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7:3-14, 미스바의 회개와 에벤에셀의 하나님 24.2.7, 박홍섭 목사
하나님의 언약궤가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20년을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받으며 지냈습니다. 2절이죠.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 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여기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했다는 말을 쉽게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의 열정을 회복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사모하니라’라고 번역된 단어는 ‘탄식하다’. ‘애통해하다’의 뜻으로 사사 시대의 전형적인 패턴에 등장했던 이스라엘의 반응입니다.
삿 2:16-18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이거늘” 이 반복되는 패턴 중에 하나가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을 때 슬피 부르짖는 것입니다. 거기 슬피 부르짖었다는 단어가 사모했다고 번역한 그 단어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이 그런 상황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기랏여아림으로 돌아와 2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들은 블레셋으로 인한 압박과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3절 후반부에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는 말씀은 지금 이들이 블레셋의 손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힘들어하면서 탄식하고 슬피 부르짖고 있습니다.
왜 언약궤가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블레셋으로 인한 고통과 압제가 계속되고 있을까요? 몇 주 동안 계속 말씀드렸지만, 이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누리는 인격적인 신앙이 아니라 언약궤를 부적처럼 사용하면서 가나안의 우상이 보장하는 풍요와 성적 만족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함께 누렸던 미신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이들은 블레셋과의 두 번의 전쟁에서 3만 4천 명이 죽으면서 패했고, 언약궤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블레셋 도시들을 독종의 재앙으로 쑥대밭을 만드시고 스스로 벧세메스로 귀환하셨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은 그 언약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고 호기심의 대상으로 대하다가 5만 70명이 죽었습니다. 기랏여아림으로 언약궤를 옮기고 따로 그 궤를 지키는 사람을 두고 2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그런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가나안의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블레셋에 의한 고통과 압제로 징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징계를 당하면서 고통스러우니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달라고 탄식하지만, 여전히 우상을 버리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절의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사모했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바른 신앙의 열정으로 사모하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지 않습니까? 어려워서 탄식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만 정작 삶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것 말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사무엘이 말합니다. 3절이죠.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사무엘은 너희가 지금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섬기고 있는데 그것들을 제거하여 너희 마음을 여호와로 향하게 하지 않으면 슬피 울며 부르짖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핵심을 찌릅니다. 지금 이들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이들이 섬겼던 우상이 무엇입니까? 4절에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했다고 했으니 지금까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바알은 1929년 시리아의 북쪽 해안 도시인 우가릿에서 발굴된 텍스트에 의하면 ‘구름을 타는 자’로서 비를 내리고 채소를 자라게 하는 풍요의 신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스다롯은 바알의 파트너로 풍요와 사랑과 전쟁의 여신입니다. 역시 우가릿의 유적에 의하면 긴 머리에 벗은 몸을 한 여인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이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에는 소위 ‘신성한 매춘 행위’의 제의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 행위를 통해 하늘의 신 바알과 풍요의 여신 아스다롯의 성적 결합을 하고 그 결과 풍요의 비가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종교는 이토록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고 만족시키는 매력적인 종교였고 당시 이스라엘은 이런 가나안의 방식에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그냥 두시겠습니까? 20년 동안 블레셋으로 인한 고통과 압제를 허락하셨고 그들은 슬피 울며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의 미신적인 수준으로 떨어진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시키는 수단으로 사무엘을 선택하셨고 이제 때가 되어 그를 전면에 내세워 일하십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는 자리로 돌아가는 첫 발걸음을 떼어놓습니다. 4절이죠.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제 겨우 회복의 첫걸음을 떼었기 때문에 사무엘은 이들을 미스바로 모읍니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고 그들을 말씀과 기도로 다스립니다. 5-6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부었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공동체의 정결 의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맥카터), 공동체의 죄를 씻는 행위(볼드윈), 하나님 앞에서 물처럼 쏟아짐으로 자신의 비참함을 표시하는 상징적 행위(카일), 금식과 동일한 자기부정의 의미(고든)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물을 붓는 것이 이스라엘의 깊은 회개를 상징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이처럼 이스라엘이 사무엘의 주도로 우상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있는데 블레셋이 쳐들어온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 차리면 마귀가 가만있지 않습니다. 그냥 물러가지 않습니다. 더 난리를 치고 달려듭니다. 이스라엘은 두려워하면서 사무엘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메 하소서 하니”
전에는 법궤만 앞세워 하나님을 이용하던 이들이 지금은 사무엘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의지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이는 이스라엘을 위해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은 큰 우레로 이들의 기도에 응답하사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쳐주십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미스바에서 벨갈아래까지 블레셋을 추격하여 승리를 거둡니다. 사무엘은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기념비를 세우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으로 그 기념비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붙입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사방 지역을 도로 찾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입니까? 참된 회개는 그냥 슬피 울고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겼고 하나님은 이들을 오랜 시간 연단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우상을 버리는 자리로 돌이키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켰을 때 승리를 주셨고 사무엘은 이들이 이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기념하여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에벤에셀의 의미는 바로 직전의 승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사실, 엘리와 그의 두 아들 제사장이 죽고 언약궤를 빼앗기고 20년 동안 고통을 받고 살아온 모든 세월을 포함하고 그 전의 모든 세월도 포함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깨닫게 되면 승리와 성공만 아니라 패배와 실패도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고 간섭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기념비는 단지 기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돌을 볼 때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도우심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표징의 역할입니다. 여호수아 4:6-7을 보십시오.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기념비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영원히 증거하는 역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에벤에셀’의 기념비도 그런 의미입니다. 승리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패배도 하나님의 도우심이었고 실패와 고난과 고통도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음을 가르쳐주는 기념비입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렇게 도우실 것이라는 기념비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도우십니까? 우리는 늘 크고 작은 모습으로 갖은 종류의 우상을 만들지만,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깨트리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의지하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 빚어지고 만들어지는 그 사람 자체가 이제는 에벤에셀의 기념비입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를 도우셨다”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하나님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나를 외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구원하셨고 교회를 통해 그 은혜 속에서 양육 받게 하시며, 여러 손길과 수단으로 깎고 다듬고 만들어오셨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실 것입니다. 그 손길을 아는 자라면 누구라도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도우셨다고 고백할 수 있는 에벤에셀의 기념비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도우심을 증거하는 기념비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