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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임제 스님의 인불사상
성인은 이름일 뿐이다
임제(臨濟, ?~867) 스님은 선종사에 있어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달마 스님도 육조 스님도 우리나라에서는 임제 스님 다음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스님이 입적하면 “빨리 돌아오셔서 임제문중에서 다시 큰 일을 밝히시고 길이 인천의 안목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축원을 올린다. 그리고 큰스님들의 비석마다 임제 스님의 몇 대 법손이라고 쓰여 있다. 그와 같이 임제 스님의 안목은 높고 투철하여 아무도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임제록>에 이런 말이 있다.
다시 부연설명을 붙이자면, 불교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성인을 좋아한다. 천불(千佛) 만불(萬佛)을 찾고 천 보살 만 보살을 부른다. 열광적으로 그 이름을 부르고 천 배 만 배 절을 하는 것을 보면 불보살에게 절하는 것에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있다. 아름답게도 보이지만 측은하게도 보인다.
성인이란 단지 성인이라는 이름뿐이다. 천 보살 만 보살, 천불 만불이 모두 이름뿐이다. 단지 사람이 있을 뿐이다. 부처님이 있다면 사람이 부처님이다. 오대산을 찾아간 무착 스님뿐만 아니라 수많은 불자들이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간다. 몇 달 몇 년을 걸쳐 일보일배(一步一拜)의 고행을 하면서 찾아간다. 하지만 벌써 틀린 짓이다.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없다.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말씀이다. 가슴이 천 조각 만 조각 나는 말씀이다. 기존의 일반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저 넓은 바다의 끝없는 파도처럼 출렁대는 그 마음들을 어쩌란 말인가. 진실은 물과 같이 까딱도 하지 않는데. 그대들은 정말 문수보살을 알고 싶은가? 그대들의 목전에서 지금 활동하고 있는 그것, 보고 듣고 하는 그것이다. 시간적으로 시종일관 다르지 않고 한결 같은 그것이다. 공간적으로 어느 곳에서든지 분명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래서 너무도 구체적인 그것이다. 추상적이거나 애매모호한 점이라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너무도 확실한 그 사람이 문수보살이요, 부처님이다. 그대가 참으로 살아 있는 문수보살이다. 그대가 참으로 성인이다. 그래서 ‘당신은 부처님’이다. 인간 해방의 대 선언서 이것이 진짜 불교다. 임제 스님만이 가르칠 수 있는 불교다. 임제 스님은 수천 년의 인류사에 떠오른 천 개의 태양이다. 수억만 가지의 방편을 다 걷어치우고 진실만 드러내셨다. 하늘만큼 땅만큼 많은 불교의 거품을 다 걷어낸 가르침이다.
어느 청산인들 도량이 아니랴 조주(趙州, 778-897) 스님이 행각할 때 어떤 작은 암자에서 며칠 묵었다. 떠나면서 원주에게 하직인사를 하였다. 원주가 묻기를, “어디로 갑니까?” “그렇다면 나에게 게송이 하나 있으니 들어보시오.”
한국불교는 모두 임제 스님의 후손들이다. 임제 스님을 역대 조사들 중에서 가장 높이 숭상한다. 왜냐하면 임제 스님의 불교는 일반적인 불교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일체의 방편과 가식과 거품을 다 걷어내고 불교의 진실만 오롯이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법을 설함에 있어 결코 수준과 근기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당신이 깨달으신 진리를 거침없이 표현한다. 누가 무어라고 하던 절대 눈치 보면서 설법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설법은 한 토막만 들어도 속이 시원하고 백년 묵은 체증이 모두 다 내려간다. <임제록>에 이와 같은 설법이 있다.
너무나 충격적인 설법이라 좀 부연설명을 해야 한다. 여법한 견해나 진정한 견해나 정견(正見)이나 훌륭한 지혜나 모두가 같은 뜻인데, 이 지혜를 유지하려면 다른 사람에게나 나 아닌 다른 경계에 끌려 다니면서 미혹을 당하지 말라는 뜻이다. 임제 스님께서 죽이라는 말씀은 온갖 경계가 앞에 오거든 무조건 다 부정하고 끌려가거나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다. 나를 욕하고 나를 때리고 나를 모함하고 손해를 입히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을 흔드는 부처님이나 보살들이나 부모나 친지들이나 온갖 내 마음에 잘 맞는 대상들에게도 빠지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나로서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달리 부처님이나 조사나 보살들에게 끌려가고 흔들릴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 자신이 저 부처님보다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부처님이나 조사나 아라한이나 부모나 처자 권속이나 모두가 다 나 아닌 다른 경계이며 내가 미혹을 당할 상대들이다. 다시 말해서 역(逆)경계나 순(順)경계나 일체를 부정하고 벗어나라는 것이다. 거기에 끌려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해탈이며 나는 나로서 당당하게 나의 삶, 나의 인생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내 인생이 툭 터져서 자유자재하게 된다. 부처님이나 조사나 아라한이나 그 어떤 권위나 관념들로부터도 벗어나라. 인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깡그리 부정해 버리고 끌려가지 말라는 뜻에서 죽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부처님이나 보살이나 조사에 대한 모든 잘못된 관념들을 때려 부수라는 뜻이다.
“야, 이 눈 먼 놈들아, 저 시방의 신도들이 신심으로 시주한 물건을 마구 쓰면서 ‘나는 출가한 사람이다.’라고 하여 이와 같은 견해를 짓고 있구나. 나는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부처도 없고 법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는데, 어쩌면 그렇게들 옆집으로만 다니면서 무슨 물건을 구하는가? 야, 이 눈멀고 어리석은 놈들아! 머리 위에 또 머리를 얹는구나. 너희들에게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출가입산(出家入山)하여 수행 정진한다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온갖 호설란도(胡說亂道)로 제멋대로 펼쳐놓은 주의주장들을 의지해서 그것이 불교인 양 하고 사는 사람들의 견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불교는 그런 것이 아닌데 헛되이 신도들의 시주 밥만 축내고 출가인 이라고 하다니. 불교를 사뭇 틀리게 말하는 사람, 그것마저 하지 않는 사람들은 차한에 부재다. 논할 대상이 아니다. 이미 우리들 자신이 완전무결한데, 이미 보물이 넘쳐나고 있다. 행복이 넘쳐나고 있다. 그래서 부처도 법도 수행도 깨달음도 따로 없다. 깨닫지 않아도 이미 부처다. 공연히 자기의 집을 버리고 남의 집으로 찾아 헤매고 있다. 자신의 집에 이미 무한한 보물이 있는데 남의 집에 가서 무엇을 구하자는 것인가? 야, 이 눈멀고 어리석은 놈아 그렇게 해서 찾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머리 위에 머리를 하나 더 올려놓는 격[頭上安頭]이다. 긁어서 부스럼 내는 일이다. 멀쩡한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 일이다. 머리 위에 머리를 하나 더 올려놓고 어쩌자는 것인가? 이미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을 버리고 다시 괴물이 되고 싶은가? 무엇이 부족하여 그런 짓을 하는가? 지금 이 순간 글을 읽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춥고 더운 것을 느끼고 하지 않는가? 계절 따라 경계 따라 사람은 이리 저리 오고가지 않는가? 때로는 청명한 가을 날씨와도 같고, 때로는 비에 젖은 솜이불처럼 우리들 마음도 푹 젖어서 천근만근이 되지 않는가? 그 물건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신기한가? 신통묘용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거기서 다시 무엇이 더 필요한가[欠少什麽]?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2, 3세 먹은 어린아이도 동생이 생기면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울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지 않는가? 도대체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할 줄 아는가? 이것이 부처의 능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니다. 선악의 관념은 오직 각자의 주관적 감정이다. 선악을 개입시키지 말고 그대로를 보라. 그 능력 그 사실이 곧 소소영령한 부처의 작용이다. 진정한 신통묘용이요, 무량대복인 것을. 참으로 천고의 명언이다. 촌철살인이다.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최후 최고의 가르침이다. 수미산 꼭대기다. 굳이 말하자면 이것이 최상승불교며, 새로운 불교며, 신대승불교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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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 無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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