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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납토성에 부는 바람
한성 백제의 위례성.
절대빈곤을 탈피하고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어 잠시나마 허리를 펴던 우리민족에게 올림픽은 새로운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민족적 저력도 확인했다. ‘하면 된다.’는 막연한 군사적 용어를 ‘그래, 하니까 되더라.’는 부드러운 용어로 수용하면서 또 하나의 자존심을 찾게 했다. 올림픽 공원을 조성하기 위하여 몽촌토성의 지표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백제시대 유물을 발굴했는데, 이것이 서울 정도 600년이 아니라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임을 확인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성 백제의 위례성의 위치에 대한 학계의 의견은 분분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해 충남 천안(직산)의 위례산성이라는 설과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의 기록에 의해 경기도 하남의 이성산성 및 춘궁동 일대, 송파구의 몽촌토성 등 학자마다 주장이 달랐다.
정약용이 직산 위례성보다 광주 춘궁동일대가 위례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춘궁동이 주목받는 상태에 있었는데, 그 영향이었는지 이성산성은 1986년 한양대 박물관 김병모 박사팀이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4년까지 11차례에 걸쳐 발굴하여 많은 유물과 유적을 찾아냈으나 무진년정월십이일 붕남한성도사(戊辰年正月十二日 朋南漢城道使)의 명문의 목간과 신리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어 608년에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도 하남시에서는 2010년 9월에 12차 발굴을 시도하여 하남시 유적 제 1호인 이성산성의 성격 규명에 힘을 쏟고 있다.
천안시 북면에 있는 직산의 위례성도 1995년 서울대 임효재 교수팀이 발굴한 이후 그 결과를 토대로 천안시에서는 2010년에 다시 발굴 작업에 들어가 백제와의 관련성을 밝히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몽촌토성은 올림픽의 각종 경기장과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1983년부터 1988년까지 6년에 걸쳐 백제의 유물 유적이 많이 나와 위례성과의 관련성이 불거졌으니 올림픽은 백제사 발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곳에서 연못과 도로 등 왕궁으로 추정할 수 있는 구조물이 나타나고 백제의 유물들이 발굴되자 학계의 관심이 쏠렸다.
몽촌토성이 그렇게 각광을 받고 있을 때 이형구 박사는 1983년부터 풍납토성이 위례성일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7년 1월 1일 풍납토성의 현대아파트 건설 현장에 들렀다. 신정 휴일이라 경비원이 없던 틈을 타 5m 깊이로 파헤친 공사장으로 내려갔다. 순간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놀랐다. BC 18년에 도읍을 정한 후 고구려의 공격으로 공주로 천도하던 475년까지의 한성 백제의 역사가 그곳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다. 지하 4-5m 사이에 묻혀 있는 토기와 유물들이 현몽하듯 눈앞에 나타난 광경에 전율한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유물을 주머니에 넣었다. 위치를 구분할 수 있도록 아래층 유물은 아래 주머니에, 위층의 유물은 윗주머니에 넣어 현장을 빠져 나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연락하여 공사 중지를 요청했다. 그로 인해 공사는 중지되고 풍납동 지하에 잠든 백제사는 서서히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언론이나 다른 발표지에서는 우연히 발견했다고 하지만 필자는 기적이라 지칭한다. 이것이 어찌 우연인가. 한 학자의 끈질긴 집념과 신념으로 이루어낸 기적과 같은 업적이 어찌 우연일 수 있는가. 이후 풍납동은 4만여 주민들의 재산권과 맞물려 보상문제로 극심한 대립을 보이다가 2,000년에는 주민이 포크레인으로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다행히 국민의 정부 시절 보상과 개발의 적절한 대책을 세워 풍납토성은 한성백제의 도읍지 위례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풍납토성은 발굴하면 할수록 백제의 도성임을 확증할 수 있는 유물과 유적들이 속속 드러났다. 려(呂)자형 집터와 불탄 나무기둥의 숯과 대부(大夫)라는 명문의 토기편은 물론 우물터(초기엔 목탑지라 했음)와 제물로 바친 듯한 말머리뼈 10여개가 나타났다. 려(呂)자형 건물은 큰 두 건물을 회랑처럼 작은 건물이 덧이은 건물형태로서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추정할 수 있는 유적이다. 거기에 숯 등은 탄소연대 측정결과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로 나타나 초기 백제시대와 일치한다. 더구나 한 두 개도 아닌 말의 머리뼈 10여개가 있다는 것은 사직과 종묘를 갖춘 조선시대 왕궁과 비슷하여 궁성지였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와 더불어 성벽 둘레에서 발굴한 해자(垓字)와 판축기법으로 3.5km나 쌓은 성벽은 강력한 왕권과 그에 동원할 만한 인력이 있어 가능한 유적이다. 판축기법은 양쪽에 판을 세운 후 채로 거른 흙을 시루떡 찌듯 한 겹 올려 다독이고, 다시 그 위에 또 한 겹 올려 다독여 쌓는 방법이다. 그렇게 쌓은 성은 돌로 쌓은 것보다 견고하며 지진에도 강하다. 1999년에 이 성벽을 잘라 조사해 본 결과 확실한 판축기법을 확인할 수 있었고 견고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하까지 파내려가 다져 쌓은 것을 확인했다. 아직도 학계에서는 충분한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발굴 조사한 그 어느 곳보다 한성백제의 도성이었음이 확실하다.
1996년 이형구박사가 실측한 성벽의 길이는 3.5km, 하부 넓이 40여m, 높이는 10m다. 도성이라면 적어도 이정도의 규모를 갖추어야 한다. 2km이내의 성벽으로는 규모가 작아 도성이라 하기에 부족하다. 풍납토성은 규모면에서도 도성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공주의 공산성과 부여의 사비성이 금강을 해자를 삼아 건축한 기법까지 비슷하여 백제 도성으로 비정하기에 용이하다.
올림픽으로 시작된 서울의 역사는 그렇게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의 발굴과 더불어 살아났다. 이제는 서울은 ‘정도 600년’의 역사가 아니라 당당히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라고 해야 한다. 교토는 50대 칸무천황이 794년에 천도하여 헤이안 시대를 연 후 1869년에 지금의 동경으로 천도하여 에도시대를 열기까지 1,075년간 일본의 수도역할을 하여 천년고도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이제 서울은 그것을 능가한다. 로마, 아테네, 서안, 이스탄불 등의 천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세계적인 도시와 견줄 수 있는 고도 중의 고도인 것이다.
홍수가 제공한 단서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 풍납토성의 서북벽이 무너지면서 금동제 허리띠 장식과 귀고리 등이 드러났다. 남쪽 성벽의 흙더미에서는 항아리 속에 담긴 청동 초두 2점이 나타나 성을 휩쓸어간 홍수가 백제 발굴의 단서를 제공했다. 초두는 삼발이 솥으로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술이나 액체를 끓이는 자루솥이라 하는 보는 고급용기다. 보물 622호로 지정된 신라 천마총의 초두는 주둥이가 작고 뚜껑이 있으나 백제의 초두는 뚜껑이 없고 주둥이의 지름이 무려 20.8cm로 넓으며 용문양의 긴 자루가 달려 있다. 이 유물에 주목한 일본의 학자 아유카이후사노신(鮎貝房之進)은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시대의 위례성이라는 획기적인 주장을 폈다. 그는 동경외국어대 조선어과 1회 졸업생으로서 조선의 문화재를 수집하여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할 만큼 문화재에 조예가 깊었다. 일본의 임나본부설에 의해 조선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삼국사기의 기록을 조작이라 부정하고, 백제의 설립을 3-4세기로 주장하던 식민사학자였다. 그런 그가 풍납토성의 유물을 본 후 1934년에 삼국사기의 기록을 인정하는 논리를 편 것이다. 삼국사기를 조작이라고 부정하던 사람이 그것을 번복하는 위례성을 인정했으니 획기적일 수밖에 없다. 조선총독부에서도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1936년에 풍납토성의 성벽과 그 내부 모두를 고적(古跡)으로 지정했다. 학자의 자존심이 걸린 모순된 주장을 내세울 만큼 풍납토성에 애착을 가졌던 아유카이후사노신의 주장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어도 백제는 더 일찍 완벽한 모습으로 부활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사학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방관하다가 1963년에 이르러서야 일제보다 못한 결정을 내렸다. 성벽만을 사적 11호로 지정하는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그 당시에 일제가 그랬던 것처럼 성 내부까지 사적에 포함했으면 1997년 이후 개발과 보존의 줄다리기에서 주민과의 대립은 물론 재산권 보호를 위한 엄청난 보상도 없었을 것이다.
이병도 박사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위례성의 보조성일 것이라며 풍납토성을 간과할 때 이형구 박사는 풍납토성이 분명한 위례성일 것이라는 확신으로 관심을 기울인 결과 땅 속에서 잠든 한성 백제의 역사를 깨워냈다. 그에 의해 긴 잠에서 깨어난 백제의 유물들을 문화재청에서는 이 지역에서 발굴해낸 다른 유물들과 함께 올림픽 공원에 건축 중인 ‘한성백제 박물관’에 전시할 예정이다. 박물관은 2011년 12월에 개관 예정이니 그 유물들을 자유롭게 볼 날이 기다려진다.
올림픽 대교와 백제의 참모습
한강 다리치고 반듯하지 않은 곳이 없다. 다리의 남단과 북단의 도로까지 반듯하게 연결하여 원활한 소통을 돕는 것이 다리 건축의 상식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동작대교는 미완의 다리다. 북단은 미군부대 때문에 기형적으로 좌우로만 연결되어 쭉 뻗지 못했고 남단도 국립현충원 때문에 좌측으로 굽어 있다. 동작대교에서 항상 최고속도로 달릴 수 있는 것도 북단에서 진입과 진출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동작대교가 그런 조건에 의해 굽거나 잘린 다리라면 올림픽 대교는 풍납토성 때문에 활처럼 휘고 남단이 일자로 뻗지 못했다. 원래 계획은 풍납토성의 서쪽 면을 가로질러 올림픽 공원 옆 8차로 도로와 연결하려 했으나 이형구 박사의 끈질긴 탄원으로 설계를 변경했다. 3,5km 풍납토성은 이미 주민들의 통행을 위한 도로에 잘리고 유실되어 2.1km밖에 남지 않았으나 그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유물은 지켜야 했다. 올림픽 대교와 연결된 반듯한 도로가 성벽과 성안을 관통하면 영원히 백제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에 관계당국을 설득하여 설계를 변경시킨 것이다. 그뿐 아니라 현대 아산중앙병원의 주차장도 지하에 두지 않도록 설득하여 땅을 파지 않게 했다. 혹시라도 그곳에 묻혀있을 유물을 잠든 상태로 보존하여 먼 훗날 후손과 인연이 닿으면 그들로 하여금 발굴케 하기 위함이었다.
풍납동(風)納洞)은 그 명칭부터 서늘하다. 어느 지명에 풍자를 바람 풍(風)으로 쓰는 곳이 있는가. 풍세, 풍양, 풍기 등 풍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모두 풍부할 풍(豊)자를 쓴다. 풍수적으로도 바람은 뒷산과 좌우의 산이 막아주고, 물은 마을 앞에서 내를 이루어 기를 지켜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풍납동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기본부터 어긋나며 물을 둥에 지고 있어 바람이 많고 지역이 낮아 물난리가 잦은 곳이다. 그래서 지명이 풍납토성으로 인하여 풍납동 즉 ‘바람들이골’이다. 그래서 풍납동은 성 밖 한강에서 거센 바람이 들어오는 고을이기에 성벽은 더 높고 견고해야 했다. 그곳에 사람이 살 때는 치수의 계획도 잘 세워졌으리라. 그러나 475년 고구려군에 의해 불탄 이후 최전방지역으로서 방치했던 성터라서 잦은 물난리에 토사가 쌓이고 쌓여 한성백제 시대의 유물들이 지하 5m에 갇혀버렸다. 불탄 숭례문은 600여년의 세월동안 토사와 도로공사 등으로 인해 1,6m나 묻혔으니 1,500년의 세월에 5m로 묻혔다는 것은 지형 변화로 보아 타당하다. 바람을 맞으며 살던 백제인, 치산치수에 능했을 그들이 남긴 백제는 이제 우리 곁에서 다시 당시의 삶을 말해주고 있다.
2003년 여름 강남문화원에서 이형구 박사를 초대하여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행사 후 도곡동의 매봉산을 같이 답사하면서 신념과도 같이 굳은 또 하나의 확신을 들었다. 삼성아파트 뒤의 배드민턴장 지하에 분명히 선사시대의 유물이 잠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 지역은 이미 숭실대 박물관에서 발굴한 상태지만 학자의 연구에 의한 예지와 집념으로 풍납토성의 기적을 낳은 것처럼 언젠가 또 한 번의 기적이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이형구 박사는 풍납토성의 유적을 발굴 과정에서 주민들로부터 감금당하기도 하고 현수막에 이름이 나부낄 만큼 기피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주민의 보상과 풍납토성을 보전에 최선을 다 한 학자적 소신과 용기에 머리가 수그려진다.
풍납토성을 거닐면 씁쓸한 영화 장면이 떠오른다. 박중훈, 정진영 주연의 ‘황산벌’이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를 해석하지 못해 해프닝이 벌어지는 코믹영화라고 하지만 이는 국민의 역사의식을 오해하게 하는 우를 범했다. 백제 군사는 전라도 사투리보다 오히려 충청도 사투리를 사용해야 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백제 하면 전라도를 연상하는데, 전라도의 백제는 무왕, 선화공주,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탑 등 극히 제한적이다. 고구려에 뿌리를 두고 한성(BC18-475)에서 493년 동안 터를 닦아 힘을 모은 후 충청도 공주(475-538)와 부여(538-660)에서 문화의 꽃을 피운 것이 백제다. 한양의 493년, 충청도의 160여년 역사를 어찌 그렇게 전라도라는 단순등식으로 영화화 할 수 있는가. 역사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급박한 전쟁 속에서도 여유 있게 느린 충청도 말씨를 코믹하게 연결했어도 극화하는 데는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 중에 논산의 황산벌은 전라북도 익산과 이웃해 있으므로 가끔 엉뚱한 전라도 사투리를 개입시켜 해프닝이 벌어지게 했으면 코믹에 역사의식을 더한 재미가 있었을 것이다. 설마 흥행을 지역성에 의존하려는 의도가 아니었기를 바라지만 아쉬움은 영화가 끝나고 스텝진을 자막으로 소개할 때 충청도 전라도와의 관계를 밝혀 백제의 참모습을 소개해줬더라면 하는 점이다.
강기옥
내외일보논설위원. 서초문인협회부회장.
화백문학편집위원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첫댓글 백제 왕궁터를 새롭게 조명한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요즈음 근초고왕 드라마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실감있게 읽었습니다.
풍납 토성은 백제 초기에 만들어진 타원형의 토성으로, 현재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지요. 주몽의 아들 유리가 부여에서 졸본으로 주몽을 찾아오자 비류와 온조 형제는 이를 피해 그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인천), 온조는 위례성(서울)에 자리를 잡았는데(기원전 18), 뒤에 비류의 세력이 온조의 세력에 흡수되었다고 하지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광진구쪽으로 가면 아차산성이 있는데 그 곳에서 백제 비운의 왕인 개로왕이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에 잡히어 처형되지요.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인 복수극이지요(그 외 다른 뜻도 있었음). 안타까울 뿐입니다. 뿌리는 하나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