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4:11-24, 야빈과 시스라를 굴복시키신 하나님, 22.12.14, 박홍섭 목사
에훗이 죽자 이스라엘은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습니다(1). 사사기에 나오는 네 번째 악순환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150여 년 전 여호수아가 점령하고 불태웠던 하솔의 야빈에게 이스라엘을 넘겨주어 그들의 압제를 징벌로 내립니다. 야빈은 그의 군대장관 시스라가 이끄는 철 병거 900대의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학대하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로로 다니지 못하고 오솔길로만 숨어서 다닐 정도로 심히 고통스러웠습니다. 고통 가운데 이스라엘이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는 여 사사 드보라입니다. 그녀는 종려나무 아래 거하면서 재판을 주관했으며 바락(번개)을 불러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싸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바락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만한 믿음을 가진 인물이 아니어서 드보라가 함께 가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불순종합니다(8).
결국 드보라가 함께 가지만 이 불순종과 주저함 때문에 바락은 적장을 죽이는 승리의 영광을 이방 여인 야엘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락이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이끌고 다볼 산으로 가자 이 소식을 들은 하솔의 군대 장관 시스라도 움직입니다. 철 병거 900대를 거느리고 기손 강가로 모인 강한 시스라의 군대 앞에서 바락의 군대는 초라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드보라는 바락에게 단호하게 여호와께서 오늘 너보다 앞서가셔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주실 것이니 일어나라고 명령하고 바락은 만 명을 거느리고 시스라의 군대가 있는 기손 강으로 내려갑니다.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4:15-16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이깁니다. 그 승리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군대를 혼란에 빠트리고 무력하게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거기 무엇이 강조되어 있습니까? “여호와께서”와 “바락 앞에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바락 앞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시스라와 그의 철병거와 군대들을 물리치시는지를 똑똑히 보여주셨습니다. 왜 바락 앞에서일까요? 바락이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드보라를 통해 이들을 기손 강가에서 무찌르겠다고 하신 말씀대로 바락 앞에서 철병거 900승을 앞세운 막강한 시스라의 군대를 물리치고 기적적인 승리를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스라의 군대를 바락 앞에서 칼날로 혼란에 빠트렸다고 했는데 그 구체적인 방법은 언급되지 않아서 모릅니다. 그러나 5장에 나오는 드보라의 노래를 유추해보면 갑작스러운 폭우가 혼란의 원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건기입니다. 그래서 시스라는 주저 없이 기손 강가로 철병거 부대를 집결시켰습니다. 그러나 건기와 우기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건기에 갑작스러운 폭우를 쏟아부으시니 기손 강은 흙탕물로 넘쳐났고 시스라의 철 병거 군대는 그 폭우와 흙탕물 속에서 혼란에 빠져 갈팡질팡하다가 자중지란으로 침몰하고 맙니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전쟁을 치르기에 불가능한 환경이 되자 극도의 혼란에 빠진 시스라와 그의 군대가 황급하게 도망갔고 바락은 그들을 뒤쫓아 갑니다. 그렇게 하로셋학고임에 이른 바락이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16절입니다. “바락이 그의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하로셋학고임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더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망친 시스라의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칼은 하나님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칼이 무엇으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났는지 언급하지 않아서 모르지만, 그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기를 주저했던 바락에게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나아가면 이런 기적적인 승리가 준비되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주저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주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순종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신 예상 밖의 승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됩니까? 적장 시스라는 모든 군대를 잃고 혼자 걸어서 도망치다가 동맹 관계인 겐 사람 헤벨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철병거 900승의 기세를 믿고 그토록 기고만장했던 시스라의 모습을 보십시오. 원래 대장은 군대와 자신의 운명을 같이합니다. 무릇 장수라면 전쟁터에서 죽어야 합니다. 군대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입니다. 장수가 싸움에서 패하여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명예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스라는 비겁하게 모든 군대를 죽이고 자신만 도망쳐서 사는 길을 택합니다. 부하들은 다 죽어도 자기를 살겠다고 줄행랑을 치는 이 모습에서 장수의 위엄이나 대장의 권위를 찾아볼 수 있습니까?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어주는 모습과 얼마나 다릅니까? 어떤 대장을 따르는지에 따라 부하들의 운명이 갈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따르는 성도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나를 살리고 대신 죽으신 우리의 대장이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승리한 영적 싸움의 영광을 나누어주시기 위해서 남은 전쟁을 감당하라고 하실 때 외면하지 않고 잘 따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 이야기의 핵심적인 스토리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망친 적장 시스라를 잡아 죽이는 영광을 바락이 아니라 이방 여인 야엘에게 주십니다. 야엘은 자신의 집으로 도망온 시스라를 환대하여 그를 안심시킨 뒤 잠들게 합니다. 그리고는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 다가가 그의 관자놀이에 장막의 말뚝을 박아서 죽입니다. 바락은 시스라가 야엘의 손에 죽은 뒤 뒤늦게 도착해서 이 모든 것을 볼 뿐입니다. 고대 전쟁에서 적장을 죽이는 일은 엄청난 영광입니다. 시스라의 군대를 전멸시킨 바락의 영광보다 그 군대의 지휘관인 시스라를 제거한 야엘의 영광이 훨씬 큽니다. 그렇다면 자기 눈앞에서 관자놀이에 말뚝이 박혀 죽은 시스라를 본 바락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여호와께서 이방 여인의 손에 시스라를 파실 것이기 때문에 너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던 드보라의 말이 말뚝처럼 뇌리에 박히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오늘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또 악을 행한 이스라엘의 행악은 점점 깊어가지만 이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도 점점 깊어갑니다. 바락과 이스라엘 만 명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 사사 드보라와 이방 여인 야엘을 사용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와같이 이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하나님이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에 굴복하게 하셨습니다. 드보라도 아니고 바락도 아니고 야엘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흔히 사사기를 나선형 구조라고 말합니다. 갈수록 이스라엘의 악이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사기가 강조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악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타락과 부패와 죄악이 깊어질수록 이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더 깊어집니다. 지금은 만 명을 동원하셨습니다. 나중에 기드온 때는 모인 군사를 다 돌려보내고 300명만 남겨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삼손 때는 삼손 하나만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이야기입니다. 특히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 죽인 야엘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닙니다. 이방 여인입니다. 본문은 야엘이 이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하였다는 언급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야빈과 화친 조약을 맺고 있어서 시스라가 완전히 믿을 만큼 야빈 왕과 가까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방 여인 야엘도 사용하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쓰임 받을 수 있을까?”라고 하지 마십시오. 누구라도 사용하실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문제는 믿음이고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잘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