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客閑談] 눈,눈물에 관하여
천지사방이 눈물로 흥건한 곳이 있지.마른 걸레를 수없이 적신 뒤에도 그침없이 흘러내리는 물기를 거푸 닦아내려면 마른 수건을 연신 준비할 수밖에 없다네.멈출기미를 보이지 않고 흘러내리는 눈물의 양은 슬픔과 비탄과 애절함과 한스러움과 비례될 걸세.그렇게 누선(淚線)이 풍부하게 발달한 종족들이 생활하는 곳이 과연 어느 곳인가.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네.눈물의 난바다에서 눈물없이 눈물을 논한다는 것은 사실 눈물에 대한 예의는 아니지.하지만 눈물로 짓무른 상태를 오랜동안 지속하기란 고역이 아닐 수 없지만 유전자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것이 안전하게 고정석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처음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네.
태생적인 한계의 영역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불가피성이지.눈물은 우리 민족에게는 혈액이나 마찬가지로 삶을 위한 절대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네.우리 민족 만큼 눈물을 사랑하는 민족이 세상 어느 곳에 있을까.모태를 벗어나자마자 눈물연기를 동반하여 자연체득이 된 눈물은 이 종족에게만 국한된 행위는 아니기 때문에 논외로 치더라도 눈물은 꽤 끈질기고 지루하게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네. 배우 초년생이라도 눈물연기 하나는 할리웃 톱 배우 뺨 칠 정도이니 아카데미 상 중에 눈물연기상이 있다면 아마 그 상은 매 년 우리 배우들이 독차지 할게 틀림없을 걸세.우리 민족의 유전자가 이렇게 눈물과 인연이 깊은 것은 과연 무슨 이유 때문일까.
남들 앞에 부끄럽게도 먼지가 덕지덕지 묻어있고 더러운 때가 켜켜이 싸여있는 비루한 역사적 사실을 들먹이며 자책감에 젖어 그 흔한 눈물을 글썽일 이유는 더욱 없지 않은가.희로애락 곳곳에 다 눈물이 짙게 배어있으니 걸핏하면 주르륵 눈물로 눈을 적시며 상황을 자연스레 연출하려는 시도는 번번히 반짝이는 효력을 발휘하곤 하지.특히 여성들에게는 전가의 보도로써 귀중한 대접을 받고 있지 않던가. 이런 현상은 남성들에게도 영향을 끼쳐서 그런 상황을 벤치마킹하는 사태도 발생을 하곤하니 가히 눈물공화국이라고 할 만하다 할걸세.
여지껏 우리에게는 눈물이 미덕으로 대접받은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네.정치 사회 문화 등의 여러 분야에서 울음의 눈물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수구적이고 퇴보적이기까지 하지.이미 오래 전부터 변화의 조짐이 없이 화석화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인간 사회의 현상 저편의 삼라만상의 현상에도 거리낌 없는 눈물연기를 강요하는데 주저치 않음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네.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것을 보고도 운다고 했고,바람이 불어도 운다고 하며 바람에 창문이 조금만 흔들려도 창문이 운다고 하였으며,새벽 닭이 울고 풀벌레가 울고 봄바람이 살랑살랑 울고,겨울에 부는 바람은 윙윙거리며 운다고 .
청상의 여인이 소복의 옷고름을 적시며 소리없이 운다고도 했지.그랬네.우는 모습에는 소리의 유무까지 존재하지.어쨋든 눈물 공화국이 따로 없지 않은가. 이렇게 우리의 눈은 별도의 세정제의 도움을 받거나 맑은 세정수에 의한 세척이 불필요 하다네.그러므로 우리의 눈동자는 어느 민족의 눈보다 맑고 투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 걸세.눈은 사물의 형체를 바라보고 그 실체의 파악을 마치면 빛으로 대화를 전하는 언어가 불필요한 모니터지.눈의 화법에는 여러가지가 존재하는데,대체로 눈물이 교양과정이라면 눈주위의 근육을 빌려 수축을 다양한 형태로 움직이며 뜻을 주고받는 능력은 전문분야가 된다네.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대화의 창구라는 말과 다름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라네.사실 진심어린 대화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지.상대의 눈동자만 바라봐도 그 내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네.애써 구구하고 지루한 언어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거짓되고 포장되어 위장된 언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억측과 과장을 초래하여 오해와 불신을 초래하며,분열과 충돌을 야기하곤 하지.아날로그 시대에는 주로 언어로써 모든 소통을 해결하고 눈을 이용한 소통, 곧 영상을 통한 소통은 항상 뒷전으로 밀리곤 하였지.일쑤 작금의 디지털 시대가 영상시대의 발전을 촉진시키고 눈의 역할의 중요성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을 걸세.
대화의 매체로써 영상의 역할은 또 예술의 진보를 한단계 높여 놓았지.서술을 최대한 생략하고 간단한 영상으로 너절함과 복잡성을 단순하게 바꿔 놓았으며,눈은 귀를 넘어서고 입을 다물게 하였지.영상의 TV가 언어의 라디오를 누르고,눈짓이 말짓을 제치고 예술성을 차지한 것은 눈이 천하를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눈은 말을 못하는 벙어리이며 귀머거리이지만 천재성을 나타내며,입은 말은 할 수 있겠지만 앞을 못보는 청맹과니에 불과하며 온갖 요설로써 사태를 마무리 짓곤 한다네.우리나라가 정보통신의 일류국가를 구가하는 요소는 사실 눈물속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현대 문명을 선도하는 세션의 선두에는 소프트파워가 대세를 이루고 있으니 말일세.
여지껏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던 중후장대의 하드웨어 파워는 리더의 자리를 소프트 파워에게 내줘야할 처지에 놓여있다네.선두에서 앞 길을 개척하는 행위를 우리는 창조라고 이야기 하지.사실, 창조라는 어원은 시작에 불과한 개념이네.창조경제를 부르짖는 시대에 고작 시작을 외치고 부양하려는 몸짓은 어딘지 부자연 스럽지 않던가.존재하지 않은 사물과 이치를 발굴하고 터득함으로써 사회발전의 모멘텀을 삼으려는 연구와 노력은 부단하게 영속되어야 한다네.눈물의 유전자가 유독 풍부한 종족에게 현대문명의 헤게머니를 거머쥘 찬스가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네.이제부터는 눈의 촛점을 어디에 어떻게 맞추고 조리개의 작동을 얼마나 유연하게 펼쳐나가느냐가 선두질주의 대세를 판가름할 걸세. (2015,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