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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김은 실패와 좌절로 눈물흘리는 곳(2293.2025.2.16)
삿2:1-5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기 임재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말씀으로 만나주시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힘을 얻는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치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목사님이 몇해전에 눈이 나뻐져서 안과를 갔습니다. 일년동안 살펴보더니 수술하자고 해서 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눈에 넣는약을 넣으면서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눈이 좋아서 안경도 안쓰고 하면 참 감사해야 합니다. 안과 전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눈에는 늘 눈물이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눈물은 지방층, 수성층, 점액층 세 가지 성분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루 종일 일정량 지속적으로 생성되어서 눈의 전면에 눈물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눈물이 생기지 않아서 눈물층이 마르게 되면 안구건조증이 생겨서 눈에 각종 병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눈물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늘 울어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눈물의 기능을 세 가지로 요약해 놓고 있습니다. 눈물은 눈을 보호한답니다. 눈물은 세정작용, 윤활작용, 그리고 항균작용을 통해서 눈을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 해소 기능을 한답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스트레스성 눈물은 안구보호용 눈물과는 성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진통제인 엔돌핀이 함유되어 있어서 정신적 고통을 줄여준답니다. 정서적 표시 기능을 한답니다. 울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답니다. 그래서 ‘여자의 눈물은 남자를 움직이고, 남자의 눈물은 세상을 움직인다’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눈물과 다른 눈물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다른 말로 영적 눈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눈물은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 씻어 줍니다. 우리의 영혼을 치유해 줍니다.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해 줍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 눈물이 우리의 영적 삶을 풍성하게 해 줍니다. 사람들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우리를 초라하게 만들고, 우리를 약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고, 또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우리의 눈물은 영혼의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눈은 눈물을 흘려야 그 기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눈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눈물을 흘려야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눈물 곧 하나님 앞에서의 눈을 말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주님 앞에서 많이 우십시오.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 기쁨의 눈물 이 눈물들은 능력의 눈물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보김이라는 곳에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이 능력의 눈물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 눈물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안 그래도 눈물 흘릴 일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오늘 설교 제목에 눈물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죄송합니다만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나오는 눈물은 안 좋은 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유익한 눈물입니다. 회복의 눈물입니다. 실제로 우리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다 필요해서 나오는 눈물이라고 합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면 눈물이 나와서 그 먼지를 씻어내립니다. 마음이 아프거나 슬프면 눈물이 흘러 그 마음의 아픔과 슬픔을 씻어줍니다. 만약 눈물이 말라버리면 눈의 건강도 좋지 않고 마음도 메마르게 됩니다. 어쩌면 지금 현대인들은 눈물이 말라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눈물을 보이면 약하게 보일까봐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과거 신앙생활을 하시던 분들을 볼 때 참 주님 앞에 눈물을 많이 흘렸던 것을 보았습니다. 은혜가 좋아서 주님 앞에 눈물을 흘리고, 마음이 아파서 주님 앞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주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조차 보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눈물 흘릴만한 일이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눈물이 말라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에 비해서 눈물이 없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눈물에 대한 말씀이 종종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고, 또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56:8절‘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우리가 이 땅의 모든 수고를 마치고 천국에 갔을 때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계21:4절‘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눈물이 있게 창조하셨고, 그 눈물을 육신을 위해서도 유익하게 하셨고, 마음을 위해서도 유익하게 하셨고, 특별히 신앙적으로도 유익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걱정이 있긴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은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이 예배 때마다 울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을 쏟으시면 어떡할까 걱정이 좀 되긴 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은 앞으로 괴로운 일로는 눈물 흘릴 일들이 없길 바라고, 은혜의 눈물, 감사의 눈물, 회복의 눈물은 주님 앞에서 흘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눈물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 눈물을 닦아주시고, 눈물 대신 웃음과 은혜를 더해주시길 축복합니다.
1.보김에 머무르지 말고 길갈의 신앙을 회복하라
요즘에는 많이 보이지 않지만 남자 공중화장실에 가면 써 있는 글이 있습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하지만 난 그 글이 맘에 들지 않습니다. 남자가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왜 남자는 눈물을 흘리면 안 될까요? 남자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남자답지 않다고 정해놓은 사람은 누굴까요? 사람은 웃기만 해야 할까요? 허허하고 웃어야 남자이고 눈물을 흘리면 남자가 아닐까요? 하지만 사람은 남자이든 여자이든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울면서 태어납니다. 사람은 누구이든지 웃을 때도 있지만 울 때도 있습니다. 웃을 상황에 웃어야 정상이지만 울어야 할 상황에 울어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울음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정에 병이 생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울어야 할 감정을 숨기고 마음에 올라오는 슬픔을 숨기고 그래서 자신과는 슬픔은 관계없는 척 살아갑니다. 그래서 ‘허허’거리며 밝은 척 좋은 척하며 삽니다. 하지만 삶은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은 울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던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사랑하던 사람과 이별도 하고 바라던 일이, 하고 싶은 일을 실패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슬픕니다. 그 슬픔을 우리는 눈물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럴 때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면 그 아픔을 눈물로 표현해야 합니다. 아니 엉엉 울 수 있으면 울어야 합니다. 땅을 치며 통곡할 수 있습니다. 데굴데굴 구르면서 울 수도 있습니다. 가슴을 치며 헉헉대며 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시원함이 있고 그래야 마음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울어야 할 때 울어야 새로운 인생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야 건강할 삶으로 갈 수 있으며 그래야 과거에 붙잡히지 않고 새로운 삶으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김’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그 지명의 뜻은 ‘통곡’혹은‘통곡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 높여 웁니다. 그것도 혼자서가 아닌 백성들이 모두가 울었다고 말합니다.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크고 처절했던지 그 장소의 이름이 ‘보김’이 되었습니다. 바로 통곡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땅이 되었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서 울었을까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본문1절‘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대체 이 여호와의 사자가 누구기에 이토록 온 민족을 울리고 또 울리고 소리 높여 울었을까요?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나님 자신, 더 자세히 말하면 제 2위 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여호와의 사자는 아브라함에게도 나타났고 야곱에게도 나타났고 모세 발람 여호수아 기드온 마노아 엘리야 다윗 다니엘의 세 친구 스가랴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영적 부흥은 이 여호와의 사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주감리교회 성도가 해야 할 기도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계22:7절‘내가 속히 오리니’하셨는데 여기 ‘오리라’는 헬라어 원문으로 ‘에르코마이’는 현재형으로 ‘오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또 갈망하는 심령에 예수님은 영으로 임하고 계시고 또 온전히 오실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많은 영혼들이 예수를 알게 되고 예수 믿어 구원을 받습니다. 고전12:3절‘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했습니다.
1절‘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어디에서 온 사자입니까? 길갈에서 온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죄를 씻은 회개의 장소요, 또 언약의 백성으로 믿음을 새롭게 한 할례의 장소요, 가나안을 정복하기까지 악을 무찌른 이스라엘 군대의 본부입니다. 그러니까 길갈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예표입니다. 그 공로를 기반으로 다가오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도 예수를 영접하면 그 은혜를 고스란히 받습니다. 길갈에서 온 여호와의 사자가 외친 말씀도 역시 복음입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이 말씀 속에 이스라엘의 구속사와 언약이 들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속사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가나안으로 옮겨주신 그 은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그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변함없이 믿고 사랑할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한 약속입니다. 이 언약을 어기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로 모인 곳이면 이 진리를 언제든지 반복해서 들려주었습니다. 이처럼 이 사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십자가 구속사건의 예표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새언약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이 원리대로 전한 사람이 바로 스데반입니다. 행 7장에서 스데반이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설명하다가 결론으로 예수를 전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길갈이라는 장소와 보김이라는 장소가 나옵니다. 이 두 장소에 상당한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장소를 가장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가나안 땅에 입성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여호수아 5장을 보면 길갈이라는 장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장소입니다. 그 동안 광야에서 행하지 못했던 할례를 길갈에서 행합니다. 그리고 광야생활 동안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유월절 절기를 길갈에서 지키게 됩니다. 이렇게 길갈이라는 장소는 이제 가나안에 첫 발을 내디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적으로 매우 의미가 깊은 장소가 됩니다. 이제 길갈에 본거지를 두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도 합니다.
길갈은 약속의 땅에서 처음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재정립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바로 세우는 그런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길갈로부터 시작된 가나안 땅에서의 모든 역사가 순조로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호수아도 죽습니다. 길갈에서 신앙부흥을 다짐했던 세대들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다음 세대들은 그들의 영적 본거지였던 길갈을 떠나서 보김으로 본거지를 옮깁니다.
장소야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들이 어디에서든 하나님만 중심으로 잘 믿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하나님을 소홀히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가나안 우상들에게 기웃거리며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합니다. 점점 신앙의 중심이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길갈에서의 영성은 이제 다 식어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보김으로 옮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모습은 더 이상 길갈에서의 신앙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 성경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복전쟁을 멋진 승리로 이끈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멋진 승리를 거두게 되고 그 기업을 분배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사기 성경에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전혀 달라집니다. 사사기에는 온통 부정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쫓아내지 못하고’ 이런 내용이 반복적으로 사사기에 기록이 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보김으로 옮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더 이상 길갈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보김은 영적 어둠으로 짙게 드리운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김은 실패와 좌절로 가득한 참담한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에서 보김으로 옮길 때는 더 잘 살겠다고 옮겼습니다. 더 좋은 나라 만들어 보자고 옮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더 좋은 장소로 옮겨도 그곳이 신앙의 터전이 되지 못하면 헛된 것입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적합하지 않으면 그곳은 참담한 장소가 되고 맙니다.
보김의 실패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실패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 보김으로 오신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큽니다. 우리 삶의 현장이 길갈이 되어야 하고, 예루살렘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곳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의 삶의 현장에 예배가 살아 있고, 기도가 있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살아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2.보김에 머므르자 여호와의 사자의 책망을 들은 백성들이 통곡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한 백성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절‘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들에 반하는 증인으로 서서 증거 하도록 명령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살피도록 하나님께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의 질문에 대답해야만 합니다. ‘너희가 한 이 일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고 묻습니다. ‘너희가 한 일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사사기 전체를 향해 던져진 질문입니다. 또한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자기 자신을 고발하는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하나님의 사자로 하여금 억양을 바꾸게 합니다. 하나님 사자의 음성은 따뜻하고 부드럽게 말씀도 하지만 무섭고 두려운 음성으로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했고 그들의 대적들을 쫓아내겠다고 했지만 이제 그 땅 거민들을 쫓아내겠다는 약속을 취소하겠다는 위협으로 돌아갑니다. 도리어 이 백성들이 큰 위협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들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옆에’ 머무르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옆구리의 가시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신들은 이스라엘의 올무로 매우 가까이 자리 잡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향한 ‘올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가나안 사람들과 그들의 신들이 하나님께서 이전에 경고하셨던 것처럼 그들의 올무가 될 것입니다.
회개는 성령이 역사하실 때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책망을 들은 백성들이 통곡했습니다. 회개는 자기의 죄악을 하나님께 드러냄으로 사탄의 힘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많으신 궁휼하심으로 죄사함을 받는 통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죄사함을 통해서 거룩함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회개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는 유일한 길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온전히 뒤집어 쓰는 기회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자녀된 권세를 온전히 회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죄가 생각나는대로 회개할 수 있는 은혜가 충만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실패하지 말고 포기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외침을 들은 유대인들이 ‘형제들아 어찌할꼬’ 하며 부르짖은 것을 연상시킵니다. 이처럼 성령이 역사하실 때 믿음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게 됩니다. 나도 모르게 그런 회개가 터져나옵니다. 계1:7절‘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 말씀은 재림 시에 있을 사건이기도 하지만, ‘에르코마이’로 임하시는 현재적인 예수의 임재하심 가운데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순간에도 성령으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반면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세상 것이 옆구리에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혹은 알고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사1:5-6절‘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한술 더 떠서 계3:17절‘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했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유1:18-19절‘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했습니다.
4절‘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여호와의 사자의 꾸짖는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김에 크게 울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흘린 보김의 눈물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지금 위기를 느꼈습니다. 과거 길갈에서의 추억들에 비해 지금 보김에서는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음을 느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위기를 느꼈지만, 그들에게 마땅한 대책도 없었습니다. 그런 막연함으로 힘을 잃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실패의 자리, 낙심의 자리까지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처음 죄를 짓고 어쩔 줄 몰라 에덴 동산 수풀 뒤에 숨어 있었던 아담과 하와를 찾아와 불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지쳐서 광야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었던 엘리야 선지자를 찾아와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고향으로 가서 다시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고 있었던 베드로를 찾아와 만나주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살다가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을 찾아와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더 좋은 것들을 좇아가다가 그만 세상에 더 가까워질 때가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주님께서는 그곳까지 찾아와 우리를 부르시고 만나주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감격을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이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 주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또 한 곳에 소개가 됩니다. 유다 백성들이 무려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훼파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리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도 재건을 합니다. 이제 성전도 재건되었고, 성벽도 재건이 되었으니 신앙회복을 위한 부흥회가 준비됩니다.
느헤미야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불러 모읍니다. 성전을 재건하던 중 발견된 두루마리 성경을 학사였던 에스라가 낭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수많은 포로귀환한 유다 백성들이 그 앞에서 통곡을 하면서 웁니다. 느8:9절‘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에스라가 낭독하는 말씀을 듣고 있던 백성들이 얼마나 울었던지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말릴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울었던 이유가 오늘 본문의 보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울었던 백성들은 에스라가 낭독하는 성경을 들으면서 그 조상들의 죄악을 회개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 있던 갈대아 땅까지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그들에게 다시 은총의 기회를 주셔서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신 은혜를 생각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누가 하나님 앞에서 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은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보김에서 흘린 눈물이 여호와의 사자가 전하는 말씀을 깨달았을 때 흘린 눈물이었고,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 흘린 눈물도 에스라가 낭독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에 울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말씀이 깨달아지면 우리에게도 깨달음의 눈물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 은총이 깨달아지면 감격의 눈물이 우리에게서도 흐르게 될 것입니다. 감성적인 설교를 들어서 흐르는 눈물과는 다른 눈물이 우리의 영혼으로부터 흐르게 될 것입니다. 슬픈 설교를 들어서 흐르는 그런 눈물이 아닌 우리 영혼에서 솟아나는 그런 눈물이 우리에게도 흐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이 깨달아져서 흐르는 눈물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합니다. 그 눈물에는 치유가 있고, 능력이 있고, 회복의 은총이 있는 눈물입니다.
3.눈물을 닦아주실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습니다.
주일날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통곡하지도 않고 조금 짧은 말로서 잘못했다고 하고 월요일부터 그저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그들과 어울려 똑같이 살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가슴도 치지 않고 그저 잘못했다고 회개하고 예배드리고 또 세상에서 똑같이 삶을 반복하는 모습,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러한 우리들을 향해 하나님의 우리에게 약속한 복을 거둬가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기로 한 그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럴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가 진정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거둬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거둬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셨지만 그것을 깨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사랑을 알고 그 약속을 알고 바르게 응답해야 합니다. 충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성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는 상주감리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 높여서 울며 한 일은 벧엘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기 제사는 번제로서 온전한 헌신 혹은 예배생활의 상징입니다. 죄만 회개하는 것으로 끝나면 또 다시 범죄합니다. 예배생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죄에서 떠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 믿는 것이 가장 큰 죄이고, 예배생활에 게으른 것이 그만큼 큰 죄라는 사실을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알아야 합니다.나태하거나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이십니다. 사11:2-3절‘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라 했습니다.
예배회복하지 않으면 은혜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본문 5절‘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김에서 눈물만 흘리고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눈물은 감정의 눈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그들의 눈물은 깊은 깨달음에서 나온 영적인 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들의 눈물을 닦아주실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습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아파서 눈물 흘리고, 슬퍼서 눈물 흘리고, 외로워서 눈물 흘리고, 감동해서 눈물 흘리고,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런 눈물은 눈물이 마르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김에서 흘린 눈물은 달랐습니다. 보김의 눈물은 그들을 변화시키는 눈물이었습니다. 보김의 눈물은 그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눈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가정과 자녀자손을 생각해도 눈물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를 생각해도 눈물의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자신의 건강과 삶의 고단함을 생각해도 눈물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사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의 기도가 더욱 필요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산다고 눈물 흘릴 일이 안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사는 것도 꼭 필요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에 가장 소중한 무엇인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저는 요즘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건강을 생각하며 기도하면 눈물이 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삶을 생각하면 그 삶의 노고가 느껴져서 눈물의 기도가 되곤 합니다. 제가 우리 성도님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억지로 흘리는 눈물이 아닌, 성령님께서 감동해서 흘리게 하시는 눈물이 있다면 마음껏 흘리며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나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도 여러분의 마음의 응어리진 것들과, 답답한 것들과, 상처난 것들을 눈물의 기도와 함께 씻어내리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에 위로와 새 힘을 더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시대 보김에 있었던 그 부흥, 그리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였던 그 부흥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부흥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요셉지파가 벧엘을 회복함과 같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경외하며 임하시기를 갈망하는 자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모두가 회개하여 예수 앞에 돌아오고 그 복음의 은혜를 누리며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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