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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의 1학년 생도들을 두더지라고 부르는데, 2학년이 될 때까지 일체의 외출 외박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일한 희망이 각각 3주간씩 주어지는 여름과 겨울 휴가이다. 그것도 학과 성적이 기준을 통과하여야 휴가를 갈 수 있다. 전과목 평균이 60점 이상이어야 하고 한 과목이라도 40점 이하가 나오면 안 된다. 여기에 하나라도 걸리면 남들 다 가는 휴가에서 열외 되어 일주일간 보충수업을 들은 후에 다시 시험을 치러야 한다. 물론 추가 시험에서도 소정의 점수를 얻지 못하면 자동 퇴학이다.
6월이 되어 계산을 해보니 다른 과목은 모두 턱걸이 넘이를 했지만 그 놈의 망할 수학이 엉망진창이다. 아무리 계산을 다시 해보아도 기말고사에서 80점을 넘어야 되니 이런 기가 꽉 막힐 일이 있나. 두더지가 휴가를 까먹는 다는 것은 개죽음보다 더 억울한 일이다. 학기 내내 농땡이 친 것을 후회해 보아야 헛일이고, 유일한 길은 오로지 기말고사에 80점을 넘게 받는 것. 평소의 실력으로 미루어 보아
완전 초특급 비상이다. 중대장 생도에게(4학년이다) 특별 면담 신청을 해서 이러쿵 저러쿵 썰을 풀고는 기말고사 때까지 일체의 사역과 단체기합에서 열외를 받는 특전을 얻어 냈다. 괴상하고도 망칙한 수학공식들과 죽어라고 씨름을 한 덕에 결과는 98점! 전교 톱이다.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동기생들. 그러나 최고 점수를 얻었으니 커닝이라던지 일체의 엉뚱한 추측은 할 수도 없는 일. 동기생들의 열렬한 격려의 박수를 받으며 나는 드디어 첫 휴가를 보무도 당당하게 나올 수 있었다. 사족 – 그 때 서른 명이 넘는 두더지들이 보충수업을 받았고 열 명이 넘게 퇴학을 당했다.
서론이 길었다. 오늘은 천마지맥 3구간 보충 수업을 하는 날. 출장으로 인해 지난 5월 20일의 3구간 산행에 동참하지 못했으므로 천마지맥을 완료하려면 별도로 3구간을 뛰어야 한다. 제2구간을 동참하지 못했던 규성 형님이 그랬던 것처럼 두 개의 구간을 하루에 뛴다는 것은 허약한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별도로 시간을 내어 3구간을 뛰리라 생각만 굴뚝처럼 하고는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제 남은 기회는 오늘뿐. 혼자 가자니 심심하기도 하거니와 중도에 퍼질까 두려워 회사 직원 고 이사(기실 내 회사는 직원이라야 딱 두 명뿐인 회사다…^^)와 거래처 이 여사를 꼬드겨 같이 산행을 하기로 했다. 명길 형님의 산행기를 카피해서 암기하다시피 읽고 또 읽고, 규성 형님의 구글 지도 복사해서 챙기고 지도며 나침반도 챙겼으니 준비 끝~!!
승용차로 오남리까지 가서 택시를 잡았다. 과라리 고개 입구인 팔현리까지 5천원 달란다. 경북 의성이 고향이라는 기사는 수십 년 동안 객지를 떠돌다 결국 이곳 오남리에 정착을 했단다. 기사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즐거운 산행을 시작한다. 어이구, 수다에 정신이 나간 기사님, 팔현 2리로 가야 할 것을 그만 우측 계곡의 팔현 1리로 갔다. 1리는 2리보다 계곡의 경치가 훨씬 아름답고 천마산까지 가는 지름길이다. 그렇다고 지맥산행을 단축길로 갈 수는 없는 일, 다시 빠꾸~! 지난 번 산행시 눈여겨 봐두었던 팔현 2리에 도착하여 산행을 시작한 시간이
햇볕은 쨍쨍한데 오르는 길의 수목이 울창하여 그늘 길을 오르자니 땀은 줄줄 흐르지만 솔솔 부는 시원한 바람 덕에 무척 상쾌한 발걸음이다. 한번도 쉬지 않고 30분 만에 과라리 고개 돌무지에 도착하였다. 나 스스로 대견하다 아니할 수 없다. 흐흐….
“과라리란 말의 어원은 말이여, 다래가 발에 걸릴 많큼….어쩌고 저쩌고…”
지난 번 산행기에 써먹었던 구절을 주저리주저리 풀어대니 동행한 이 여사의 눈이 동그래진다.
“오모~! 그런 깊은 뜨시… 산만 잘 타는 게 아니라 벼라별 아는 것도 많네유~~!”
이 여사는 내가 끝내주게 산을 잘 타는 줄 알고 있다. 이거 큰일 났다. 두어 시간 후면 모든 것이 낱낱이 밝혀질 터. 내가 과연 얼마나 잘 버틸 수 있을까?
“넘넘 조아여~! 일케 아름다운 길, 사람도 없는 길을 걷는 것은 처음임다아~~~.”
나를 따라 오길 참 잘했다며 모두 내 덕분이라는 약간은 오바된 두 동행인의 칭찬을 뒤로하면서 나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이를 악물고 앞장서 걸어야 했다. 나의 나약함을 절대로 보이지 말자~!
얼마를 걸었을까 갑자기 이 여사가 소리를 지른다.
“우와아~!! 취밭이다. 곰취 곰취~~!!!”
둘러보니 사방이 온통 곰취로 가득하다. 산에서 나물을 불법 채취하면 감빵 간다는 나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용감한 아줌마는 신이 나서 곰취를 뜯기 시작했다. 아아, 대한민국 아줌씨들의 저 위대함이여, 식솔들의 먹거리를 위하여 피곤한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던지는 저 위대함이여! 덕분에 10여분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 여사가 당연한 듯 채취한 곰취 한 보따리를 내게 맡긴다. 하이고, 가뜩이나 힘든 판에 무게가 천근처럼 느껴진다.
등산용 GPS 수신기도 없고(물론 사용법도 모른다) 정확한 지도도 없지만 육안으로 현위치를 식별할 만한 감도 없으니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명길 형님의 산행기에는 분명 양지봉이며 676 미터짜리 둥글봉도 언급이 되어있는데 모든 봉우리가 양지바르고 둥글둥글하니 어디가 어디인지 모를 수 밖에. 에라 모르겠다.
“흠~ 여기가 시방 양지봉이여~”
“야호~! 여기는 둥글봉이라 하는 데여~”
대충 생각나는 대로 떠들 수 밖에. 옛말에 아무도 모르면 목소리 큰넘이 장땡이라 안했는가?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뛰어난 식견에 감탄을 한다.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아무도 밥 먹자는 소리를 안 한다. 그만큼 멋진 산행에 도취되었나 보다.
“옴마, 옴마~!!”
또 뭐야? 이여사의 계속되는 감탄사.
“이 계란말이 직접한 검니까?”
“에이~ 까이꺼~ 뭘~! 내가 요리사 생활 10년차요~!”
“오모나~! 새장가 가면 색시가 엄청 조아하겠쑤~!!”
“하나 소개해 줄라우?”
“암만, 그라지요~ 내 칭구들 중에 부동산 하는 …” 진짜로 소개팅 주선할 분위기다.
“근데 말요, 난 수준이 높은 여잔 사양이요.”
“수준이 높긴요….다 그만그만 하죠 뭘~”
“내가 말하는 수준이란 나이 수준이요. 40대는 넘 높고 30대라면 모를까?”
‘예끼 여보슈~ 주제 파악 몬하시넹?”
그렇게 웃고 떠들며 풍성한 식사를 즐겼다.
천마산 정상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에서 내려다 본 경치가 일품이다. 동으로 불암산의 부처 닮은 바위가 손에 잡힐 듯 보이고 백운대며 인수봉도 아스라이 보인다. 남으로는 유유한 한강의 물줄기가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그래, 저 곳이 천마지맥이 끝나는 곳, 다음에 끝을 낼 구간이군. 다시 한번 눈으로 지맥의 흐름을 더듬어 보았다. 발끝에 펼쳐진 마석이며 남양주시의 수 많은 아파트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저 많은 집들에, 저 많은 사람들, 모두 무엇을 하며 살고 어떻게 벌어 먹고 살며 무슨 꿈들을 갖고 살아갈까 공연한 걱정을 해본다. 남양주의 지세에는 아파트 보다는 역시 단독주택이 훨씬 잘 어울릴 터인데 무분별한 난개발 현장을 씁쓰레하게 내려다 보았다.
내리막 길은 나에겐 쥐약. 겨우겨우 지탱하던 무릎에서 사정없이 경고음이 쏟아진다. 바위 위의 저 아름다운 소나무에 길고도 아주 긴 자일을 걸고 한 번에 산밑자락까지 안자일렌하는 방법은 없을까? 드디어 나의 실체가 하나씩 속속 들어나기 시작한다. 나 때문에 하산 속도가 매우 더뎌진다.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없다. 살고 봐야 한다. 배낭에서 파스를 꺼내 바꿔 붙인다. 젠장, 파스의 효력이 24시간이라고 포장지에 큼직하게 인쇄되어 있는데 겨우 예닐곱 시간 만에 갈아 붙이다니. 그래도 새로 붙인 파스에서 후끈거리는 기운이 무릎 전체에 퍼지니 조금은 살 것 같다.
정상을 출발 한지 2시간이 지난
첫댓글 고생하셨소. 산행도 좋고 글은 더욱 재미가 있습니다. 글을 쓰며 산행을 반추하고 옛날 에피소드를 연결시키고 인생을 생각하는 것이 산행에서 시작되지요. 애써 확보한 여름 휴가에서 어느 산으로 가서 어떻게 산행 또는 락크라이밍했다는 얘긴 다음 번에 기대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