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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잠언 4강
말씀 / 잠언 8장,9장
요절 /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은 만성 적자를 안고 있는 독립서점을 6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생계 수단이면서 좋은 장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인이 전적으로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작은 출판사 작품이라도, 베스트셀러가 아니어도 주인에게 다가오는 책을 좋은 자리에 배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돈보다 책, 성공보다 글을 사랑하는 모습이 느꼈습니다. 책을 사랑함으로 좋은 작품을 얻었고, 좋은 글을 찾음으로 문학가의 명성을 만난 것이구나! 그와 같이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이 지혜를 얻고 지혜를 찾는 자들이 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8:1-9절은 지혜의 초청입니다. 1절입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길 가 높은 곳과 네거리, 성문 곁과 문 어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사람들을 부릅니다.(2,3) 소리를 높여 초청합니다.(4) 속이는 것이 없고 당당한 모습입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명철을 주고 미련한 자의 눈을 밝게 합니다.(5) 선한 것과 정직한 것(6)을 알게 하며 악을 미워합니다.(7) 굽은 것이나 패역한 것이 없습니다.(8) 그러므로 총명한 사람은 참 지혜와 사이비 지혜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9) 참 지혜인가? 사이비 지혜인가? 과정이나 동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17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참 지혜의 과정은 어둠이 없으며 동기는 생명을 줍니다. 반면 사이비 지혜는 어둡고 죽음으로 끝납니다. 7장 음녀의 초청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해질 녁, 으슥한 골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기생 옷의 화려함으로 어둠을 가려 속였을 뿐입니다. 사랑을 말하는데, 실상은 어긋난 욕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명철이 아닌 쾌락, 깨우침이 아닌 올무를 씌워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만들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자주 헷갈립니다. 사이비 지혜가 내세우는 명분 때문입니다. 전쟁이나 살인 같은 끔찍한 폭력을 명분으로 가리기 때문입니다. “악을 응징하는 정의구현이다, 신의 뜻을 대리하는 성전이다”, 그런 것들에 눈이 가려지면, 폭력을 행사하는 그 자체까지도 지혜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손 마른 자를 고쳐주었을 때, 바리새인들은 감동 대신 분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3:4) 하지만 그들은 어느 것이 옳은 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안식일을 지켰다는 명분에 갇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이유입니다. 이단의 미혹도 그러합니다. 이단 교주가 성추행을 하고 거짓과 폭력을 행사하는데도 헌신이나 순종이라는 명분에 가려 끔찍한 악을 보지 못합니다. 불륜의 현장도 그러하지요. ‘순수 사랑, 불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정을 깨는 악을 덮어버립니다. 도박에도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이번 한방으로 과거의 실패를 만회하고 새 인생을 출발하자” 스티븐 레비츠키는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라는 책에서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극단적 소수들의 놀이터가 될 수 있음’을 경고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도의 허점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허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장의 유익을 좇아가는 것을 선으로 알고 듣고 싶은 소리만 반응하려는 인간 욕망이 만들어내는 허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혜는 지혜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자들에게 자기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은을 얻는 것보다 지혜의 훈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득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을 얻는 것이 정금보다 가치 있으며 지혜를 얻는 것이 진주보다 값짐을 알아야 합니다.(11) 누군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운 것이 없는 기독교 인생관을 확립하게 되었다면, 진짜 성공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우리 UBF 식으로 표현하면, 양으로 끝나지 않고 목자로 업그레이드 된 것입니다. 교수가 되고 부자가 되는 그 자체로 끝나버리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교수 목자로 업그레이드되고 부자 목자로 업그레이드되어야, 그 지식과 부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물론 업그레이드 하기가 당연히 힘들지요. 그래서 대부분 돈과 명예를 쌓는 그 자체에만 올인합니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보면 돈이나 명예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명철로 자기 아파트를 삼고 지식과 근신으로 몸을 치장하며 살아갑니다.(12)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악을 미워합니다.(13)
물론 악을 떠나는 것은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이 잠언을 공부하면서 ‘패역한 입’이라는 말씀에 찔림 받아 ‘욕을 하지 말아야지’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운전대만 잡으면 자기도 모르게 사나운 단어가 튀어나왔습니다. 어떤 이는 금연을 결심했는데, 번번히 작심삼일로 끝나는 한계를 맛보며 의지를 놓아버렸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먹는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하고 게으른 본성, 탐욕과 정욕과 이기심의 욕망과 충돌함으로 위기를 만납니다. 세상은 경건의 호흡이 힘들 정도로 오염되었습니다. 지혜로부터 가르침과 도움을 덧입어야 악으로부터 벗어나 품격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14-16절에서 지혜를 ‘나’라는 인격체로 묘사하는 모습이 그러합니다. ‘나-지혜’가 주어입니다. 지혜가 계략과 지식을 가지고 능력으로 세상을 주관합니다.(14) 지혜가 왕이나 방백들에게 치리의 도움을 주며 공의를 세워갑니다.(15) 지혜는 재상과 재판관들에게 제대로 판결하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합니다.(16) 이는 인간의 경험과 추론으로 쌓아올린 지혜, 인간이 만들어낸 지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지혜는 독립적인 하나의 실체로서, 지혜와 연결되는 자들에게 명철과 능력과 생명을 공급합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사랑을 입는다’는 말씀은 은혜를 전제로 합니다. 제가 BTS의 노래를 사랑한다고 해서 BTS가 제 생일에 노래를 불러준다면, 은혜입니다. ‘나를 만날 것이니라’는 말씀도 은혜를 전제로 합니다. 만약 제가 워렌 버핏을 간절히 찾는다고 하여 버핏이 저를 만나준다면, 그 만남은 당연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그와 같이 지혜의 위대함, 지혜의 능력을 생각하면 은혜입니다.
지혜가 부귀를 주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를 안겨줍니다.(18) 지혜는 금이나 정금보다 낫고, 지혜가 주는 유익은 은보다 낫습니다.(19) 지혜는 정의로운 길로 행할 수 있도록 때마다 인도합니다.(20) 지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복을 주고 풍요롭게 합니다.(21) 골로새서 2장 3절은 말씀합니다.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지혜와 연결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는 저 개인의 확신만이 아닙니다. 선교지에 가면 가끔씩 이런 말을 듣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따라갈 정도의 사람이 있다면 정말 좋은 길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구할 수 없어 정말 안타깝습니다” 양들이나 조카들을 위해 확신이면 확신, 간절함이면 간절함을 가지고 중보기도합니다. 청년의 때에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며 살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물고기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참 사랑이다는 말처럼, 말씀을 따라 살도록 돕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당장의 유익을 좇아 잔꾀 부리는 사람을 부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목자용어로 하면 ‘사업적’이 되면 안됩니다. 꾀를 잘 쓰는 것을 탁월한 경영의 지혜인 것처럼 속지 말아야 합니다. 잔꾀 배우는 것은 정말 쉬운 일입니다. 꾀를 부리지 아니하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말씀대로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진짜 고난도 고차원입니다. 잔꾀 부리는 사람은 언젠가는 자기 꾀에 넘어가 망합니다. 고속도로에서 조금 빨리 가려고 차선을 넘나드는 차들이 있지요, 언젠가 큰 사고로 진짜 빨리 갑니다. 사서삼경 맹자(孟子)는 양혜왕의 등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그가 맹자에게 나라를 이롭게 하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맹자가 양혜왕을 질타합니다. “하필왈리(何必曰利)” ‘어찌하여 이익에 제일 관심을 두십니까’ “왕이 이익을 좇기 시작하면 왕 아래 있는 사람들도 이익을 좇아 움직일 것입니다. 천승의 전차를 가진 사람은 만승의 전차를 가진 사람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것이며, 백승의 전차를 가진 사람은 천승의 전차를 가진 사람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왕은 이익이 아닌 왕도를 구해야 합니다. 왕이 왕도를 따르면 나라는 자연히 평안해질 것입니다.” 지혜의 가치를 드러내는 예화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이 말하는 지혜는 인간의 경험과 탐구를 통해 쌓은 그런 지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이기에,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분리해서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은 근원적인 지혜를 말합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 지성의 모태가 된 지혜입니다. 22-31절은 인간의 지혜와 다른 차원의 지혜가 존재했음을 말씀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지혜는 여호와께서 태초에 일하시기 전부터 함께 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만세 전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존재했습니다.(23)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부터 계셨습니다.(24) 산과 언덕이 생기기 전(25), 아니,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26) 하나님이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지혜와 함께 일했습니다.(27) 위로 구름 하늘을, 아래로 바다의 샘들을 만들고(28) 바다의 한계를 정하실 때(29)에 모든 능력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지혜를 기뻐하셨고, 지혜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했습니다.(30) 지혜로 말미암아 우주가 태어나고 사람이 존재케 되었습니다.(31)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대로 되니라’ 요한복음 1장 말씀도 연결됩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구약시대 솔로몬이 어떻게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을 알 수 있었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을 것입니다. 솔로몬 편에서 본다면, 하나님을 사모하고 영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지혜로부터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 함께 했던 지혜가 있음을 추론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인간 지혜의 한계도 느꼈을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무에서 유, 무생명에서 유생명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로 창조된 세계의 질서와 법칙을 탐구하여 모방 응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증거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기독교가 증거하는 가장 놀라운 진리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 없습니다. 지혜가 성육신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은혜와 진리를 주십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며 악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과 명철을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32-36절의 지혜는 예수님으로 바꾸어 호칭하면 좀 더 real하게 다가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복이 된 것처럼, 인생들은 예수님의 도를 지킴으로 복을 받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예수님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말라 비틀어집니다.(33) 예수님을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34) 대저 예수님을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입니다.(35)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은 자기 영혼을 상하며 사망을 사랑하는 사람과 같습니다.(36)
9장은 초청을 받아들인 지혜로운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어리석음을 대조합니다. 9장 또한 예수님과 연결시켜 적용하면 실제적으로 와 닿습니다. 예를 들어 9장 1절 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는다는 말씀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와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일곱 기둥으로 집을 세우면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일곱 교회는 무서운 박해가운데에서도 무너지지 아니하고 세계 선교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2절부터 나오는 잔치집의 초대도 그러합니다.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차립니다.(2)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부릅니다.(3)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지혜의 잔치로 오세요 지혜 없는 사람들이여(4), 와서 지혜님의 레시피로 만든 최고급 요리와 포도주를 맛보세요(5),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세요. 명철을 회복하여 진리의 길을 가세요(6)”
마태복음 22장에는 예수님의 혼인 잔치 비유가 나옵니다. 왕은 세상 최고의 잔치로 준비합니다. 그리고 종들을 보내어 초대합니다. “각종 귀한 요리를 준비했습니다. 왕의 기쁨과 은총에 참여할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그런데 한 사람은 밭으로, 다른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갑니다. 남은 자들은 초청한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입니다. 7,8절 말씀에 나오는 거만한 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워니라 지혜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식이나 기술을 전수하는 교육 현장이라면, 무슨 뜻이지? 갸웃거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교육 현장에서는 거만한 자를 징계하고 책망해야 합니다. 자기주도 학습이 잘 되어있는 지혜로운 자는 그냥 놔두어도 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룰이 적용됩니다. 본문에서 거만한 자는 예수님을 멸시하고 배척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 자는 아무리 세뇌를 시켜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앞에 던지지 말라(마7:6)는 예수님의 경고처럼, 훈계할수록 더욱 완악해집니다. 예수님안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더욱 알고 예수님을 더 사랑합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집중하여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있는 자는 받아 더 풍성해지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진실로 명철한 사람입니다.(10) 지혜가 생명을 주고 많은 평안을 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11) 지혜는 그를 찾는 자들에게 온갖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거만한 사람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자기 홀로, 자기 나름대로 살다가 해를 당합니다.(12) 13절에 나오는 미련한 여자는 거만한 사람과 한세트입니다. 미련한 여인은 지혜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위기를 모르는 채 자기 확신에 가득 차서 신나게 떠듭니다.(13) 자기 집에서 편안히 사는 것으로, 성읍 높은 곳 한자리 차지한 것으로 신이 나서 바른 길을 가고 있는 자들에게 외칩니다.(14,15), “어리석은 자들이여, 이리로 와서 나의 간교함을 배우시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자들이여 내 가르침을 받으시오(16), 도둑질한 물이 달콤해요 몰래 먹는 떡이 맛있어요 이것도 모르는 당신들은 바보입니다”(17) 그렇게 바른 길을 가는 자들에게 미련함을 뿌립니다. 그녀의 비극은 18절입니다. 자신이 이미 죽은 자인 것을, 그를 따르는 객들 또한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지혜의 말씀을 청종하며 순종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한 삶 자체가 진정으로 은혜 입은 자이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눈을 열어 밝히 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