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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는 세례받고 중생했으며 거룩한 삶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 신실한 기독교 신자도 타락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죄는 잔존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다. 웨슬리는 신자 안의 죄에 대해 삼중적인 구별을 했다. 죄책, 힘, 그리고 존재. 신자들은 죄에 대한 책임 및 그 능력에서는 해방을 얻지만, 죄의 존재에서 해방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회심 이후에도 두 가지는 바뀌지 않는다. (1)적은 이제는 구원받은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로잡기 위한 시도를 중단하지 않는다. (2)중생한 사람 안의 선택의 능력이 보존되도록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진 능력은 회심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얻었던 것을 상실할 가능성이 신자에게 실제적인 가능성으로 남는다. 이는 신자가 깨어서 스스로를 점검하며 회개해야 한다는 건강한 의식을 만들어준다. 이것이 건강한 이유는 병적인 집착이 아니라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는 말씀에 대한 확신에 근거를 두는 지속적인 마음씀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를 두 번째 측면으로 인도한다. 이런 죄가 어떻게 개인의 구원을 상실하도록 인도하는가. 이 문제를 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웨슬리가 생각한 구원의 서정 안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어떤 은혜일지라도 그것에서 떠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은혜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억누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부여된 의로움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서 자라가는 중이라면, 우리는 아울러 하나님에게서 떠나려는 움직임의 민감함이라는 면에서도 성장할 것이다. 그 움직임이 어떤 형태를 지니든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언제든지 은혜에 의해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 그리고 이는 처음 구원을 받을 때의 그 용서가 아니라, 우리의 발걸음을 재정비하며 계속 여정을 걸어갈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것이다.
죄를 범하는 행동 자체는 구원 상실의 근거 아니다
“타락한 자들을 향한 외침”이라는 글에서 웨슬리는 히브리서 6장 4-6절, 디모데전서 1장 19-20절, 그리고 베드로후서 2장 20-22절을 언급한다. 하지만 그는 이 본문들이 묘사하는 종류의 사람들조차 구원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이 깨어 있으면서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평가하는 태도를 유지하며 적절한 회개를 하는 일과 무관하게 그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할 첫 번째 사항은, 죄를 범하는 행동 자체는 그 본질상 구원을 상실하는 근거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및 그분 안에 서 있다 함은, 일시적으로 죄에 빠지는 일이 그 시점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바를 취소시킬 정도로 허망한 것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길과 뜻에서 출발한 것에 관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회개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동일한 성령이시다.
구원의 상실은 심각하며 장기적인 경험들과 더욱 많이 관련된다. 웨슬리는 은혜에서 영원히 떨어져 나가는 결과를 가져오는 두 가지 주요한 길을 말한다. 죄를 고백하지 않는 것 및 실제로 배교를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곧 보게 되겠지만, 이 두 길조차 회복의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은혜 안에서 및 우리 주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데 분명 장애가 되는 요소들이기에 방비가 필요한 일임에 분명하다. 이 두 가지 성장 중 어느 것의 가능성이라도 줄인다는 것은 우리를 배교 사건의 발생에 더욱 취약하게 노출시키는 것이다.
자발적인 범죄, 비자발적인 범죄
웨슬리에게 고백하지 않은 죄란 알려지지 않은 죄라기보다는 의식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은 채 그것을 지속하는 죄다. 그리스도는 우리에 대한 죄의 권세를 파괴했지만,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은 행동과 태도들로 되돌아갈 능력을 상실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일은 우리가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아는 것과 상관없이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스스로의 선택 능력을 잘못 사용함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웨슬리가 이 주제를 살피는 또 다른 방식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논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켰다. 웨슬리는 루터적인 관점인 의인인 동시에 여전히 죄인이라는 개념을 유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는 그에게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웨슬리는 회심 이후의 죄의 문제에 대한 딜레마를 처리하기 위해 영원한 안전론을 내세우는 칼빈주의자의 주장 방향으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그는 신자 안에 모든 죄의 잔재는 사라진다며 “죄 없는 완전”을 가르친 모라비안 교도 같은 그룹들을 따라갈 수도 없었다.
그 대신 웨슬리는 또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그 대안이란 비자발적인 죄와 자발적인 죄를 구별하는 것이었다. 비자발적인 범죄(즉, 우리가 그런 일을 했다는 지각이 없이 저지르는 죄)들은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발견해서 더 이상 실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지만 자발적인 죄(알고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의도적으로 범함)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회개하지 않는다면 치명적인 것이 된다. (이 두 영역의 모든 죄와 관련해서) 영원한 안전이라는 주제는 지속적인 회개의 문제에 달려 있다. 우리는 웨슬리가 이해한 신자의 회개관을 구체적으로 살피기 전에, 개인이 아직 고백하지 않은 죄를 바르게 다루는 데 실패하는 과정이 어떤지에 대해 명확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은혜에서 떨어진 상태란?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한 (즉, 삶의 매순간을 이런 태도와 행동으로 살아감) 죄를 짓지는 않는다. 하지만 유혹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성령은 우리가 양심에 따라 합당한 반응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수단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마귀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이런 유혹의 때에 은혜는 그것을 이겨낼 힘을 공급하기 위해 찾아온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 실패하고 죄를 범할지라도, 성령은 여전히 우리에게 회개하는 은혜를 주시며 회복을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고 찾으신다. 만일 우리가 성령께 주의를 기울인다면 경고의 신호를 듣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믿음 안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그분의 은혜를 구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점차 유혹에 굴복한다면 그것이 더욱 즐거워지기 시작할 것이다. 성령은 근심하실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약해질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식어질 것이다. 성령은 더욱 날카롭게 우리에게 경고하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강 곡선을 고집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듭나기 전에 알던 과거의 모습에 가까운, 본질적으로 반역스러운 삶을 재개하는 수준에 이르도록 상태가 악화될지도 모른다. 그런 상태에 놓인 우리를 “은혜에서 떨어졌다”고 합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은혜에서 떨어졌을 때조차 은혜를 넘어서 타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아는 것은 필수적이다. 믿음의 씨앗은 심겨진 채로 남아 있다. 성령은 활동적인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씨앗은 회개와 믿음에 의해 여전히 다시 생기를 회복할 수 있다.
고백하지 않은 죄의 위험성
하나님에 의해 거듭난 자들이 지닌 위대한 특권은 그들 안에 죄의 존재가 멈추는 것, 즉 죄가 더 이상 그들에게 전가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특권은 (회심 후의) 죄가 그들이 결코 실제로 회심한 적이 없다는 점을 입증한다는 주장과도 무관하다. 그 ‘위대한 특권’은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신 바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죄에 복속되어 있거나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어야만 하는 굴레에 더 이상 얽매여 있지 않다. 이는 고백하지 않은 죄가 웨슬리의 신학에서 그토록 중요하면서도 서글픈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와 그분의 은혜가 막아줄 수 있는 일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런 방지는 웨슬리가 신자의 회개라고 부른 바를 통해 제공된다. 이런 회개는 우리가 칭의를 얻은 최초의 회개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점들을 지닌다. 두 회개는 모두 죄를 시인함과 은혜를 떠나서는 변화받을 수 없는 우리의 무력함을 또한 인정하는 일과 직결된다.
다만 차이점은 용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아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회심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과거의 경험이 전혀 없이 회개를 한다. 반면 회심 후에 우리의 회개는 그분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확신의 맥락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고, 죄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그 무엇보다 은혜는 훨씬 좋은 것임을 안다.
회심 후에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죄의 끔찍함과 그것으로부터 멀리 떠나야 할 필요성을 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은혜를 아무리 많이 경험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구원의 서정 속에서 걸어 나아갈 우리의 여정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받아 온 은혜를 적극적으로 누리는 데서 항상 떠날 수 있는 여지를 지닌 존재들이다. 여정 중에 (은혜를 떠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웨슬리가 ‘타락’이라고 부른 상태에 있게 된다. 이 상태에 놓인 사람들의 문제는, 회심 이후에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인해 자신은 용서받을 가치가 없거나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타락한 신자들의 더 큰 위험은 더 심한 타락이 아니라 절망이라고 믿었다. 신자들은 우리가 위에서 본 대로 성령에 의해 죄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된다. 우리가 그 각성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회개로 나아가느냐 혹은 후회로 나아가느냐를 결정한다.
토머스 오든은 웨슬리주의의 관점을 이렇게 표현한다. “교만보다 절망으로 인해 더 많은 신자들이 파멸한다. 한때 영적 전투에 임했던 많은 이들이 이제는 더 이상 힘들여 애쓰지 않는다. 그들은 승리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승리의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도록 계속해서 초대하심을 통해 그 승리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죄를 고백하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상태에 머물기로 선택한다면 어찌 할 것인가?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공급하심과 함께 놓인)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사뭇 놀랍게 느껴졌기 때문에, 웨슬리는 신자들의 믿음의 ‘파선’(딤전 1:19)에 대해 암시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말하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내세웠다.
그리고 본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 번 파선한 배는 후에 다시 구조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조차 그는 이런 망가진 상태에도 근본적으로 개입하는 하나님의 은혜(하나님은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재차 그러실 수 있는 분이다)의 가능성을 완전히 저버리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 질문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소. 물론이오. 한 번 혹은 백 번이 아니라 셀 수 없이 이런 일들을 많이 보았소. 그들은 타락했다가 이제는 올바르게 서 있소.” 바로 이것이 웨슬리가 생각한 은혜의 낙관주의인데, 그것은 그 은혜의 승리를 궁극적으로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정도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웨슬리의 은혜 신학은 영원한 안전과 매우 근접해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즉, 그는 은혜가 사람의 결정에 의해 좌절될 가능성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실상 이는 특히 그리스도인의 결정인 경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행여 그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이런 낙관주의 안에 담긴 주요한 차별성을 말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낙관주의적 확신은 하나님의 택하심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의 특성과 활동 때문에 존재한다. 또한 이 확신은 하나님의 작정이 아니라 철저히 우리를 따라다니며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근거를 둔다. 하지만 이런 낙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며 거부당할 수 있다. 그것도 영원히 말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다시 한 번 ‘난파’라는 비유적 주제를 생각하도록 한다. 이는 완전한 상실을 나타내는 은유다. 만일 우리가 고백 없이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면, 우리는 (그 기간이 얼마가 되든) 일시적 타락에서 배교 상태로 이동할지도 모른다. 배교 상태는 우리가 분명히,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의 공적을 거부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웨슬리는 그것이 죄를 위한 유일한 희생제물을 저버리는 것으로서 더 이상 다른 희생제물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즉,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온 세상의 죄를 위해 행하신 전적이며 완전한 대속”의 희생제물을 거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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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의 견해의 토대를 살펴봄을 통해 이 장을 마무리짓기 전에, 우리는 지금까지 말한 내용 전부의 요약을 웨슬리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전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견해와 칼빈주의자들의 생각의 차이점을 모르지 않았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알려진 다섯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확대시켜서 명확하게 요약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원죄와 이신칭의를 부인한다고 말하는) 첫 두 가지 차이점은 완전히 잘못된 평가이기 때문에 관심조차 둘 가치가 없다고 그는 보았다. 하지만 나머지 세 차이점은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답변이 필요했다. 웨슬리는 이렇게 적었다.
절대 예정이냐, 조건적 예정이냐가 관건
“칼빈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사이에는 세 가지 또 다른 질문과 관련해서 부인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다. 여기서 그들은 서로 갈린다. 전자는 절대 예정론을 믿으며 후자는 조건적 예정만을 믿는다.
첫째,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영원 전에 어떤 이들은 구원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도록 절대적으로 작정했으며,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이 구원받을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주장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이 기록된 말씀을 지닌 모든 자들과 관계를 가지기로 영원 전에 작정했다고 본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 그리고 “그리스도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즉, “아담 안에서 모든 자들이 죽었기에” 그리스도는 아담의 모든 후손을 위해 죽으셨다는 말이다.
둘째,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절대적으로 저항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번개가 치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그 누구도 은혜를 능히 저항할 수 없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비록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이 저항할 수 없도록 역사하는 어떤 경우가 혹 있을지라도, 통상적 차원에서는 누구라도 (그가 구원받도록 해야 했던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한) 그 은혜를 저항해서 파멸에 이를 수 있다.
셋째,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참 신자가 은혜에서 탈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참된 신자라도 단순히 죄의 더러움에 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최종적으로 영원히 멸망에 이르는 차원으로 “믿음과 선한 양심에서 파선”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실상 뒤의 두 논점인 저항할 수 없는 은혜와 탈락할 수 없는 견인은 첫 논점인 무조건적 작정의 당연한 결과물이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어떤 이들을 구원하기로 영원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작정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저항할 수 없으며 (저항할 수 있다면 구원받지 못함) 아울러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부터 최종적으로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두 가지 논리적 결론이 당연히 도출된다.
결국 세 가지 질문은 하나로 수렴된다. “예정은 절대적인가 혹은 조건적인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예정이 조건적이라고 믿으며, 칼빈주의자들은 예정이 무조건적이라고 믿는다.”
-스티븐 하퍼(미국 애즈베리 신학교 부총장), ‘한 번 받은 구원 영원한가’(부흥과 개혁사)에서

첫댓글 전도자의 입장에서 특히 칼빈의 이중예정론과 제한속죄설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불완전하지만 웨슬리의 견해를 더 성경적이라고 보는 이유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자들이 복있습니다.
칼빈과 웨슬리는 같은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 구원론에 차이가 있을까요? 저는 이런것들이 궁금할때가 있는데,,스테판님은 이런 것을 어떻게 이해 하시나요?
정원 님, 선택과 예정론 게시판에 답글을 올려두었습니다. 이 문제는 교회사에서 오랫동안 논쟁해온 주제인지라 쉽게 댓글로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도 해서이지만, 던지신 질문은 많은 성도들이 품고 있는 것이기도 해서 따로 올렸습니다.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