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표현의 단계
묘사는 수사적이고 장식적인 언술이라는 데서 시는 묘사가 아니라 표현이고 현현이고 변형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물의 비밀을 현현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고자 할 경우는 우선 사물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사물을 보지 않고 생각이 떠오를 수 없으며 생각이 어떤 대상에 미치지 않을 경우 어떠한 감정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같은 사물이라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은 다를 수 있다. 우선 관찰자 자신의 감정에 따라서, 인격이나 지식에 따라서, 시간에 따라서, 계절에 따라서, 위치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위에서 볼 수도 있고, 아래서 볼 수도 있고, 멀리서 볼 수도 있고, 가까이에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볼 수도 있고 지식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장미꽃을 보는 경우 그 빛깔의 아름다움에 눈길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향기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람도 있다. 꽃송이만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파리와 줄기, 가시 등을 포함하는 전체적인 모습까지 세밀하게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 꽃송이를 피워 올리느라 땅속 깊이에서 묵묵하게 일하는 뿌리의 비밀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꽃 속에서 사랑하는 연안의 모습이나 마음씨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아름다움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사고를 해 보는 일도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적으로 볼 수도 있고, 시적으로 볼 수도 있고, 종교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이 사물을 보는 경우 좀 더 단계적으로 보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바라봄에서 시작하여 차츰 보다 구체적이고 상상적인 단계로 사물을 보고 이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일본의 시인인 이토 케이치는 한 그루 나무를 볼 경우 다음 8가지 단계로 나누어 보고 이를 표현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1) 나무를 그대로 나무로서 본다.
(2)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다.
(3)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4) 나무와 이파리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
(5) 나무 속에 승화된 생명력을 본다.
(6)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나무의 사상을 본다.
(7)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그 자체를 생각해 본다.
(8) 나무를 매개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객관적인 나무
(1) 나무를 그대로 나무로서 본다는 말은 사물을 바라볼 때 우선은 사물의 표면적인 사실을 정확히 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먼저 나무를 나무로서 본다는 말은 나무를 꽃이나 물고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잎과 줄기와 뿌리를 가진 사물로서의 마무를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랑도 나무처럼
사계절을 타는 것일까
물오른 설레임이
연두빛 새싹으로
가슴에 돋아나는
희망의 봄이 있고
태양을 머리에 인 잎새들이
마음껏 쏟아내는 언어들로
누구나 초록의 시인이 되는
눈부신 여름이 있고
열매 하나 얻기 위해
모두를 버리는 아픔으로
눈물겹게 아름다운
충만의 가을이 있고
눈속에 발을 묻고
홀로서서 침묵하며 기다리는
인고의 겨울이 있네
사랑도 나무처럼
그런 것일까
다른 이에겐 들키고 싶지 않은
그리움의 무게를
바람에 실어 보내며
오늘도 태연한 척 눈을 감는
나무여 사랑이여「
-이해인 「사랑도 나무처럼」
사랑을 나무에 빗대어 쓴 시다. 이러한 시를 쓰려면 나무가 무엇인가를 알고서 써야 한다. 여기서 시인은 나무란 계절에 따라 변하는 마무, 뭔가 내면에 많은 비밀을 감추고도 태연하게 서 있는 나무라는 객관적 사실을 인지하고서 이를 사랑과 견주어 쓴 것이다. 나무의 기본적인 속성을 알고 이를 시적으로 의미화한 것이, 이 시의 장점이다. 나무의 기본적인 속성을 알고는 나무의 부분적인 것들도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2)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다의 단계일 것이다. 나무라 할지라도 소나무인가, 감나무인가, 소나무라면 늙은 소나무인가, 어린 소나무인가, 구부러졌는가, 바르게 뻗었는가를 보아야 한다.
먹구름 뚫고
파아란 하늘만 우러러
폐원의 石塔처럼
겨우내 앙다문 裸木
오늘도 不動이다
사나운 눈보라에 시달린 胴體
사지는 바람에 찢기우고
여름을 여윈 가슴은
밤마다 무서운 객혈이어도
선 채로 억 년을 지켜
동결된 계절의 이랑 끝에
저리도 오만하게 버틴
겨울 哨兵이여!
-홍문표 「裸木」
겨울 차가운 들녘 끝에 알몸으로 의연하게 버티고 있는 겨울나무를 표현한 시다. 그 무성하고 화려하던 잎들은 다 지고 외롭고, 쓸쓸하게 추위를 견디고 있는 추사의 歲寒圖를 연상하게 하는 시다. 이러한 작품은 나무의 모양을 철저히 관찰한 다음에야 표현이 가능하다. 물론 인생도 이 나목처럼 의연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흔들리는 나무
그러나 (1)과(2)의 단계는 모두 나무의 정적인 상태다. 부동의 상태에서 나무를 관찰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나무의 움직임을 볼 필요가 있다.
(3)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4) 나무와 이파리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는 단계는 바로 나무의 움직임을 보는 것이다.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 일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류시화 「새와 나무」
고요한 숲속에서 유일하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면 바로 새가 날아와 앉아 있음을 알게 된다. 매우 예민한 움직임의 관찰이다. 나무의 움직임은 일반적으로 바람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새가 날아와 앉기 때문에 흔들린다는 독특한 관찰이다. 내 마음의 나눗가지에도 당신이 앉아기 때문에 흔들린다고 했다. 그런데 숲 속의 나뭇가지는 새가 집을 지음으로 더는 흔들리지 않지만 내 마음의 나뭇가지는 계속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당신이 내 마음에 집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나무의 움직임을 통해서 마음의 움직임까지 드러낸 시다.
첫댓글 예문을 들어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