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시골에서는 겨울철 농한기가 되면 낮에는 여자들은 길쌈을 하고 남자들은 짚을 이용하여 새끼를 꼬고 가마니나 멍석 등 생활 도구를 만들었다. 바쁜 삶에서 놓여나 나름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이웃과 즐기며 구순한 정(情)을 나누기도 했다.
해 짧고 밤 긴 겨울, 영양 적고 열량 낮은 밥 한 그릇으로 밤을 넘기기는 힘들었다. 밤참으로 메밀묵이나 도토리묵을 해먹고 조포(두부)를 넉넉히 만들어 맑은 물에 담가 얼지 않도록 부뚜막에 두고 간수를 빼가며 먹었다.
잔치가 있거나 이웃과 나누고 싶으면 대부분 집에서 두부를 만들었다. 수제 조포는 콩의 연한 비린 맛과 간수에 스민 바다 향이 묘하게 섞였다. 어릴 땐 쉽게 그 맛이 친숙해지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입맛이 변한다. 쓴맛이나 비린 맛조차도 별 거부감이 없어졌다. 옛날 그 비릿하면서도 짭짤했던 두부가 그리웠다.
고향 가는 길에 옛 벗도 볼 겸 농협 마트에 들렀다. 친구는 가난한 농촌 살림에 애달파하는 조합장이다.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계산대 근처에서 열심히 조포를 만들고 있다. 그 모습이 하도 진지해 옛날 두부 맛이 나냐고 말을 붙인다.
그때 마침 매장에 들린 그가 자신이 특별히 개발한 해양 심층 간수 두부라며 시식을 권한다. 한 입 베어 먹어보니 오래전에 잊힌 고향의 옛 조포 바로 그 맛이다. 농촌의 생산성을 높이고 조합원들의 소득 증대에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했단다. 사무실에 들러 무너져가는 농촌 이야기를 듣다가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후 한동안 친구도 두부 맛도 잊었다.
바람이 차가워지던 어느 날 조포 한 상자가 우정의 이름으로 배달되었다. 간편한 화학 응고제가 아니라 바닷물 간수가 지닌 웅숭깊은 시골 두부 맛이 느껴졌다. 더불어 고소함을 더한 것은 오랜 벗의 묵은 우정 맛이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가난했던 시절을 함께했던 옛날식 두부는 여러 생각이 들게 한다.
단순한 식재료를 넘어 신산한 삶을 버티게 해주던 화합의 음식이었다. 간수는 억센 바닷가 사람들이 만든 소금에서 얻는다. 여름 한철 어둑한 고방 구석에서 잠을 잘 때 모인다. 콩물은 부지런한 농부와 곰살맞은 아낙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다. 기다림의 간수 염화마그네슘과 땀의 콩물 단백질이 만나 응고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두부다. 바다와 흙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화학적 결합이다.
바야흐로 세계는 살아남기 위한 전쟁터다. 강대국의 야욕은 끝이 없다. 러시아의 영토 욕심과 미국 트럼프의 관세폭탄이 세계질서를 어떻게 파괴할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신세다. 와중에 정치권은 진영 간 정권 다툼이 참으로 목불인견이다. 서민들의 신산한 삶은 관심도 없다. 대립과 갈등을 넘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칼을 겨눈다.
전혀 다른 물질이 만나 부드럽고 고소한 조포가 만들어지듯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정치를 바라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일일까. 짜고 씁쓰름한 간수나 비릿한 콩물을 그냥 먹으라고 난리다.
그저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자 했던 옛 아낙들보다 식견도 따뜻함도 없다. 고소하고 담백한 한 모의 두부도 만들지 못할 이들에게 권력의 칼을 쥐여준 서민들도 원망할 염치가 없긴 하다.
혹독한 추위의 겨울을 보내고 나면 봄이 올 줄 알았다. 경칩이 지났는데도 아직 소소리바람이 칼바람이다. 고향 친구가 보내준 두부 한 상자가 봄을 데리고 온 듯 마음의 위안이 되는 아침이다.
뜨락에 선 백목련 떨켜가 지난번 날린 진눈깨비에도 한껏 부풀었다. 아무리 날씨가 갈팡질팡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은 희망을 준비한다. 올봄에는 해가 해 같고 달이 달 같은 날들이길 바란다. 거짓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첫댓글 소중한 추억이 담긴 "봄을 기다리며"를 소중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오늘이 모란장날이라 겨우내 웅크렸던 마음도 풀 겸, 장구경도 할 겸, 센베이도 살 겸, 흑염소탕도 먹을 겸... 겸사겸사 갔다 와야겠습니다.^^
관심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탄문방은 참 글쓰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워낙 과묵한 분들만 계신 듯해서......
그래도 채하님께서 봄이 빨리 오라고 군불 한 아궁이 지펴주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