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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1월12일 주일오전설교
성경합독: 이사야23장, 사도행전7장
성경낭독: 사도행전3:1-10절
설교본문: 사도행전3:1-10절
설교제목: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예배찬송: 143장(시47), 89장(시31), 184장(시67), 357장(시134)
행3장 1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주님은 베드로의 설교를 사용하셔서 불러내시기로 작정하셨던 사람들을 교회의 울타리 안으로 모으셨습니다. 한꺼번에 3,000명이 주님께 회개하고 돌이켜 세례를 받고 지속적으로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 아래 머물렀고,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공동체로 묶이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탄생에 있어 성령께서 역사하는 일에 사람들이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광폭한 이리처럼 주님을 고소하고 십자가에 죽이라고 외쳤던 잔인한 외침들은 하나님께서 두려운 마음들을 심으심으로 제한시키셨습니다. 주님을 박해하고 죽였던 유대인들이 일정기간 동안 위축되도록 하셔서 초기 교회가 형성되는데 어려움이 없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성령의 역사로 사도들이 이적을 행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복음을 전달할 때에 강퍅하고 돌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불신앙을 허무시기 위해서 비상한 능력들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 이후에 좌절하고 도망했던 제자들의 모습은 도무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변화된 사도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순절 강림 이후 처음으로 드러난 이적의 역사를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걸음을 할 수 없었던 사람이 베드로의 손을 통해서 일어나고 걸어 성전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표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1-3절을 봅시다.
1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초기 사도들의 교회는 성전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성전 되신 주님께서 승천하여 보좌에 앉으셨기에 더 이상 성전은 필요 없어졌지만, 아직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매일 성전으로 올라왔고, 절기를 지속적으로 지켰습니다. 복음의 말씀으로 일깨우기 위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아침과 저녁 기도시간을 따라 성전으로 올라갔고, 성전으로 나아온 많은 유대인들, 주의 오심을 고대하며 기다리면 경건한 남은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증거 하였습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는 하루에 두 번 기도시간이 있었고, 사람들은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간 시간은 제 구시, 오후 3시입니다. 아침기도시간은 우리시간으로 오전 9시이고, 오후기도는 3시였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 저녁이 가까워져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일출에서 일몰까지 이어지는 12시간의 낮 시간은 4 부분, 네 경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제 삼시까지가 일경, 제 육시까지가 이경, 제 구시까지가 삼경, 마지막 12시까지가 사경이었습니다. 삼경은 낮 시간이 저녁으로 기울여져 가는 때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을 사람들이 메고 왔습니다.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구걸을 통해서 생계를 이어갈 수 도록하기 위해 매번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를 데려다 두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도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어떤 배경에 의해서 걷지 못하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어릴 때에 낙상을 했거나 아니면 근본적으로 출생 때부터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걷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구걸조차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상태였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구걸할 장소로 옮겨져야 구걸이 가능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이 자리 잡은 곳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여러 문들 중에 ‘미문’, 곧 ‘아름다운 문’앞이었습니다.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면 미문은 고린토스식의 니가노르문으로 구리빛이 났고 다른 문들보다 크고 금과 은, 청동으로 입혀 장식들이 많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미문은 특별한 때에 열리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 적선하기 위해 자리를 잡는 것은 지혜로운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문의 정확한 위치는 성전이 사라진 지금 분명하게 확인 할 수 없지만, 이 문을 통해서는 여인들과 이방인의 뜰로 들어갈 수 있었기에 유대인과 이방인, 여인들까지 드나드는 최선의 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제는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적선을 행하는 일은 율법의 의무였고 하나님께 대한 경건의 표현으로 구제를 행해야 했기에 성전으로 올라가는 문 앞에 앉은 것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에게 생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오늘도 여느 날과 같이 사람들이 메어다 데려다준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연민을 불러오는 간절한 눈망울로 성전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향하여 자비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을 보고서 구걸하였습니다.
나면서부터 걸을 수 없었던 이 사람의 현재 소망은 충분한 적선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것에 온통 마음이 쏠려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오늘 근본적인 치료와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가 구했던 것과 달랐던 것이 지불되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몇 날의 생명연장 구했으나 영생을 얻었고,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불편한 다리가 회복되어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걸하기 위해 자리를 앉았을 때 그의 간구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들 또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은혜와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4-8절을 봅시다.
4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하나님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에게 구하지도 않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따라 값없이 치유해주셨습니다. 다리가 회복되어 나은 것은 물리적인 육체의 근본을 치료한 것이라면, 죄 용서와 영생의 선물은 죄와 사망이라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신 선물입니다. 우리들 모두 이 생명의 선물에 참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구걸하는 사람의 얼굴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보라”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이나 어떤 확신도 없이 빈 소리로 한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앉은뱅이에게 일어날 이례적인 은혜가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일어나라고 명하기 전에 먼저 주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확신한 베드로는 구걸하는 사람을 일깨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대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구걸하던 사람이 기대하고 구하는 것은 돈이었고,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기대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베드로의 주목하라는 요구 앞에 그는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금전이 주어질 것에 대한 가득한 기대를 가지고 그의 눈은 주목하라는 사도의 얼굴을 향했습니다. 주목하는 그를 향해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구하는 것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이 말은 자신에게 만약 돈이 있었다면 기꺼이 나누어 주었을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내게 넉넉함이 있어 당신의 궁핍함을 해결해 줄 능력이 있다면 그리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형제를 돌보는 자가 되기를 바라시고, 의무를 지어주셨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돌보기 위해 애쓰고 땀 흘려 수고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의무입니다. 마찬가지로 땀 흘려 수고할 수 없는 상태, 절대적 빈곤의 상태에 놓인 사람들에게 우리는 나누어 줄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앉은뱅이의 입장에서 주목하여 바라보라고 한 베드로를 바라보며, 금전적 도움을 기대했지만 가진 것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허황된 말로 우롱하고 놀린다는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는 은과 금이 자신에게 없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목하여 바라 본 것은 금이나 은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없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생각하지 못한 뜻밖의 것을 준다고 선언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것, 뜻밖의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름”은 권세를 나타내는 것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권세의 출처 누구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베드로는 자신에게는 은과 금은 없지만, 자신에게 있는 것, 가장 귀하고 존귀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생명과 치유를 준다고 말합니다. 왜 그리스의 이름 앞에 ‘나사렛’이라는 말을 붙였을까요?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경멸적인 장소,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볼품없고, 조롱받던 이름입니다. 이방인과 같은 북방의 촌락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을까하고 비꼬던 지명입니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 유대인들이 주님을 멸시하고 부당하게 대우함에도 불구하고 나사렛 예수는 약속하신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의도적으로 ‘나사렛 예수’를 사용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서 참 메시야이시며, 유일한 구원자가 되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고, 이것을 메시야를 몰랐던 앉은뱅이에게 주고자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은 것과 비교하여 다른 모든 것들은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2:2절에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가장 큰 능력과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은 베드로나 바울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며, 불의에서 떠나 그리스도의 의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줄 것이 없다고요? 아닙니다. 은과 금은 가치가 상쇄되고 사라지는 것이지만, 변치 않는 생명, 우리에게는 가장 귀한 것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우리가 주어야 할 가장 가치 있고 사활적인 유산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생명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가난하다고 생각하여 자괴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나라를 유업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을 것이고, 이 나라는 크고 놀라운 것으로 나눌 수 있고, 초대할 수 있는 가장 심대한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교회로 사는 부요함을 우리는 이미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은과 금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것과 동일한 것,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앉은뱅이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느닷없는 말씀,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니! 하지만 그는 베드로의 말을 믿었고 주저하던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앉은뱅이의 심령에 감동을 주셨고 순종할 마음과 믿음으로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질병이 치료되어져 버렸습니다. 마음의 감동과 믿음을 일으키셨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지긋지긋하게 일평생 괴롭혀 왔던 무력함과 걷지 못함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몸이 상한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들로 성전으로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몸의 질병은 육체의 고통뿐 아니라 영혼의 고통까지 수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남자들은 성전 안 뜰까지 들어가는 특권을 누구나 누렸지만 병든 사람들은 제외되었고, 소외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함으로 성전으로 들어갈 기회를 일평생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무서운 올무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으로 나아갈 특권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베드로가 믿음으로 바라보며 주저앉아 있던 그를 잡아 일으켰습니다. 일으키자 마자 발과 발목에 힘을 얻었고 뛰어 서서 걸었습니다. 에스골 골짜기에 마른 뼈에 힘줄이 붙고 살이 덮여 일어섰던 것처럼, 일평생 한 번도 걷지 못했던 이가 뛰며 일어났습니다. 발과 발목이 강해졌다는 말로 수동태로 쓰여 ‘튼튼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리와 발목이 있었지만 도무지 약하여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던 것이 힘을 얻어 벌떡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성전을 오가는 사람들을 일평생 보아왔습니다만, 자신은 들어갈 수 없는 문이었습니다. 앉은뱅이에서 고침을 받고 일어난 이 사람은 사도의 손을 잡고 일어난 다음에 가장 먼저 한 일이 제자의 무리와 함께 성전으로 들어간 일입니다. 유대인이었지만 언약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소외되었던 것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구걸하던 사람으로 성전 문 안에 있는 것을 도무지 알지 못했던 그는 이제 그토록 소망하고 갈망하던 성전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전 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사람으로 회복되어 구원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9, 10절을 봅시다.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미문 앞에 일평생 구걸했던 이 앉은뱅이를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었고, 앉은뱅이의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알아보았습니다. 그가 나음을 입어서 뛰고 걸으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심히 놀랐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된 건강한 두 다리로 껑충껑충 뛰고, 걷고 하나님을 높여 찬양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자신의 몸에 일어난 믿을 수 없는 변화를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이 믿을 수 없는 변화의 사실 앞에서 성전 경내의 사람들은 너무도 놀라워했고 놀라했습니다.
‘놀람’에 대한 원어적 의미를 더해서 설명하자면 ‘충격을 받았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성전에 올라올 때마다 보았던 앉은뱅이의 치료는 거부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신기하고 놀라운 이적 앞에서 사도들과 나음은 입은 앉은뱅이를 둘러싼 유대인 무리들의 심령가운데 경이로움으로 가득 두르게 되었습니다. 기적이나 표적 자체가 믿음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말 그대로 표적인 말씀이 진실임을 증거 하기 위한 것입니다. 병 고침 등과 같은 기적만을 추구하고 바라는 일은 기적을 현저히 잘못 사용하는 일이 됩니다. 기적이나 이적을 오용하는 사례들은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말씀이 실종되고 껍데기만 추구하는 데서 빚어지는 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첫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시대를 가져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승천하여 보좌에 계신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해서 교회를 일으키시고 복음의 말씀증거를 통해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부르고 계시는 모습을 봅니다. 걷지 못했던 사람은 은과 금을 받지는 못했지만 본질적인 것, 가장 귀중한 생명을 얻었고 나음을 받았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삶,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새로운 삶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죄악 된 이전의 삶에서 건짐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생명의 삶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이 선물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가장 부요한 사람들입니다.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건짐 받아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자녀들과 가족,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은과 금은 없으나 새 삶, 새 생명, 영생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