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오름 맛점
홍 경 화
언제부턴지 우리 동네에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서 한낮에 오가는 사람을 내려다 보는 눈이 생겼다. 움직이거나 서 있는 사람을 살피는 검은 눈은 매의 눈처럼 날카롭다. 마치 꼭대기에 앉아서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동태를 살피니 어떤 땐 감시당하는 듯하다.
한번은 그 아래를 지나다가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서 뭔가 하고 올려다봤다. 까치와 까마귀가 자리다툼을 벌이는 거였다. 까치끼리의 터 싸움은 더러 봤는데 까마귀와 까치가 저러는 건 생소했다. 터줏대감 까치는 결코 뒤지는 기색이 없었다. 덩치는 작아도 크고 시커먼 까마귀를 향해 악착같이 쏘아대며 격렬히 대들었다. 이따금 뉴스를 장식하는 인간세상의 밥그릇 싸움 같았다. 누가 이기나, 자못 궁금하여 지켜보았다. 해결점이 안 보일 것 같았는데 얼마 후 잠잠해졌다. 터줏대감들 대여섯이 남아서 부리로 깃털 손질을 하고 앉았다. 작은 체구로 저보다 큰 침입자를 몰아낸 까치가 장해 보였다. 어쩐지 까마귀는 안 끌린다. 일곱 살짜리 아이큐라고 그러지만 까치 편을 들고 싶다. 우리 동네 가까이에 꺼먹이가 산다는 게 아직은 익숙하지 않고 낯설다. 도시의 소음에 저들 싸움의 소리까지 보태지 말기를 바랐다.
새벽 4시에 눈을 떠서 성판악에서 한라산으로 가는 출구를 7시쯤 통과했다. 이름만으로 설레게 하고 신비롭기도 했던 사라오름. 오름 중에 제일 높기도 하고 정상의 분화구에는 물이 강물처럼 찰랑거리는 산정호수를 품고 있는 곳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한라산 정상 백록담이 아니다. 제주에는 오름이 수백 개나 분포해 있는데 백록담에 오를 때처럼 발톱이 또 한 번 빠져나갈지는 잘 모르겠다.
초입 오르는 길이 익숙한 것이, 전에 한번 올랐던 길이라 다시 보니 반갑기도 했다. 물오른 봄의 산길은 높이 하늘 가까이에 닿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받아주고 끌어주려는 포근함을 보인다. 돌밭길이 나타나도 발걸음이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천남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식물이 길옆에 무리 지어 모자를 눌러 쓰고 도열해 있다. 맨 위쪽 돋아난 잎사귀가 코브라 대가리같이 생겼다. 세모꼴로 넓적한 잎 하나가 아래로 향해 꼬부라졌다. 널따란 이파리가 무언가를 폭 감싸서 모자를 씌워 보호하려는 것 같다. 시각적으로 다정함이 묻어나 귀여운 구석이 있다.
드디어 백록담으로 갈 사람은 직진하고, 사라오름 이정표가 나타나서 좌향좌 방향을 잡는다. 아스라이 천국의 계단처럼 계단이 시작되었다. 쉬엄쉬엄 앉았다 오르기를 수차례, 마침내 끝나는 곳에 낙원처럼 산정호수가 보였다. 물속에 손을 잠가본다. 차갑고 시원하다. 산행의 무더위를 말끔히 가셔준다. 맑은 물속이 환히 보인다. 바닥에 깔린 자갈돌은 붉은 벽돌색을 띠었다. 물속에 철분이 그만큼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높은 곳인데도 물로 가득 채워져, 분화구가 아름다운 호수로 변한 걸 눈으로 확인하니 신비롭다.
호수를 반 바퀴쯤 돌아 숲길로 오르자 목적지 사라오름이다. 잘 설치된 데크 계단을 올라서니 드문드문 떠 있는 구름 아래 제주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멀리 바라볼수록 희뿌연 안개에 덮혀 몽환적이다. 몽실몽실 푸른 옷을 부풀려 입은 물오른 숲은 뛰어내려도 좋을 만큼 평화롭다. 자연에는 참 신비로운 기운이 있다. 느끼려고만 한다면 순간순간 존재하는 그 기운을 만날 수 있는 것 같다. 자연의 품에 안겼을 때 마음이 평화로운 것은 그 기운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자연의 신비를 호흡하며 가슴으로 맘껏 들이마신다.
정오가 되어가는 사라오름, 마치 선계에 접어든 듯 저 아래는 여전히 아련하고 평화로운 그림이 펼쳐지고 햇볕은 맑고 따스하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으나 우리는 가져간 도시락을 펼치기로 했다. 주차장에 그 많던 사람들은 전부 한라산 백록담으로 올라갔다. 중간에 옆길로 새야 오르는 사라오름에는 인적이 드물다. 둘레를 서성이던 두셋의 사람마저 내려가 버리고, 잠시 이 좋은 사라오름이 오롯이 우리의 차지가 되었다.
삶은 계란을 앉은 데크에 톡톡 깨서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물로 입술을 축이고 한입 베어 무는데 어디선가 까마귀가 날아왔다. 맞은편 계단참 기둥에 앉아 우리를 빤히 바라본다. 혼자 먹니? 눈치를 주는 것 같았다. 쫓아버리려다 인적 드문 산중이라 사람 친구를 만난 듯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그래, 알았다. 나눠 먹자. 노른자를 까마귀 앞으로 밀어주었다. 사뿐 내려와 가뿐 물고 간다.
한 할매가 먹을 걸 나눠주었다고 가서 동료들에게 전달했는지 조금 있다가 세 마리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에게도 한 쪽씩 나눠주다 보니, 너 한 입, 나 한 입, 우린 함께 한순간을 살아가는 동무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느그들도 먹고 살기가 왜 안 어렵겠니….
밥 한번 같이 먹은 사이가 되어서인지 보는 눈이 너그러워진다. 까마귀나 내나 그 순간 깊은 자연 속에 머물러서 더 그런가 싶었다.
구름 위 사라오름 정상에서 꺼먹이와 꿀맛 같은 맛점을 잘 먹고 내려왔다.
첫댓글 삼경이 다 되도록 까치와 꺼먹이, 재밌게 읽고 갑니다 ^^
와우 저도 한편 써야 하는데 시간이 핑계를 대고 있네요.. 반갑습니다. 경화쌤~~
한라산 탐방探訪을 하셨군요.
추억追憶이 담긴 향香 가득한고운 글 마음에 담아갑니다.
건안建安하시고 건필健筆하시기를 기원祈願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