붕은 아랍식의 건축 양식을 따른 것 이라고 한다.
마을의 특징은 무어인들이 세운 누벽이 마을을 둘러 쌓고 있는데, 흉벽(성벽 안쪽 위에 있는 넓은 보도)을 따라 걷다보면 오비도스의 마을과 주변 지역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
- 흉벽위에서 바라본 마을밖의 모습 -
포르투갈의 보석이라 불리는 “오비도스”. 600년 전 왕비들을 위해서 특별히 요새로 만들어진 중세도시 성내에서 골짜기를 연결하는 아치형 돌담을 쌓은 수로로 물을 공급했던 시설이 인상적이다.
오비도스는 마치 마을 전체가 박물관과 같은 곳으로 어느 누가 사진을 찍어도 사진 작가가 찍은 것 처럼 아름다운 사진을 얻을수 있는 곳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의 한 도시에 와 있는 느낌을 받으며.........
까보다로까(로까곶)는 까몽의 말처럼 유라시아 대륙이 끝나고 광활한 대서양이 시작, "까보다"는 끝을 의미하며 "로까"는 돌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즉,돌의 끝 땅끝 마을이란 뜻이기도 하다. 대서양이 시작 되는 곳이며 지구의 서쪽 끝이라고 보면 된다.
까보다로까는 인도양을 찾기 위해 처음 출항을 한 곳 이기도 하다.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글을 번역하면, "땅이 끝나는 곳에 다시 바다가 시작된다. 땅이 끝나도 바다가 다시 시작되니 젊은이여 절망을 갖지 말고 희망을 가져라“ 포르투갈의 시인 "까몽이스"의 글이란다...
“여기는 땅 끝, 여기서부터 바다가 시작 된다“라고 적혀있어 옛날 지동설 이전에는 저 망망 바다 저편에 또 땅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음을 짐작케 한다.
까보다로까의 커다란 비석에는 북위 38도47분 동경 9도30분, 고도 140m라는 좌표와 함께‘이곳에서 대륙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 된다’라는 포르투칼의 민족 시인 까몽의 글과 함께...
대서양의 파도가 끝없이 밀려와서 하얗게 부서지는 높다란 절벽위에 빨간 등대 하나가 서있다. 대서양을 오가는 배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까보다로까 등대다. 그러나 지금은 한낮이라 등대는 밤을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일까 ?. .
PAUL HARRIS라는 사람의 비 같은데...배를 조종하는 키가 보이는 걸로 봐서 항해사 였을까요? 궁금했지만 설명을 해줄 사람이 없어서.............암튼 아름다운 곳이다
대서양의 에메랄드 빛 물에서 높이 140M 절벽을 이루는 이베리아반도의 땅끝에서 대서양을 항해 계속가면 미국의 뉴욕이라고.......
끝없이 펼쳐진 대서양의 푸르고 거친 물결이 발 아래서 포말을 일으키며 하얗게 부서진다
이렇게 높은 절벽 끝 대지에서도....대서양의 거친 바람앞에서도 하늘 하늘 흔들리며 이름 모를 꽃을 피운 들풀들에게서 새삼 강한 생명력이 느껴져 잠시 숙연한 마음이........
땅끝이 땅끝을 보면서 서 있는 십자기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 일까? 대서양 넘어서 아메리카의 땅끝이 이 십자가를 기다리
땅끝이 땅끝을 보면서 서 있는 십자기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 일까? 대서양 넘어서 아메리카의 땅끝이 이 십자가를 기다리고 있거늘 그 십자가는 대륙의 빛이었는가? 무슨 빛을 이 십자가에 비추고 있는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땅끝마을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수수하고 아기자기한 각종 들 꽃과 풀들이 언덕을 덮고 있었다. 화려한 것 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했다
까보다로까를 배경으로 촬영된 CF는 오래전에 이곳을 유명하게 만든 대한항공 CF가 있고 그외에 해태 제과의 자유시간 CF가 있다고 한다. 등대의 모습에서도 포르투칼식 로마풍이.......
이곳 우체국에서는 유럽 최서단 땅끝에 다녀 갔음을 증명하는 증명서에 이름을 넣어 발급 받을 수 있는데, 증명서 종류가 A4 크기는 5유로, A3 크기는 10유로를 받는다. 결코 적지 않은 가격이지만 증명서를 발급 받는 관광객들이 있다.
까보다로까 여행 증명서 A4 용지 2장 크기로 발급비는 5유로(8,000원)
여행객들 대부분은 포르투칼 최대 휴양지인 카스카이스나 유럽 대륙의 최서단인 로까곶(Cabo Da Roca)중 한 곳을 가 본다고 한다. 아마도 이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서 일까? 대서양을 끼고 길게 나 있는 자갈길을 걷다가 대서양의 짙푸른 물 빛에 반하여...
포르투칼의 수도 리스본은 1755년 대지진에서 살아 남은 구 시가지와 새로 조성된 신시가지가 공존하는 차분하고 소박한 멋을 지닌 도시다. 국토를 남북으로 가르며 흐르는 테주강이 대서양 하구에 자리잡고 있으며 영어식 명칭은 Lisbon 이고, 현지에서는 Lisboa 라고 한다. 구릉지가 많이 있어 전차를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 한단다
테주강에 세워진 4월25일다리 리스본을 지나 대서양으로 흘러가는 테주강은 스페인 중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길이 1008Km로 이베리아 반도의 최장의 강이다. 리스본쪽의 강폭은 약10Km로 강이라기 보다는 바다라 할 수 있다. 4월25일교(橋)는 테주강 의 리스본 하류에 놓인 전장2278m, 교각 높이 190m 의 유럽최장의 현수교로 위에는 자동차가 아래는 기차가 다니는 2층 교량이다. 당시 독재자의 이름을 붙여 살라자교 라고 불렀으나 1975년 4월25일의 혁명을 기념하여 다리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다리 건너 언덕 위에는 거대한 예수님 상이 위치하고 있다.
벨렘탑은 4층의 등대로, 1515~1519년에 건설된 이 탑은 항구에 들어 오는 배를 감시하기 위하여 지어졌다. 탑의 모양이 드레스 자락을 닮았다고 해서, "태주강의 귀부인"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벨렘탑은 석회암으로 만들었고, 높이는 35m이다. 고딕 양식이 르네상스 양식과 무데하르 양식의 영향을 받아 생긴 포르투갈의 독특한 건축 양식, 즉, 마누엘 양식이며, 밧줄, 그물, 해초, 조개 등 배나 바다를 연상시키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안뜰에는 ‘성공의 성모’상이서 있다.
마누엘이라는 건축 양식으로 아름다운 테라스가 있는 3층은 옛날 왕족의 거실로 이용되었으며, 지금은 16~17세기의 가구가 전시되어 있다. 2층은 포대로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벨렘의 마리아 상'이 서 있다. 1층은 스페인이 지배하던 시대부터 19세기초까지 정치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하던 독립운동가, 나폴레옹 군에 반항하던 애국자, 그리고 진보주의자들이 만조 때에는 물이 들어 오고 간조 때에는 물이 빠지는 이 감옥에서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했다. 자유를 위하여 나폴레옹에 항거하던 애국인, 지식인들이 만조 때마다 차오르는 바닷물로 인하여 고통 받던 숨결을 뒤로한 채, 햇살을 받으며 고요히 흐르는 푸른 강물은 세월의
무상을 느끼게 했다. 1983년 유네스코 (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태주강가에 세워진 엔리께 항해 왕자의 발견기념비(Padrao dos Descobrimentos).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떠난 자리에 세워졌다는 이 기념비는 1960년 엔리케 항해왕 사후 500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으로, 높이가 53m다. 범선 모양의 기념비로서 대해를 향해 출범하는 웅장한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 있었다.
카라베라 선을 손에 들고 맨 앞에 서 있는 것은 항해왕 엔리케이고 마젤란, 바스코, 다가마 등 그 시대에 신천지 발견에 공이 큰 모험가, 천문학자, 선교사 등이 따르고 있다.
기념비가 서 있는 광장에 새겨진 모자이크 무늬의 세계지도가 보인다. 기념비 지하에는 아트 갤러리가 있어 각종 전람회가 열리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광장 중앙의 세계 지도에는 세계각지의 발견 연호가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도 보이는데 독도가 없다 만들어 놓으면 일본 관광객들이 파 버린단다.
임페리오 광장(공원) 가운데 있는 분수와 수로에 비친 풍광이 아름다웠다
임페리오 광장앞에서 바라본 고딕양식의 건물이 16세기 포루투칼의 전성기를 짐작 할 수 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마누엘 1세가 선조인 항해 왕 엔히크를 기리기 위하여 착공하여 1551년 완공하였다. 석회암으로 된 건물은 1변의 길이가 약 300m에 이르며 웅장하고 화려한 노르만 고딕양식을 띠고 있다.
수도원 왕실 묘지에는 마누엘 1세와 왕비의 돌널, 바스쿠 다 가마와 루이스 드 카몽이스 등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단다.
제로니무스 대성당 내부는 많은 성화가 그려져 있으며 장엄하다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제로니무스의 생애가 조각되어있고 대 성모마리아상의 조각은 물론 모든 조각 예술품의 전시장 같았다
장대한 고딕양식의 건물들은 16세기 포루투칼의 전성기의 영광을 자랑하는 이 거대한 수도원은 해외에서 벌어온 막대한 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제로니무스 수도원내 정원에 피어 있는 바나나와 꽃
관광객을 태우고 제로니무스 수도원앞을 지나는 마차... 우리나라도 이런 낭만의 거리가 있었으면....
임페리오 광장 서쪽에는 벨렘문화센타가 있는데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체결된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지었으며 콘서트, 전시회, 공연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위한 공간인데 디자인 박물관, 포르투칼 최고의 컴템퍼터리 아트 전시 공간인 베라르도 컴템퍼러리 아트 뮤지엄이 이곳에 있다.
세련된 거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오래된 이 빵집은 1837년부터 영업을 했으니 170년이 넘었다. 하지만 이곳 빵맛에 중독된 사람들로 하루 종일 붐빈다. 특히 포르투갈 전통 계란빵을 먹어 보려면 이곳에 꼭 들러보자.
보기에는 먹음직 스러울지 모르지만 먹어본 결과 빵맛은 담백하고 투박한 맛......식성 차이가 아닐까요? ( 빵 1개에 90센트(약 1,620원)...우리는 4개를 3유로 60센트를 주고... )
에두아르도 7세 공원에는 높은 탑이 있는데, 희망봉, 인도, 브라질, 마카오를 지배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탑이란다. 그 옆에는 무너져 내린 듯한 탑이 있었는데 이것은 1974년 포르투갈의 독재가 무너지고 새로운 민주정치가 시작되는 것을 상징하고 있으며, 그 옆에는 남근 모양의 탑이 있는데 이것은 생명의 탄생과 포르투갈의 번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영국의 에드워드 7세의 리스본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에두아르도 7세 공원을 조성 했다고 한다. 공원의 위치가 바이샤 지구와 테주강이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있었으며 리스본 대지진으로 3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폐허가 되었던 리스본을 재건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던 마르케스 뽕발 후작의 동상이 멀리 공원의 끝자락에 보인다.
리스본은 BC 12세기에 페니키아인 로마인 서고트족 이슬람교도 등이 번갈아 장악하고 지배했으며, 1243년 대항해시대가 포르투칼의 전성시대로 리스본을 중심으로 꽃을 피웠으나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역사적인 유적이 많이 소실되었다 페허의 자리에 새로운 도시 계획에 의한 신 시가지가 조성되어 차분하고 소박한 멋을 지닌 도시로, 특히 에두아르도 7세 공원은 기하학 무늬의 화단이 아름다운 프랑식 정원으로 태주강과 리스본시 한눈에 바라보인다. 그 옛날 리스본의 대지진을 아는지 모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