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베드로전서 5강
말씀/ 베드로전서 5:1-14
요절/ 베드로전서 5:3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가 좋다는 어떤 분들의 말을 듣고 유투브로 중간 중간 스토리를 엿보았습니다. 제목만 보았을 때에는 뜨겁게 연애하여 결혼했다가 나이 먹고 후회하는, 폭싹 속은 이야기를 ‘박보검과 아이유’라는 최고 인기 배우가 하드캐리한 드라마로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무엇이고 가족이 무엇인지,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감동드라마였습니다. 알고 보니 타이틀부터 속았습니다. ‘폭싹 속았수다’라는 말은 ‘매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제주도 방언이었습니다.
그것을 알고나니 타이틀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나님앞에서 사는 삶 또한 매우 수고로운 인생입니다. 장로들은 본이 되어야 하고 젊은 리더들은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이 남편답고 아내가 아내다운,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자녀가 자녀다운 자리에 서기 위해 때로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매우 수고로운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수고가 미련하게 보이고 계산할 줄 모르는 바보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여 폭싹 속을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매우 수고하는 그 길을 멈추지 않을 때, 거기에서 아름다운 삶의 본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진리의 말씀을 따라 매우 수고하는 길을 힘써 가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베드로는 먼저 장로들을 권면합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처럼, 모임의 운명은 리더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장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헌법에 의하면 장로의 조건은 무흠 세례교인으로 7년 이상, 40세 이상중에 존경할만한 인격과 헌신을 가지고 2/3이상의 표를 획득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장로들을 권할 때에 ‘나는 사도중의 사도요.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함께 장로된 자’, 함께 동역하는 마음을 담아 권면합니다. 아울러 그리스도 고난의 증인이며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 소개합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부활의 영광에 이른 것처럼, 지금의 고난 또한 고난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영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담아 권면했습니다.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 하지 말고 ~ 하라’가 반복됩니다.
첫째,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양무리를 억지로 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감사하고 부르심의 소망이 놀라워서 자원함으로 합니다. 저는 본과 1학년 때 첫 양을 쳤는데, 누가 소개시켜 준 것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성경공부 해보실래요?’, 묻고 묻다가 양을 얻었습니다. 대학에 합격했던 것보다 더 큰 감격과 심정으로 빵과 말씀 노트를 준비하여 일대일했던 기억이 납니다. 본문의 장로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점점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수고는 수고대로 하는데, 이전만큼 열매를 거두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나이는 점점 많아지고 에너지는 떨어졌습니다. 이전에는 함께 오전에 탁구 하고 오후에 농구하고 저녁에 말공을 해도 피곤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한 시간만 넘어가도 집중력을 잃고 비몽사몽이 되었습니다. 기쁨 대신 부담감, 소망 대신 의무감이 자연스럽게 마음의 중심에 파고들어왔습니다. 저절로 심정이 생기고 저절로 피가 끓어오르는 시절이 지나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전보다 더더욱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경험이나 습관적으로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을 조심하고 예수님을 많이 묵상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주일마다 드리는 우리의 기도제목,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예수님을 배우는 신앙생활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자원하는 마음을 잃지 않을 때, 리더의 십자가는 은혜의 통로가 되고 감사를 새롭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둘째,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 베드로는 ‘이득’이라는 표현 앞에 ‘더러운 이득’이라는 강한 표현을 했습니다. ‘이득’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 마음을 짤라내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이 내게 유익한가’, 리더가 ‘나의 권위, 나의 영광, 나의 기쁨’같은 이득을 앞세우는 순간부터 마귀적인 유혹에 휘말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삯을 생각하며 일하는 자는 목자가 아니라 삯군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삯군목자’라는 말은 없습니다. ‘삯군’입니다.
리더는 ‘나의 소유가 아니라 예수님의 소유, 예수님의 피로 사신 양’이라는 생각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값없이 구원을 받았고 값없이 영생을 받았고 값없이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이미 큰 상을 얻은 자들인데, 양을 통해 자기 존재감이나 모임 자체를 키우거나 존경 받고 대접받는 거기에 포커스를 둔다면, 하늘의 상을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기꺼이 하는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돕는 것입니다. ‘모임에 도움이 되겠는가?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양의 구원과 행복을 위한 결정과 조직을 위한 결정이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양을 구원하고 회복시키는 거기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수하게 양을 살리는 거기에 몰입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견디고 수고할 수 있는 동력이 됩니다.
셋째,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3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주장하지 말고 본이 되라’, 자녀 문제로 상담받는 부모에게 주어지는 절대 원칙입니다. 너무나 귀에 익고 누구나 아는 원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장에서는 너무나 외면을 받습니다. 유명한 꽃게의 비유가 그러합니다. ‘어느 날 꽃게 엄마가 아들 꽃게를 보더니 놀라서 외칩니다. ’우리 아들!, 잘생긴 우리 아들이 왜 옆으로 걷지? 똑바로 걸어야지‘ 아들 꽃게가 말합니다. ’이렇게 걸으면 되지?‘, 엄마 꽃게가 몇 번을 가르치다가 화를 냅니다. “바보야, 가르쳐주는 대로 왜 안해! 똑바로 걸으라고!” 그러자 아들 꽃게는 엄마 꽃게에게 대듭니다. ’그럼 엄마가 한번 보여줘‘ 엄마의 시범을 본 아들이 비웃듯이 말합니다. “엄마나 잘하세요”
꽃게 엄마는 왜 꽃게 아들에게 말도 안되는 요구를 했나요? 아들만 보고 자기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절 본문에서 맡은 자들이란 ‘책임지도록 할당된’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장로들이 전도하고 가르쳐서 구원받고 성장하여 결혼도 하고 리더가 된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애정과 열정을 쏟아부었겠습니까!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마음으로 했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장한다는 것은 주인노릇한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지시하고 섬김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리더가 될수록 주장하지 말고 본이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가령 전도해야 겠다는 목표가 생기면 타인을 향해 전도하라고 윽박지르지 말고 조용히 먼저 가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안한다고 뭐하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은밀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장이나 본이나 양들을 가르치는 통로가 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다만 지향하는 지점이 상대방이면 주장이 되는 것이고, 지향하는 지점애 내가 되면 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지만 본이 되기에 힘썼습니다. 주장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당시 정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도리를 가르치실 때 당신의 삶을 통해 본을 보이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배신을 때리는 제자들을 불러모아 발을 씻어주고 수건으로 닦아주며 말씀했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그리고 마지막에는 당신이 모든 것을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가르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본이 되는 것은 그보다 몇배 어렵습니다. 본이 되려면 먼저 앞서야 하고 먼저 죽음을 맛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며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배워라, 공부해라, 기도해라, 섬겨라”, 말하고 싶을 때, 말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배우는 모습, 내가 공부하는 모습, 내가 기도하는 모습, 내가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여주기 위한 보임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하는 보임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즐거움을 배우는 사람이 되면 내 뒤에 오는 사람도 배우기를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내가 즐거움으로 공부하면 내 뒤에 오는 사람은 공부하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나이 먹고 에너지가 딸리기 때문에, 먼저 배우려면, 먼저 공부하려면, 먼저 기도하고 섬겨려면 젊은 날보다 몇 배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본이 되고자 노력하는 리더는 함부로 가르치거나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게 됩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날 때에 시들지 않는 영광의 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4)
5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이제 젊은 자들, 주니어 리더들을 권면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이와 같이’라는 말씀은 장로들이 본이 된 것처럼, 너희도 본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점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까! 순종하고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점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영어로 'submit', 굴복하는 것입니다. 나이든 장로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제대로 본이나 보이면서 가르치세요’라고 들이박지 아니하고 고개를 숙이고 가르치는 대로 따라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대로 배우고 가르치는 대로 전도하고 가르치는 대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믿음의 학교라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은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순종을 통해 배우기 때문입니다. UBF 교회가 제대로 된 신학교육을 받지 못했던 시절에도 헌신적인 선교사들을 배출하고 캠퍼스 개척역사에 헌신된 사람들을 키울 수 있었던 비결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순종하여 말씀을 배우고 소감을 쓰고 순종하여 전도의 현장으로 나아가고 선교지로 나아가면서 연약한 내면을 연단받고 심정을 배웠습니다.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은 청년들의 모임을 정욕과 탐욕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헌신된 청년들로 자라게 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젊은 날 영적 가르침을 따라 배우고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청년세대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새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본이 되는 십자가도 무겁고 순종의 십자가 또한 무겁습니다. 그럴지라도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서로’는 장로들이나 젊은 리더들이나 서로를 말씀합니다. 장로들은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본이 되어야 해? 우리는 할만큼 했잖아!’, 그렇게 판단하고 싶은 마음을 물리치고 겸손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나이 먹을수록 좋은 본이 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부족하네 미안해’, 젊은 리더들도 순종할수록 목소리를 낮추는 것입니다. ‘저희가 순종해보니 선배님들은 헌신과 순종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지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혈기 많고 거친 저희들을 너그러이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겸손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하면 망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없어 패망하는 것이 아니라 교만하기에 패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을 믿고 겸손해야 합니다.(6)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믿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생활에서 교만한 언행을 물리치고 겸손한 언행을 몸에 익히고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그들을 높이십니다.‘ 아무리 본을 보여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괜히 순종하다가 바보되는 것은 아닐까?’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야 합니다.(7)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모든 자들을 돌아보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8절 말씀의 핵심은 ‘마귀가 대적자, 원수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장로가 본이 되고 있어? 젊은 리더들이 순종해?’,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만 주목하다보면, 성경 말씀은 또다른 다툼의 도구가 됩니다. ‘성경에 분명이 본을 보이라는 했는데, 목자님은 왜 본이 되려고 노력 안해요? 아니, 순종의 기본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이 무슨 본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거야?’,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역사하는 마귀에게 놀아나는 모습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 배고픈 사자와 같습니다. 마귀는 일년 365 연중무휴로 먹이감을 노리며 돌아다닙니다. 사자의 전략은 공동체에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나운 사자라도 무리지어 움직이는 들소떼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들소들이 공동전선을 형성하면 사자들이 떼로 덤벼도 골로 가기 때문입니다. 무리에서 떨어지게 만든 후, 여러 마리가 달라붙어 힘을 빼고 정신을 빼놓은 후 잡아먹습니다. 그와 같이 불평과 의심과 미움으로 공동체에서 분열시켜 공격합니다. 내 안에 어둠이 찾아오면, 사람만 생각하지 말고 사람 이면에 역사하는 마귀의 노림수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근신하는 것, 깨어있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나 혼자만 억울하고 나 혼자만 힘들고 나 혼자만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받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일 가운데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예수 믿는 자들로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것부터 은혜입니다. 또한 이 땅에 사는 동안 잠깐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도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우리 주님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11)
12-15절은 베드로의 마지막 인사입니다. 12절에 나오는 신실한 형제 실루아노는 베드로전서를 대필했습니다. 실루아노는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함께 2차 전도여행을 떠났던 실라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는 젊은 날 바울의 선교역사에 동참하여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바울과 함께 돌아다녔으니, 바울처럼 헐벗고 굶주리고 많이 맞고 목숨의 위협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복음역사를 떠나기는커녕 이제는 베드로와 동역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이라면 이 사람과도 동역할 수 있고 저 사람과도 동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법을 삶으로 증거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실루아노처럼 아시아의 형제들도 은혜로 사는 법을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자신이 섬기는 로마교회를 바벨론에 있는 교회라고 표현했습다.(13) 바벨론은 성전을 파괴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간 악의 도시를 상징합니다. 그런 바벨론같은 곳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시아에 있는 성도들 또한 지금 당하는 고난을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은 잠깐이요 때가 되면 썩지 아니하고 더럽지 아니하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연약한 사람의 대명사 마가가 베드로의 영적 아들이라 불릴만큼 성장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려움으로 난리치며 죽을 것처럼 힘들어하던 사람이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힘든 시간을 넘어서고 나면, 아니 극복하도록 도와주면 놀라운 복음의 일군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모습으로 인해 너무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가 되면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둠이 아닌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기에 힘써야 합니다.(14)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평강을 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양들을 돌보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들이 은혜입은 자들이며 복받은 자들임을 잊지 말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