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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전씨(潭陽田氏) 효자 전
*전득시(田得時)
(담양전씨(潭陽田氏) 시조(始祖) : 4세 때 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십 오 륙세가 되니 점점 학문이 높아지자 이름난 선생님을 찾아가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근처의 다른 성씨들의 청년들과 같이 학문을 연마한 중에서 매우 뛰어나 선생님의 칭찬을 한몸에 받았고 친구들의 부러움을 독차지 했다.
부모에게도 효성이 지극하여 근동의 아녀자들의 입길에 올라 딸을 가진 집안들이 속으로 탐을 내 매파(媒婆)들이 자주 드나들기도 했다. 가문이 부유하니 문전에 손님들이 장꾼같이 모여들었고 친불친(親不親)을 따지지 않고 모두다 공손히 접대하고 문밖까지 따라나가 전송(餞送)하니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소문이 입으로 입으로 전해져 멀리 개경에 사는 왕족들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어느날 임금하고 가까운 사람이 담양에 내려가 조용히 염탐을 하고 손님을 가장하고 田씨 집을 찾아가 하룻밤을 자면서 이야기를 해보니 효도는 물론 학문이 뛰어나기가 조정 안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도 따라가기가 어려워 보였다. 그 왕족이 개경에 돌아가 공의 행동거지를 자세히 임금에게 전하니 임금이 듣고 "德이 있는 자가 호장을 맡아 백성들을 다스려야 임금의 인정(仁政)이 방방곡곡에 고루고루 퍼져 원성을 가진 백성들이 감화(感化)될 수가 있다." 하고 공을 戶長-고을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으로 임명하였다.
*전좌명(田佐命, 1424년 ∼ 1521년) :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온 몸을 쓰지 못하고 병상에 누운 지 7년이나 되었는데, 늘 자기가 약을 달이고 몸소 오줌 그릇을 받들었으며, 어머니가 죽으매 무덤을 지켰다. 이후에 또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와 합장(合葬)하고 4년 동안 여막에 살았으며, 상기(喪期)를 마쳤는데도 떠나지 않았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법을 들어서 개유(開諭)했으나, 또 3월 동안을 머물러 있으면서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전한다. 1432년(세종 14)에 예조에서 효행 있는 자에게 정문(旌門)을 세우고 서용(敍用)토록 아뢴 바 있다. 경북 구미에는 전좌명 효자 정려각(田佐命孝子旌閭閣)과 무이재(武夷齋)가 있다.
*전내적(田乃績, 1599년 ∼ 1655년) : 조선 후기의 문신·효자.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공복(公復), 호는 석포(石浦). 부사 전득시(田得時)의 후손이다. 어릴 때부터 스승을 따라 외지에서 생장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어버이가 있는 곳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소학》과 《심경 心經》 등을 애독하였다. 평시에 항상 조용히 정숙하게 앉아서 글을 읽었으며 함부로 웃지 않았다. 어버이가 중병에 걸리니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기도 하였으며, 밤마다 향을 사르며 어버이의 죽음을 대신하기를 하늘에 빌었다. 효행으로 1652년(효종 3)에 서빙고별검(西氷庫別檢)으로 천거되었다.
*전만석(田萬石) - 1646년(인조 병술)11월 20일 출생 하여 1711년 11월 29일 향년 66세로 서거하였다 소종가에서 대종가에 이어 선조의 제사 받드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고 자손들에게도 “효도하고 근신하는 것이 가훈(家訓)이니 잘 받들어 소홀이 하지 말라”고 늘 일렀다.
효를 실천하며 집안에서 오직 경서(經書)를 읽으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고 매우 부유(富裕)하였으나 전답(田畓)을 늘리기를 권해도 듣지 않고 가난한 이를 구제하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가엽게 여겨 돕는데 늘 힘을 썼다.
*전시혁(田始赫,1697 - 1742) : 부호군(副護軍). 字는 대경(大卿). 본관은 담양(潭陽). 장기현감으로 있을 때에 흉년을 당하자 양곡 260여석을 내놓아 백성들을 구제한 공으로 감사(監司) 유척기(兪拓基)가 계문함으로써 유지(諭旨)와 마필(馬匹)을 하받 았다. 임술 5월에 4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는데 남당 한원진이 조만에서 「功各奉爲親」이라 한 것은 평일에 그의 효행을 말한 것이다.
*전한노(田漢老) (시조(始祖)전득시(田得時) 9세 손)
성품이 뛰어났고 효도가 지극하여 겨우 9세에 아버지가 痢疾로 설사를 하자 분(糞)을 맛보고 서거하시자 소금에 절인 채소를 삼년이나 먹지 않았고 여묘살이를 했고 13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똑같이 했다. 임금이 듣고 그런 연고로 군적에 올려 급료를 주고 위로 했다. 임금이 석성에 효자문을 세우게 하고 여지승람과 삼강행실록에도 기록되었다.
*전시원(田始元)(경은(祖生)공의 12세손)은 1730년2월12일(54세 영조 6년) 田始元은 한양과 시골을 오가며 살았는데 노부모가 계시기 때문이었고 타지방으로 관직을 제수 받으면 사직하는 일이 많은 것도 부모가 고령이므로 모시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 특별 배려로 고향인 홍주영장(洪州營將)으로 제수하여 나간 것도 부모를 가까이 모실 수 있는 이유였는데 다음해인 1731년(55세)10월 12일에 서거하였다. 공은 효심이 지극하여 생양가(生養家)부모가 돌아가시면 몸을 돌보지 않았고 9년간 상중(喪中)에 있었으며 生父인 監察공의 상(喪)을 당해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몸이 지쳐 병이 나서 회복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전천상(田天祥)의 재취 숙부인은 열녀 廣州 李씨, 父 洽, 1723년 12월 15일 生, 19세의 나이로 공에게 시집을 와 10년을 살았는데 남편이 병이 나자 정성을 대해 간호를 했으나 끝내 상(喪)을 당하였다. 당시 시어머니 貞夫人은 큰아들인 자천(紫泉)공이 춘천부사로 재임 중이어서 춘천관아(春川官衙)에 계셨는데 비보를 듣고 사람을 보내어 너그러운 위로와 훈계를 전했는데, 숙부인 광주 李씨는 도리어 시어머니를 위로와 감사의 편지를 전하여 위 어른을 안심시키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6월 7일 장례를 마친 후 입에 곡물을 끊고 지내다 끝내 슬픔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1751년 7월 2일 향년 29세로 남편을 따라 순절(殉節)하였다. 무육(撫育), 순찰사의 장계로 5년이 지난 1756년 5월 朝廷에서 烈女로 표창하여 홍성군 은하면 대율리 노변에 열여각(烈女閣)이 있다.
*전은상(田殷祥) 은 성품이 엄하면서도 따뜻하고 정신이 담백(淡白)했으며, 과거에 합격하던 다음 해에 母夫人이 서거하자 奉養을 못한 것을 평생 한으로 여겼으며, 엄군(嚴君-아버지)이 집에 계실 때는 먼 지방의 고을 수령(守令)으로 나가서도 여러 차례 돌아와 안후를 살폈고, 선비(先妣-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늘 소박한 살림으로 명주 1척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며 子孫들을 훈계하며, 조복(朝服) 이외는 비단옷을 평생토록 입지 않았고 늙어 죽을 때가지 부모를 그리는 정이 변함없어 듣고 보는 이들이 감탄하였다.
*전광국(田光國)(紫泉공의 次子)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 貞夫人이 적리(赤痢)에 걸려 자리에 눕자 손수 병을 간호하다가 母夫人은 회생을 하였으나 공이 전염이 되어 안타깝게도 서거하고 말았다. 공은 연경을 다녀와선 연경일기(燕京日記)를, 일본을 다녀와선 도해일기(渡海日記)를 남겼고, 또 시집 1권과 화첩 1권이 전한다.
공의 번역된 詩에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를 편안케 못하고/ 충성은 도리어 임금을 저버리는 것 같도다./ 쓸쓸한 객관 삼경 달밤에/ 누워서 바람소리 듣고 낙양을 생각한다./ 종일토록 돗자리 깔고 누웠으니/ 녹음 속에 매미소리 요란하구나!/ 북창에 때때
로 서늘한 바람 불어오니/ 상고 의황의 뜻에 부끄러움이 없어라.
*전의현(田義顯)(紫泉공의 손자)은 통정대부(정3품)로 승진하여, 三水부사로 임명 되었으나 어머니가 연로하여 나가지 않음, 임금의 특교로 1791년6월24일 통정대부행陽德현감으로 나감(有교지), 이 때 임금이 너희 형제가 같이 西邑으로 부임하여 老母를 봉양하게 되었으니 효자라고 말하였고, 또 궁중 잔치가 있을 때는 종이와 노끈을 주고 음식을 老親에게 내려 효로써 다스리는 임금의 뜻을 펴기도 하였다.
*전응주(田應周) 는 23세 때 드디어 사마시(司馬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를 하니, 祖와 父를 이어 3대가 내리 司馬試에 합격을 하여 집안에 큰 경사가 났으나, 어찌된 일인지 더는 청운(靑雲)의 꿈을 접고 집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극진한 효도로 부모를 모시어 근동에 모범을 보이니, 1810년(29세)에는 효도로 유림(儒林)의 추천을 받았으며, 1822년(41세)에는 또 수천(繡薦-수놓은 옷을 받는 추천)을 받았는데 “성품이 본디 깨끗하여 절조 있는 행동과 검소함이 몸에 배어 맑은 덕(德)이 흐르는 군자”라고 하였다.
공은 1828년(47세)에는 향교 유림(儒林)의 추천을 받았고, 1831년 (50세)에 禮曺에서 또 다시 추천을 하였는데 “효도하고 친족 간에 화목하고, 이웃을 사랑함이 하늘에서 나온 것 같다.”고 하였으나 끝내 관직에 나기기를 고사하였다
*전경은(田慶殷) 은 신체가 健壯하고 性度가 곧았으며 효도로 부모를 극진히 모시었고, 형제간에 우애에 힘쓰며 자식을 교육하는 데는 엄명하였고 손님을 접대함에는 온화하고 공손했고, 아버지 영장공의 청백하심을 집안에 전수하고 잊지 않도록 힘을 쓰며 형이 먼저 세상을 뜨자 형수와 어린조카를 정성 것 돌보며 祭祀를 받들고 先塋을 보살핌이 한결같았으며 농사가 풍부하고 뽕나무를 심어 명주를 짜도 衣食에 사치함이 없었다.
전홍진(田泓鎭)( 28대 손 전병기(田炳基) 의 증조부 )은 1855년 2월 23일 生, 1894년 4월 21일 40세 卒, 큰아버지의 뒤를 이었는데 자식으로 부족한 것을 뉘우치고 제삿날이 돌아오면 제수를 만드는데 정성을 다해 정결하게 하였으며, 孝로써 본 부모를 공양하였다. 집안 형세가 어려웠으나 나무를 베고 밭을 갈아 궁핍하지 않게 음식을 제공하고 날이 저물면 부모 잠자리 보살피기를 小學 편에 나오는 구절을 상기하듯 행하였고, 병이 나 약으로 효험을 보지 못하자 3일을 기도하니 하늘이 감동하여 약을 구하러 나갔다가 호랑이가 업어다 주는 기이한 일도 있었으며 급기야 喪을 당하여 슬퍼하는 가운데도 禮로서 하며, 부모가 80에 접어들자 늘 곁에서 지키며 반찬과 약으로 지극히 정성을 다 하였다. 1891년 10월 달에 부모가 병이 나 수박을 원했으나 철이 지나 구하기가 어려웠으나 하늘에 부르짖고 탄식을 하니, 꿈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지시를 하여 가서 보니 과연 수박이 있었는데 제철에 난 것과 같았으며 그것을 가져다가 대접하니 주변에서 효자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重齋 溶稶공 見之) 부모가 목에서 가래침이 나오면 그것을 혀로 맛을 보며, 병이 나면 똥을 맛보아 단지, 쓴지를 시험하였고 급기야 돌아가시자 몸을 돌보지 않고 애통하여 기력이 쇄하기도 하였으며, 집과 묘소가 조금 멀었으나 풍우상설(風雨霜雪)을 혜치고 조석으로 산소에 가서 곡을 하니 어느 날은 저물었는데 큰 호랑이가 길을 인도하기도 하였다.
-출처 및 참조 :담양전씨 대동보
담양전씨 운경가족 Daum 카페
전민 문학촌
전양진(田穰鎭) 1872년 5월 1일 生, 1943년 7월 24일 향년 73세 卒 신체가 雄大하고 언변(言辯)이 호쾌(豪快)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닦아 앉게 하였으나, 부모 앞에서는 공손하여 음성이 작고 더디게 나왔으며, 父母가 늘 입가에 미소를 짓고 화평한 가운데 거처하게 보살펴 효도함이 극진하였다. 때가 어지러워 일본의 침략행위를 보고 비분강개하여 뜻을 같이 하는 들을 모우고 170여인과 모의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여 보낸 일로 옥고를 치렀으나 끝내 의지를 굽히지 않았으며, 애석하게도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다.
출처 및 참조 : 담양전씨 대동보
담양전씨 경은파 약기|작성자 전성배
효부 담양 전씨 지비
성은 전(田)씨요 관향(貫鄕)은 담양(潭陽)이며 문원공(文元公) 경은선생(耕隱先生) 조생(祖生)의 후손이요. 면양(勉穰)의 딸이다.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기질이 있어서 맑고 삼감을 몸가짐으로 하였다.진미(珍味)가 있으면 부모에게 주어서 먹였고 간수했다가 다시 나누어주었다. 나이 열여덟에 의령 남상희(南尙熙)에게 시집갔는데 남상희는 곧 추계선생(秋溪先生) 진(振)의 후손이요 치련(致連)의 아들이다. 시집가니 시아버지는 이미 죽어 시아버지의 섬김을 얻지 못한 것이 지극한 한이 되었다. 날마다 지극한 정성으로 시어머니를 섬겼고 남편의 전처인 하씨는 자녀를 두지 못하고서 일찍 죽었는데 제사는 반드시 깨끗하게 치렀다.
나이 스물넷에 남편이 병을 만나 죽으니 통곡하고 가슴 치며 기절하여 구원에 힘입어서 갱생하였다. 그러고서 후회하며 가로되 내가 어찌 차마 늙은 시어머니를 거듭 상심케하겠나 하고 곧 슬픔을 숨기고서 감히 문물을 흘리지 아니하였다. 집이 본래 가난하여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워서 김매고 나무하고 하여 낮에는 길쌈에 맡겨 베짜고 밤에는 입에 맞는 음식과 몸을 편히 하는데 일로 삼아서 시어머니에게 빠뜨림 없이 하였다. 시어머니가 오래도록 학질(瘧疾)에 걸렸는데 다른 음식은 즐김이 없고 생미꾸라지 즙을 원하였다.
때는 추워서 구하기 어려웠지만 얼음을 깨어 진흙을 파서 이어드렸고 사람의 살점이 학질을 낫게 한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허벅지를 베어서 달여 드리니 마침내 차도를 얻었다.
고을과 마을에서 모두 탄식하며 지극한 효도라 일컬고 술과 안주를 갖추어서 노고를 상주려 하니 굳이 물리치며 가로되 늙은 시어머니로 하여금 단맛도 빠뜨리고 병에도 걸리게 한 허물이 나에게 있고 잘 봉양하지 못한 죄 속죄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감히 외람되게 이를 받겠나 하고 마침내 듣지 아니하였다. 시어머니가 죽음에 이르러서 부신(附身:시체에 입히는 옷과 널 등)을 능히 유감없게 하고 피눈물로 울며 삼년상을 넘겼다. 이때 고을의 인사(人士)가 그의 행장(行狀)으로써 고을에 드러내려 하였으나 마침 국가가 위태롭고 어지러워 임금에게 들림을 얻지 못했다.
아깝도다! 유인이여 병신(丙申)년에 태어나서 을묘(乙卯)년에 죽으니 향년이 여든이라 다만 딸만 길렀으니 친족 아들 상주(相周)로써 후사(後嗣)로 삼았다. 상희(尙熙) 재종 두희(斗熙) 락희(洛熙)가 지극한 행함이 빠질까 두려워서 장차 그 행적을 돌에 실을 재, 행장(行狀)을 안고서 명(銘)을 청한 자는 상해(相海), 상중(相重)이었다. 새겨 가로되 담양전씨의 유인은 어질고 곧고 맑은 자질이라 효도와 열녀를 온전히 하였네. 얼음을 깨어서 미꾸라지 구하여 이바지하기를 반드시 경건히 하였고 허벅지를 베어드리니 학질이 낳았다. 돌에 새김이 천추토록 밝아 오리니 마침내 삼강오륜이 떨어지지 아니할 진저.
출처 및 참조
의령충효열록(상)-의령문화원(20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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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순(金輔淳)의 처(妻) 담양전씨(潭陽田氏)
김보순의 자(字)는 의집(義執)이다. 1861년(철종 12)에 태어나 1907년(순종 1)에 사망하였다. 부모를 봉양함에 두 사람이 똑같은 마음으로 합심하여 있는 힘을 다하였다. 특히 할아버지 감찰공(監察公) 김장옥(金章玉)이 효행(孝行)으로 탁월한 행적을 남겼는데도 부부의 효행이 세상이 널리 알려지지 않자, 김보순은 그 사실을 격쟁(擊錚)까지 하여 임금님에게 알려드림으로써 마침내 할아버지 김장옥의 정려가 세워지게 되었다. 김보순과 처 담양전씨의 효행이 탁월하자 개인이 비용을 들이고 고을의 협조를 얻어 1878년(고종 15)에 김보순과 처 담양 전씨의 정려가 세워졌는데, 이때 세워진 정려가 지금도 군산시 옥산면 쌍봉리 북내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다.
출처 및 참조 : 담양전씨 경은파 약기|작성자 전성배
* 울진 담양전씨 열녀
담양전씨는 전재남(田在南)의 딸이자 신안주씨(新安朱氏) 주진구의 처로,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출가 후에는 시부모와 남편을 극진히 섬겼다. 중병에 걸린 남편이 지극한 간호에도 세상을 떠나자 식음을 전폐하다가 17일 후 남편의 뒤를 따랐다.
1931년 10월 열녀 담양전씨(潭陽田氏)를 기리기 위하여 비를 건립하였다. 경상북도 울진군 원남면 금매리 국도 7호선 도로변에 있다. 단칸 규모의 맞배지붕 기와 건물이다. 안에는 높이 1미터의 비석이 놓여 있는데, 앞면에 열녀주진구처전씨지려(烈女朱鎭九妻田氏之閭)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출처 및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울진 담양전씨 열녀비각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