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황실비사』를 읽고
김 수 민
세월은 무상하나 인생은 치열하다. 무상한 세월 속에 치열하게 살아온 한 인생이 있다. 그러나 그 인생은 삼천만 민중의 희로애락이었다. 순종황제. 조선 제27대왕이자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왕세자를 거쳐 황태자가 되었고 황제라 칭해지며 겉으로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황제였다. 1988년 아카데미 상을 휩쓸며 당시 최고로 히트 했던 마지막황제라는 영화가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명절 특선영화로 그 영화를 처음 접했다. 특히 어린 푸이가 자금성에서 황제 즉위식을 할 때 수백명의 관리들이 절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화려한 영상으로 기억되었던 그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그 장면은 더 이상 화려한 모습이 아니었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나약할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애잔한 인생이 보였던 것이다. 순종황제 역시 마지막 황제였다. 그도 20세기 초 제국주의 약육강식의 시대 흐름 속에 철저하게 희생되었던 푸이의 닮은꼴이었다.
대한제국 황실비사. 1926년. 15년동안 순종황제의 측근으로 일한 곤도 시로스케라는 한 일본 관리가 순종황제를 애도하면서 지은 회고록이다.
당시 이왕궁비사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책은 순종황제의 측근으로 일하면서 순종에 대한 애정을 보이지만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조선황실과 민중을 일본식으로 개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면에서 많은 한계가 있지만 당시 정사에서 다루지 못하는 황제와 황실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근대화를 찬양하는 전체적인 맥락이 역설적으로 조선의 비극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2015년 초봄. 나는 대구역에서 먼저 출발하였다. 1909년 1월 매서운 바람이 불었던 겨울. 신문물인 기차를 타고 경부선을 달려 두 명의 태양이 대구역에 도착한다. 한명은 떠오르는 태양 한명은 저무는 태양이다. 이토히로부미와 순종황제. 일명 서남순행이라 불린 순종황제의 어가행차는 전란 이외에는 왕이 도성 멀리 행차하지 않는다는 구습을 깬 신선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제 통감부가 순종 황제를 이용해 일제와 조선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연출이었다.
지금은 높은 건물에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선 현대적인 역사에서 100여년 전 요란한 증기를 뿜으며 플랫폼으로 들어온 기차를 떠올려본다. 역사에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경쾌하다. 그러나 순종의 발걸음은 어땠을까. 쾌청한 봄볕을 느끼며 어가가 행차한 북성로로 들어선다. 지금은 각종 공구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살아있는 삶의 터전이다. 그렇게 사람사는 냄새에 취해 한참을 걷다보면 저 멀리 달성공원이 보인다. 어린 시절 동물원으로 기억된 그 곳에 순종의 서러운 발자취가 서려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순종황제는 경상감영과 함께 달성공원에 도착하여 순시하였다고 한다. 공원 안에는 특이한 가이즈까 향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순종황제와 이토히로부미가 기념식수를 한 나무이다. 그러나 나무도 역사의 대세에 굴복한 것일까. 같이 심은 나무지만 한 그루의 나무가 조금 더 크다. 이토히로부미가 심은 나무란다. 나무 하나하나에도 일제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인가. 일제가 풍수지리상 명당의 혈맥에 대못을 박았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사람 자연 할 것없이 조선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일제를 보며 분노를 넘어 가엾기까지 하다.
토요일 달성공원에는 아이와 함께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많았다. 벤치에 앉아 아이들의 재롱에 행복해하는 가족들을 보는 것도 정겹다.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하늘에 풍선 하나가 여유를 부리며 떠다닌다. 어떤 아이가 실수로 놓쳤을까. 피식 웃음을 짓다가 7년전으로 잠시 시간을 되돌려본다.
2008년 가을 어느날 나는 창덕궁에 있었다.
창덕궁은 순종황제가 살았던 곳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을 품었던 궁궐이다.
강력한 신권재상중심의 나라를 꿈꿨던 정도전이 세운 궁궐이 경복궁이라면 강력한 왕권중심주의 나라를 꿈꿨던 이방원이 세운 궁궐이 창덕궁이다. 광화문에서 근정전까지 일직선으로 배열된 궁궐 배치에 경회루 등 신하들의 공간을 폭넓게 배치했던 경복궁. 돈화문에서 인정전까지 꾸불꾸불한 배치에 신하들의 공간을 축소하고 후원 등 왕실 공간을 확장했던 창덕궁. 이방원은 승리했고 왕권은 견고해졌다. 그러나 오백년 뒤 창덕궁에서 왕권은 소멸했고 나라는 멸망했다.
가을 창덕궁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돈화문의 오래된 역사에 놀라움을 느끼며 인정전에 들어서면 인정전의 웅장한 자태에 마음을 여미게 된다. 붉은 선홍빛 낙엽이 수줍은 듯 내려앉으면 참으로 밟기 미안할 정도이다. 그러나 옆으로 조금 더 들어서면 아름다운 낙엽의 수줍음이 대한제국의 황혼으로, 처량함으로 다가오는 곳이 있다. 낙선재. 조선 헌종. 왕후와 후궁을 위해 지어졌던 그 건물은 대한제국 최후의 숨을 내뿜었던 곳이다. 순정효황후와 영친왕 이방자여사 덕혜옹주 등 1989년까지 황실 어른들이 살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그 곳에서 나라 잃은 설움에 타국을 전전해야 했고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한 많은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은 해방 후에도 조국의 품에 안기지 못하다가 정신을 잃고 나서야 귀국하게 되고 고종황제의 고명딸인 덕혜옹주도 한 많은 사연을 가슴에 썩인 후유증 탓일까. 실어증에 걸리고 나서야 이 곳 낙선재에 안길 수 있었다. 영친왕의 일본인 아내 이방자 여사는 이들을 극진하게 보살피며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을 묵묵히 지킨 곳이 낙선재이다. 지금은 주인이 없어서 서운해서일까. 낙선재는 빈 방에 파란 하늘과 낙엽을 대신 담는가보다. 한 번 기둥을 쓱 쓰다듬으며 수고했다고 토닥여본다.
창덕궁은 일제에 의해 많은 시련을 겪는다. 궁궐의 어원이 궁금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지엄했던 궁궐은 개방이 되고 전각이 헐리고 파티가 열리며, 창경궁은 동물원이 된다. 곤도 시로스케는 이를 문화적 정취를 마련한 전하의 은혜로 시민들은 이에 감사해야 한다고 서술했다. 씁쓸하다.
그러나 일본 도쿄의 황거는 더욱 지엄해졌다. 일제는 치밀하게 순종황제의 도쿄 천황 알현을 추진했다. 극구 반대하는 순종에게 강압적인 태도도 불사하며 정책을 추진했고 순종은 도쿄를 방문. 일왕을 알현하게 된다. 이를 한일양가의 아름다운 장면으로 묘사했지만 순종의 눈물을 저자는 알았을까. 그는 일본인이기 때문에 정녕 알지 못했던 것일까.
그런 복잡한 마음을 후원에서 날려버린다. 산들산들 바람에 떨어진 열매를 양볼에 주워담는 다람쥐의 귀여운 재롱을 왕들도 보았으리라.
나라를 빼앗기던 순간에도 이곳만큼은 고요했을까. 한 많은 오백년 조선의 이야기가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에 실려온다.
2015년 봄기운이 완연한 어느날. 나는 서울을 거쳐 남양주로 향했다. 서울 청량리 역에서 경의중앙선을 타고 도농역에 도착한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얼만큼 더 들어가면 금곡동에 도착한다.
홍유릉에 도착하자 햇빛이 반짝이던 그곳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이면서 요란한 소나기가 퍼붓는다. 깜짝 놀라 매표소 처마에 몸을 피했다. 한동안 천둥번개와 함께 퍼붓는 비에 살짝 몸서리가 쳐지는 묘한 날씨였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듯 이내 햇빛이 눈부시게 비친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들어서자 대한제국황실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사진속의 황실 가족들은 행복한듯 하면서도 긴장되어 보였다. 경내에는 한쌍의 연인과 한 가족 외에는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공간이었다.
새소리가 지저귀고 울창한 소나무가 영엄하게 황제가 있는 곳으로 나를 영접한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 홍살문이 보이고 이내 커다란 전각이 들어오면서 순종황제와 두명의 황후가 잠들어 있는 유릉이 보인다. 1926년 삼천만 민중이 애도하며 나라 잃은 설움을 토해내었던 그 장소에 2015년 어느날 나 혼자 그 곳에 있다는 것에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황제의 능답게 이전 조선 왕과는 달리 석상들도 다양하고 규모도 크다. 그러나 큰 규모와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조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일제는 이곳이 길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곳을 능역으로 택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철저하게 조선을 핍박하고자 했던 일제의 잔혹성에 몸서리가 친다.
하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리고 비오고 난 뒤 펼쳐진 저녁 노을에 한 폭의그림과 같은 평화로움이 나를 감싼다.
역사란 무엇일까. 그렇게 역사의 파고를 온몸으로 헤쳐나가면 누구나 맞는 종착역은 바로 고요함이란 것일까.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았던 순종은 깊은 영면에 들어서야 자연과 벗하며 노니는데 100년 후 우리들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일제시대의 고통을 아직 간직한 사람이 우리 곁에 있으며 바다 건너 침략자의 후손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순종황제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살아서는 부모님을 비극에 형제 자매와는 생이별을 해야 했던 순종황제.
깊은 잠에 들어서야 온 가족이 한곳에 모였다. 궁궐에서 한때나마 정답게 가족간의 정을 나누었을 그들은 먼 길을 돌아 이 곳 홍유릉에서 함께 안식을 취한다.
그렇게 유릉 영원 등을 돌며 한참을 조선황실과 노닐다 어스름이 낄 적에 발걸음을 돌린다. 금곡동 주민센터를 지나 동대문 방향으로 가는 버스안. 양 옆에는 높은 건물들과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번화가이지만 예전에는 나라 잃은 설움이 담긴 채 황제의 상여가 처벅처벅 지나가던 곳이었으리라.
“효경을 받들고 이왕가의 종가를 계승해 삼가 공경받는 자리에 있었으나 나라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세상의 형세에 순응하여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가문의 기쁨에 의지함으로써 백성이 그 혜택을 입었다.”
일왕의 순종에 대한 조사이다. 곤도 시로스케는 이에 감격하며 순종황제의 서거에 애도를 표한다.
그러나 나는 달리 표현하고 싶다.
“순종은 일제의 강압에 강제로 굴복하였으며 이로 인해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으며 동양은 폭압과 전쟁의 나날로 처참해졌다.”
역사에는 포지티브 역사와 네거티브 역사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화려했던 시절을 갈망한다. 그래서 치욕의 역사는 지우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1995년 광복50주년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철거는 온 국민들에게 희열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경복궁은 본 모습을 되찾았고 수려한 산세가 우리 품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한동안 근대 건물 중 상당수가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철거 열풍이 불었다. 자존심을 회복하기도 했지만 그 혹독했던 시절에도 삶을 이어갔던 우리 선조들의 자취도 이야기도 사라져갔다.
이 책은 일제의 잔재이자 기록이다. 그러나 왜곡된 그들의 관점은 대한제국의 슬픔을 더 절절하게 가져다 주었고 반성하게 만들었다.
화려한 앞모습만이 아니라 조용하게 스러져가는 뒷모습도 묵묵하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 이를 통해 삶에 대한 겸허함을 배우며 반성하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역사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순종황제의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따라가보면서 느낀 단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