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숙이네신문 2002/11/1(금) 09:18 (MSIE5.01,Windows98) 211.173.9.18 1024x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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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남원윤씨 판관공파
忠簡公에서 寄氏夫人까지 (객관적인 서술을 위해서 忌諱를 하지 않음)
1392년 7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었다. 그러나 새 나라인 조선의 개창을 반대 하고 끝가지 고려에 충성 을 다 하려는 유신(遺臣)들이 있었다. 윤황(尹璜)도 바로 그중의 한사람이었다. 남원윤씨 시조인 윤위(尹威)의 6세손이요 선계(先系), 파평윤씨 시조인 태사공(太師公) 윤신달(尹莘達)의 13세손이다.
당시의 최고 행정관청인 문하부(門下府)의 문하평리(門下評理. 종2품) 벼슬에 있던 그는 스스로 후송(後松)이란 호를 짓고 송악 산으로 몸을 숨겼다. 일찌기 고려삼은(高麗三隱)으로 알려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 周)와 목은(牧隱) 이색(李穡),야은(冶隱) 길재(吉再)와도 교유를 했 고 후에 조선조 3대 임금이된 태종 이방원(李芳遠)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에 의해 피살 되었고 이색은 인재를 아낀 태조가 한산백(韓山伯)을 책봉했지만 사양하고 여강 (麗江)으로 가다가 신병으로 죽었다. 또한 길재는 현재의 구미시인 고향 선주(善州)로 돌아가 홀어머 니를 봉양 하면서 역시 초야에 은거 하고 있었다.
왕자의 난으로 정종(定宗)이 왕위에 오르고 세자로 책봉된 이방 원은 삼군부에 영을 내려 길재를 찾아 냈다. 길재가 역마를 타고 서울에 올라오니 세자는 임금에게 아뢰어 이미 국가의 제사, 시호(諡號), 교악(敎樂)등을 맡아보는 봉상박사 (奉常博士)를 제수해놓고 있었다.
길재는 간곡히 사양 했다. "여자는 두 남편이 없고 신하는 두 임금이 없다고 했습니다. 빌 건대 전리(田里)로 돌아가 효도로 늙은 어미를 봉양하며 남은 여 생을 바치게 해 주옵소서" 세자는 "잠저(潛邸)에 있을 때 동문수학한 정으로 불러 올렸지만 의리상 뜻을 빼앗을수는 없구나" 한탄 하면서 길재를 돌려 보냈다.
조선의 제3대 왕으로 등극한 태종은 윤황을 찾았다. 그러나 윤황은 시골 사람의 옷 그대로 임금 앞에서 공손히 읍만 할뿐 절을 하지 않았다. (이 친구 역시 죽어도 절개를 굽히지 않겠구나) 태종은 오히려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더 이상 출사를 강요하지 못했다.
그러든 어느날, 고려의 충신이었던 김제(金濟)가 세상을 떠났다. 대관들이 그 시호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태종이 입을 열었다. "옛 전서 윤황이나 장령(掌令) 서견(徐甄)같은 사람은 아직도 일 성(日星)처럼 빛나는 의리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으니 그들이 죽으면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내릴 것이다"
1418년 8월 태종은 왕세자인 세종에게 선위를 하고 태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동안 당진 해안으로 낙향 하여 선주에 있는 야은 길재와 교유 하면서 학문을 벗 삼아 살던 윤황은 1419년 봄에 길재의 부음을 전해 듣고 통곡 했다. 1422년 5월에 태상왕이던 태종마저 세상을 떠났다. '윤황이 죽으면 시장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내릴것'이라던 그 임금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후 윤황도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세종은 선대의 유훈을 바뜰어 즉시 충간(忠簡)이란 시호를 내리고 장례를 돌보게 했으며 서산 송곡서원(松谷書院)에 배향, 향사를 바뜰게 했다. 그만큼 공명을 뜬 구름처럼 아는 맑은 풍도와 높은 절개로 평생 을 일관해온 윤황에 대해서 세종도 늘 흠선(欽羨)의 정을 느껴 왔 던 것이다. 그의 묘소는 현재 충남 당진군 송악면 공정리에 있다.
윤황은 아들 4형제를 두었고 이들은 모두 벼슬길에 올랐다. 큰아들 윤덕생(尹德生)은 서산군수를 거쳐 판서에 이르렀고 둘 째 아들인 윤예생(尹禮生)은 대사성 도승지, 세째인 윤규(尹奎)는 판사, 넷째인 윤임(尹臨)은 함길도(咸吉道) 관찰사(觀察使)를 역임 했다.
이들 4형제중 막내인 윤임의 자손들이 가장 영귀(榮貴)했다. 태종조에 출사하여 세종조(世宗朝)에 이르기까지 두 임금의 신임 을 얻어 성주목사(星州牧使), 제주도도안무사(濟州道都按撫使), 형 조참의를 거쳐 경기도관찰사, 함길도 관찰사에 이른 윤임은 거기 서 파직을 당했는데 그 사유는 이렇다.
길주 사람으로 이진언(李珍彦)이란 자가 있었는데 도망간 노비로 의심을 받자 엉뚱한 소리를 하고 다녔다. '태조 이성계가 아직 귀하게 되기전에 양가집 규수인 관지(管知) 라는 여자를 사랑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자기가 바로 그 아들'이라 고 떠들고 다닌 것이다. 거기다가 한술 더 뜨느라고 최윤옥(崔允玉)이란자가 이모지(李毛 知)란 이름으로 '자기는 이진언의 아들이며 태조대왕의 손자'라고 떠들고 다녔다. 왕조에 대한 불경이요 민심의 이반(離反)을 초래 하는 엄청난 사 건이었다. 윤임은 즉각 이들을 체포하여 올리니 곧 의금부에 이첩 되었고 삼성(三省)이 함께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이진언은 백성 이송(李松)의 아들이었고 최윤옥은 이진 언의 누이의 아들임이 밝혀졌다. 대역죄인으로 두 사람이 처형 되었음은 물론이다. 세종 2년(1420년) 10월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다음달인 11월 21일 '죄 없는 백성을 죄 주었 다'는 탄핵을 받아 윤임이 파직되는 결과를 낳았다. 붕당정치(朋黨 政治)의 또 다른 폐해(弊害)였다.
그러나 세종 5년(1423년)에 윤임은 판공주목사(判公州牧事)로 다 시 벼슬길에 올랐고 세종9년(1427년)에는 국방을 담당하던 중, 좌, 우 삼군중 중군 총제로 중용 되었다. 종 1품 재신(宰臣)만이 등용 되는 자리였다.
또한 윤임의 자손들이 가장 영귀 한데는 그럴듯한 일화가 전해 져 내려 온다. 윤임은 6형제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다섯째인 윤지득(尹之得= 奉事公)의 부인 행주기씨(幸州奇氏)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씨부인은 여말(麗末)의 공조전서(工曹典書)였던 기면(奇勉)의 딸이었다. 원(元)나라의 궁녀로 들어가 순제(順帝)의 총애를 받았고 자신의 소생인 황태자(昭宗)가 왕위에 오른 기황후(寄皇后)의 집안이었으 니 명문중의 명문이요 당대의 세도 집안이었다. 그런데 시집 온지 얼마 안되어 남편 윤지득이 세상을 떠나자 기 씨부인은 청상과부의 몸으로 현재의 (현주소삽입)인 고양(高揚) 사근동의 친정에와서 머믈게 되었다. 당시 기씨 부인의 뱃속에는 유복자가 자라고 있었다.
친정에 와서 얼마 안됐을 때 기씨 부인은 다시 친정 아버지 상 을 당하게 되었다. 이름있는 집안인지라 지관들이 불려 오고 마침내 명당이라는 묘 자리가 마련 되었다.
장례를 모시기 하루 전날밤이었다. 기씨 부인은 아무도 모르게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가지고 산으 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묘를 쓰기 위해서 파놓은 구덩이에 연신 물을 길어다 가 부었다. 중간에다가 물을 엎지르면 흔적이 날세라 조심 조심 물을 날랐고 금새 물이 땅속으로 스며 들기 때문에 같은 일을 밤 이 새도록 반복 해야만 했다. 다음날 아침 묘자리를 둘러본 상주들은 그야말로 망지소조(芒知 所措), 초상집이 발칵 뒤집혔다. 물이 나는 구덩이에 어떻게 묘를 쓸수 있겠는가? 부랴부랴 다른 곳에 다시 묘자리를 잡아 장례를 치룰 수밖에 없었다.
장례를 치른지 얼마후에 장녀였던 기씨 부인은 조심스럽게 남동 생을 불렀다. "아무래도 윤서방 묘자리가 너무 허술해서 마음에 걸리는구나. 어 차피 물이나서 못쓰는 묘자리라니 윤서방 묘를 그리 이장 하면 안되겠니?" 남동생은 펄쩍 뛰었다. "아니 윤가네두 선산이 있는데 왜 처가집 산으로 옵니까? 말두 안돼요" 그러나 청상의 누님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고 있던 남동생은 기 씨부인의 간절한 소원을 끝까지 마다 할수가 없었다. 남동생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씨부인은 당장 남편의 묘를 이장 했고 얼마후에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오늘날 1만4천여 종인들을 결집시킨 판관공파(判官公 派) 파조(派祖)인 윤은(尹 )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기씨부인의 기지로 친정 아버지의 묘자리를 뺏은 덕분에 애당초 뱃속에 들은게 딸이었는데 명당의 기운으로 아들이 되었고 그 자손들의 영귀가 대대로 이어져 왔다고 전한다. 지금도 윤지득과 기씨 부인의 묘는 행주기씨의 선산인 (현주소) 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기회에 한가지 첨언(添言) 하고 싶은 것은 충간공 윤황의 신 도비 내용이다. 효종2년인 1651년(永曆五)에 신익균(申益均)의 근찬(謹撰)으로 세 워진 이 비는 조선조 2대왕인 정종(定宗)을 정종(正宗)으로 잘못 기재 하고 있다. 또 문맥을 보면 정종이 태종 보다 위인데 '정종 (正宗)이 정사년(丁巳年)에 이르러 호종 선비들이 공론을 이르켜 서산 송곡 향사에 배향'을 했다던지 '정종(正宗)이 어제 축문을 내 리어 제사를 도았다' 등등의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한 정종은 기묘년(己卯年)에 등극하여 다음해인 경진년(庚辰 年)11월에 세제(世弟)인 방원에게 선위를 했기 때문에 재위 기간 에 정사년은 없다. 물론 태종조에도 정사년은 없고 세종(世宗)19년(1437년)이 바로 정사년이다. 충간공이 중군 총제로 임명된 10년후이니 신도비의 정종(正宗)은 글자도 틀렸지만 세종의 오기(誤記)가 아닌가 생각 된다. 그래야 '양조(兩朝=두 임금)의 포창 한바가 실상 천리(天理) 를 밝히고 인심을 맑히는 성인(聖人=임금)의 마음에서 나는것이 니...' 하는 다음 구절이 맞는다.
또 하나, 1979년에 간행된 남원윤씨대동세보(南原尹인氏大同世 譜), 윤황의 방서란(旁書欄)에 보면 "정종무오9월6일인(正宗戊午九 月六日因)이라고 나온다. 과문(寡聞)해서 인(因)이란 뜻을 알수가 없다. 그것이 타계한 날 을 의미 한다면 말이 안된다. 정종은 세종의 오기(誤記)임이 분명 하지만 무오년(戊午年)의 바로 전(前)해가 정사년(丁巳年)이다. 이 미 정사년에 어제축문(御製祝文)을 하사 했는데 다음해인 무오년 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닌가?
칭구: 아 ! 글쿤요.. 오랫동안 잊고 살아구먼요..자아알~~ 보았슴당. --[03/20-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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