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정글 탐험
“아, 동수형! 벌써 와 있었네.”
동철이가 건물 입구에서 기다리는 형한테 달려갔다. 형이 동철이를 꼭 안아서 들었다 놓았다.
지나다 그 광경을 부럽게 바라보는 윤재의 손을 동철이가 확 끌어당겼다.
“윤재야, 친형이야. 수원 경찰서에서 일하는 수사반장 동수형.”
“안녕하세요. 동철이 친구 강윤재입니다. 형님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래. 반갑다. 연수받느라 애들 썼지. 가자. 맛있는 음식 사줄게.”
동철이 형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근처 한정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곱창전골이 보글거리며 구미를 돋웠다.
윗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편안히 음식을 들었다.
“동수형. 이 친구 강윤재가 이번 연수에서 수석으로 회장님 상 받았어. 특전사 중위 출신에 엄청 영특하고 민첩해.”
“그러게. 첫인상부터가 남다르더라니. 잘 됐다. 동철이와 이렇게 친구도 맺고. 강윤재. 이제부터 나더러 그냥 편하게 형이라 불러라.”
“아~ 형님. 그래도 되겠습니까? 잘 부탁드려요. 좋은 동생 될게요. 동수형.”
“좋다. 남자다운 동생도 얻고. 둘 다 사회인으로 독립했잖아. 동철이 윤재 너희들 기대해라. 이 형이 앞으로 너희들 혹독하게 사회 훈련시켜줄게.
사회는 냉혹한 거거든. 강자만이 살아남는 치열한 정글 탐험이지. 스릴과 보람도 있다. 도전해볼 만해.”
‘오~ 어쩜 이리도 좋은 귀인을 만나다니. 전생에 못 한 일을 이번 생에선 확실히 펼쳐가겠어.’
강윤재가 곱창전골 왕건이 한 숟갈을 떠서 입에 넣었다. 특전사에서 전투 훈련을 마치고 외출 나와 동료들과 막걸리에 곱창전골 먹는 그 맛이었다.
거기에 동수형의 화끈하고 구수한 이야기가 더없이 좋았다. 화기애애한 나눔 시간을 갖고서 셋이 일어섰다.
보라매 공원 근처에 있는 강윤재 집에 도착했다.
“윤재야 내일은 일요일. 집에서 푹 잘 쉬고. 월요일부터 출근해 우리 세상 만들자.”
“당연하지. 동철아. 자주 연락하고. 동수형. 사주신 음식 잘 먹고, 이야기 고마웠어요. 이렇게 태워다 주어서 또 고맙고요. 잘할게요.”
윤재가 대문 앞에서 벨을 눌렀다. 엄마가 뛰어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 우리 아들. 윤재야. 연수받고 오느라 애썼지. 얼굴이 쏙 들어갔네.”
대문을 닫자마자 엄마가 윤재를 와락 끌어안았다. 볼까지 비벼주었다.
‘얼마 만에 맡아보는 엄마 냄새인가. 눈물이 핑 도네. 우리 엄마.’
윤재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를 번쩍 들었다. 동수형이 동생 동철이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것처럼. 가족이란 모름지기 이런 정과 맛이 있어 좋은 것.
윤재는 한술 더 떴다. 엄마를 덥석 업고 현관까지 갔다. 엄마를 내려놓자 엄마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엄마. 저를 이렇게 키우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지요. 이제부턴 제가 호강시켜줄게요.”
“그래 우리 아들. 윤재야. 오늘 엄마, 천국에 온 기분이야. 건강하고 즐겁게 살자. 자 어서 씻고 정리하렴. 엄마가 맛있는 것 만들어 줄게.”
윤재가 얼굴을 씻다가 거울 속에 눈이 그만 고정되었다. 한참을 멍하니 쳐다봤다. 47세 당시의 강윤재 부장 얼굴이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해왔다.
20년 전 모습이었다. 분노와 서러움 서린 얼굴, 핏발 선 눈동자가 매서웠다.
‘그래. 맞다. 그때를 잊지 말자. 지금 여기는 새로운 미션을 받아 온 세상이다.’
거실로 나오자 엄마가 따뜻한 차와 과일을 들고 오셨다. 모과차였다. 찻잔을 들어 입에 댄 순간, 겨울에 아버지가 즐겨 드셨던 건강 차가 생각났다.
‘전생에선 아버지가 고된 일 마치고 오시면 모과차를 즐겨 드셨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엄마와 아버지의 하시는 일도. 가족관계도. 우선은 들어보고 지켜보며 빨리 관계를 연결해야지.‘
옆에서 사과와 배를 깎으며 엄마가 물었다.
“윤재야.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니? 어서 이 과일도 들어.”
“예. 엄마. 아버지 생각했어요. 아버지도 이 모과차 좋아하셨잖아요.”
“그럼. 일 마치면 이 모과차가 몸에 받는대서. 겨울철에는 이 모과차가 으뜸이야. 감기 예방에 피로회복까지.
비타민도 많고 피부미용에도 좋대서 엄마도 즐겨들어. 지금은 우리 집 기본 차가 됐어. 너도 힘든 일 마치고 왔으니 이 차로 풀어봐.”
윤재는 가방을 뒤져 우선 종이봉투 하나를 찾았다. 그 봉투에서 대 노트와 큰 종이를 꺼냈다.
“좋은 소식부터 전할게요. 이번 연수에서 최고점수를 받아 회장님 상을 탔어요. 자 보세요. 이 상장.”
“우와~ 회장님 상이라고? 신입사원 연수 성적 1위!”
엄마가 상장을 받아들었다. 그윽이 상장을 바라보다가 아나운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오늘의 주요 가족 뉴스입니다. 강윤재 군이 수상한 기룡자동차 회장님의 표창장 내용입니다... .”
마지막에 나온 회장 김동호에서 말끝을 흐리셨다. 눈가를 매만지던 엄마가 가만히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셨다.
‘웬일이지? 기분이 좋으셔서 그런가. 회장 김동호란 글자를 읽지도 못하고... .“
“딩동!”
“윤재야. 아버지 오셨나 보다.”
대문 쪽으로 나가는 엄마를 따라 윤재도 나섰다.
“오, 윤재 왔구나. 연수 잘 받았니?”
“네. 가방 이리 주세요.”
“여보, 우리 윤재가 연수 성적 1등이래요, 회장님 상까지 받아왔어요.”
“장하다. 우리 아들!”
윤재가 서류 가방을 거실에 내려놓자, 아버지가 윤재 어깨를 톡톡 두들겨 주셨다. 윤재가 겸연쩍어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엄마 아버지. 두 분 가르침 덕분에요.”
“참. 여보. 오늘 학회에서 발표는 잘하셨어요?”
“응. 반응이 의외로 좋았어. 내가 발표한 헤르만 헤세 문학에 관심이 많던데.”
윤재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헤르만 헤세에 관해서는 전생에 윤재에게도 이야기가 많았다.
대학에서 한때 문학에 심취되어 신춘문예에도 소설가로 당선됐고. 대학 신문 편집장을 하며 문학의 밤도 준비한 문학도였다.
“저도 헤르만 헤세 문학세계가 좋은데요. 그중에서도 전 그의 소설 ‘지와 사랑’에 공감했어요.”
엄마와 아버지가 윤재의 말에 흠칫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오, 우리 윤재가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에 관심이 많다는 것 놀랍네. 오늘 내가 주로 다룬 건 ‘데미안’이었어.”
“‘지와 사랑’ 그리고 ‘데미안’ 둘 다 인간의 내면을 파고든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어쨌든 아주 흥미로운 일이네요. 아버지와 아들이 이런 공감도 있다니”
엄마가 옆에서 거들자 아버지 얼굴이 환해졌다.
“윤재야. 너 언제 그렇게 문학에도 심취했었니?”
‘전생에선, 저 이래 봬도 우리 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자예요.’
목구멍까지 나오려는 말을 겨우 삼켰다. 그저 지그시 엄마를 바라볼 뿐.
‘뭐야. 이 세상에 오니, 하고 싶은 말을 못 할 때가 많잖아. 침묵 수행 하고’
엄마가 미리 준비해둔 음식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오늘은 좋은 날, 가족 함께 푸짐한 음식에 와인 한잔해야겠네.”
“그래요. 다 돼가요. 오늘 특식은 영계백숙이에요. 밖에서들 애썼으니 주말은 가족의 날 해야지요.”
식탁이 풍성했다. 인삼 대추 넣은 영양백숙에 갓 담은 생김치 그리고 레드와인. 얼마만 인가. 가족이 얼굴을 맞대고 정담을 나누며 먹는 가족 밥상이라니.
“그래. 윤재야. 이번 연수에서 배운 것 많을 텐데. 뭐가 인상적이었니?”
아버지가 물었다. 엄마가 닭 다리를 찢어 아버지와 아들 접시에 하나씩 먹기 좋게 놓았다. 부자가 한 다리씩 뜯는 모습을 은근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네. 여러 일이 있었어요. ‘가르시아의 밀서’란 말에 많은 걸 생각했어요. 그 말을 첫날 회장님이 화두로 던지시더라고요.”
“옛날에는 위에서 명령하면 순종하는 체제였지. 왕과 신하, 지휘관과 병사 사이에. 요즘 회사에서는 그 뜻이 퇴색됐어. 그래도 그 취지는 좋다고 봐.”
아버지의 대답에 엄마가 윤재에게 물었다.
“윤재 넌 어떻게 반응했는데?”
“특전사에서 익히고 배운 대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죠. 어떤 명령이 떨어져도 변명과 이유 달지 않고, 난관을 주도적으로 돌파해야 한다고요.”
“한국은 이제 1980년대 개발도상국으로서 그런 방식 수용이 필요하다고 봐. 아마 10년쯤 지나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면 달리 해석할 수도 있겠지.”
아버지가 시대 흐름을 예견하시는 데 윤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또 있어요. 회장님이 첫날 제 답변에 칭찬 겸 격려를 이렇게 주셨어요. ‘강윤재! 특전사답게 패기와 기상이 좋네. Keep going 하게!’.
맨 마지막 영어 구절이 제 가슴에 신선하게 남더라고요. Keep going. 회장님이 그런 영어를 쓸 줄은 몰랐거든요.”
“하하하. 우리 윤재. 다 컸네. 대답도 해박하고 시원스럽고. 회장님이라도 철저히 준비해서 말한 거야. 새 식구 맞이하는 자리인데. 회장님이잖아.
대통령이 외국 방문하면 그 나라에 맞는 속담 같은 걸 툭 내던지잖아. 말 한마디에 확 자신을 드러내거든. 지위가 사람을 만드는 게지.”
엄마도 ‘아침 마을’에서 방송 진행을 맡아 하듯이 유연하게 말을 잘 받아 연결했다.
‘지위가 사람을 만든다.’
윤재가 그 말을 속으로 읊조렸다. 지위가 어떤 사람을 만드는가. 그것이 관건이다. 선한 역, 악한 역, 꼭 필요한 역, 주변을 불편하게 하는 역. 다양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역할은 하늘이 준 사명이라 생각하렴. 무슨 일을 하든 주도적으로 즐겁게 헤쳐나가면 돼. 젊음은 가장 큰 자산이니까.”
‘가족 연수 시간인가. 아버지 말씀도 밑줄.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역할은 하늘이 준 사명‘. 이번 생엔 그 사명 완수자로 최선을 다하고 신나게도 살자.’
오붓한 식사에 담소를 즐기며 가진 가족 시간이 겨울 저녁노을에 물들어갔다. 윤재가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누웠다.
지나간 전생, 주요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하나씩 스쳐 갔다. 그때는 정말 고생이 많았다.
시골에서 아들을 대학 보내려고 허리가 휘도록 일하신 부모님. 두 분은 아파서 힘들어하셨다. 아버지는 마을 이장으로 동네 사람들을 챙겨주셨다.
엄마는 힘든 논밭 일하면서 노래를 입에 달고 사셨다. 장학금을 못 탄 학기 때였다. 시골에 내려가 소죽 끓이는 일을 거들다 깜짝 놀랐다.
연기 그을음으로 까매진 부엌 부뚜막에 웬 삐뚤삐뚤한 글씨? ‘윤재 등록금 40만 원.’ 엄마가 낙서한 글씨체였다. 40만 원이면 당시 쌀이 40가마니였다.
대학 졸업. 회사 취업. 회사 일에 매진. 경쟁사에 야비하게 넘어가 받은 온갖 치욕. 늘그막에 아파 고생하신 부모님을 제대로 돌보지도 못한 안타까움.
다행히 이번 생은 엄마 아버지가 건강하시고 신분 상승도 됐다. 생활 여건도 좋다. 못다 한 효도도 하고, 쓰러진 회사도 살릴 역할과 임무에 올인이다. *
8화 끝 (5,127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