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문학 특집)
능주영흥주조장, 화순의 정(情)을 빚어낸 시간들
이성교
능주전통시장과 함께 흥망성쇠의 길을 걷던 능주영흥주조장은 현대식 건물로 바뀌며 흔적조차 지워진 채 기억 속으로 묻혔다. 막걸리가 사양길로 접어들자 1987년 지역 주민과 막걸리 애호가들의 사랑을 외면할 수 없어 도곡능주한천합동주조장이라는 이름으로 도곡에 법인을 설립하여 명맥을 이었다. 도곡생막걸리는 지금 그런 역사를 통해 다시 명품으로 거듭나 막걸리 애주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죽청마을은 소재지인 도곡면과 이웃한 능주면의 삼각형 꼭지점에 위치한 지점에 있었다. 두 지역의 거리가 약 4km 남짓이었지만 교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시절 능주는 우리 마을을 비롯하여 인근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오일장이 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이 서지 않는 날에도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는 가게가 있어서 주변 지역 상권의 중심지였다.
내가 능주장을 따라간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에 밟힐 만큼 복잡한 장날 처음 마주했던 능주영흥주조장의 신선한 충격과 그리움으로 묻혀버린 기억의 일부를 정리해 본다.
능주면의 어느 장날 술밥라 부르던 고두밥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간지럽히던 풍경이 떠오른다. 영흥정미소와 함께 있던 영흥주조장은 단순히 술을 만드는 공장이 아니었다. 고단한 지역민들의 갈증을 씻어내던 거대한 마음의 쉼터이자 만남의 중심지였다.
당시는 양식으로 쓸 곡식조차 넉넉하지 않고 보관 시설도 열악하던 때라 쌀로 빚는 막걸리는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구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그러한 때에 대형 정미소를 함께 운영하던 영흥주조장은 최상의 재료로 술을 빚을 수 있었다. 그래서 능주장이 성시를 이루던 때와 맞물려 70년대 말까지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어린 시절 우리 마을에는 ‘능주장 양반’이라 부르는 어른이 계셨다. 장날이면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데도 꼬박꼬박 장길을 나서는 그분을 사람들이 장난삼아 부른 별칭이었다. 빳빳하게 다린 흰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눌러쓰고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를 마치 안마당처럼 여유롭게 걷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아마도 그런 고생 끝에 기다리고 있을 막걸리 한 바가지의 정취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날이면 주조장 앞은 인근 마을 소식을 나누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는 주로 능주장 양반 같은 사람들과 소달구지에 마을 사람들의 장짐을 싣고 온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의 대화는 주내 소식은 물론 자기 마을의 대소사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들 중에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막걸리 바가지 돌리듯 맛깔나게 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새 소식은 그 사람들을 통해 마을마다 조금씩 다른 이야기로 재미를 더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자비량 방송 통신원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사돈 아니시오?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허허, 이런 우연이 있나요. 장 보러 나오셨구먼요.”
때로는 약속도 없었는데 북적이는 장터 한복판에서 사돈을 마주치기도 했다.
“요새 농사는 좀 어떠시오?”
“말도 마시오. 가물어서 애가 타더니만 어제오늘 비가 내려 한시름 놨지요.”
산중에 사는 사돈의 천수답을 걱정하는 사돈의 안부에 투박한 두 손을 잡고 국밥집에 자리를 잡는다. 펄펄 끓는 국밥에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인 식탁은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정감이 넘쳤다.
사돈과 나누는 막걸리 한 사발 속에는 음료 이상의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격식 없는 안부와 웃음소리는 장날의 소란 속에서도 유독 또렷했다. 친정아버지는 딸의 안부가 궁금해서 자꾸 사위의 근황을 물으며 딴청만 부리다 끝나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 시절 사람들은 그렇게 얼굴을 맞대고 부대끼면서 세월을 견디는 법을 배웠다.
결혼식이 열리는 날이면 막걸리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되었다. 초저녁이 되면 신랑과 신부 또래 청년들이 술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막걸리에 젓가락 장단으로 구성지게 노래를 불렀다. 그때 방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열어젖힌 문밖 마루에 서서 구경했고, 막걸리 주전자는 안팎으로 쉴 새 없이 돌았다. 이처럼 막걸리는 격식과 체면에 얽매이지 않고 인심과 정으로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다.
새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온 동네가 들썩이던 때 막걸리는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마을마다 주문량이 늘었고 주조장은 호황을 누렸는데 밀려드는 주문량으로 배달꾼 아저씨는 쉴 틈이 없었다. 짐바리 자전거에 막걸리 통을 위로 두 통, 좌우로 두 통씩 달고 ‘딸랑딸랑’ 종소리를 울리며 신작로를 달렸다. 자갈길 흙먼지 속에서 여섯 통을 싣고 달리는 배달꾼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조이게 했다. 곡예사처럼 달려서 도착한 배달꾼은 환호하는 마을 사람들의 위로를 받으며 땀범벅이 된 잠방이와 목에 건 수건을 짜내며 쉴 틈 없이 막걸리를 배달했다.
당시 주조장의 막걸리는 늘 충분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때로는 마을에서 잔치 도중 술이 떨어져 급히 주조장을 찾았다가 허탕을 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우리 마을은 그런 어려움으로부터 예외였다. 능주영흥주조장의 배달꾼 주 서방의 처가가 우리 마을이었기 때문이었다. 주 서방에게 부탁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막걸리를 구해다 주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고마운 마음으로 그분을 동네 사위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옛 그대로인 삼거리 골목길 왼쪽, 현대식 건물이 들어선 영흥양조장과 영흥정미소 터 전경>
|
<동네 사위 주 서방과 같은 배달꾼이 막걸리를 싣고 달리던 나무술통과 짐바리 지전거> |
이제 영흥주조장 자리에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높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도, 중절모를 쓴 노신사의 발걸음도, 짐바리 자전거의 딸랑거리는 소리도 멈추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살아있는 그 시절의 그리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막걸리처럼 더 깊게 숙성되어 간다.
짐바리 자전거가 실어 나른 것은 술만이 아니라 서로의 고단함을 위로하던 지극한 마음이었음을 기억한다. 비록 시대는 변하고 영흥주조장의 간판은 내려졌어도 바가지로 마시던 주조장 막걸리와 사발에 부어 마셨던 따뜻한 정(情)은 지금도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보글보글 익어가고 있다.
첫댓글 이성교 선생님 감사합니다. 능주 도곡 막걸리 이야기 너무 생생합니다.
이런 내용을 정리할 기회를 만들어 주시고 지명해 주셔서 내가 감사합니다.
혹시 회원님들께서 오해하실까 봐 파일과 함께 메인 화면에 글을 올리는 이유를 세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폰의 대중화로 컴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데 파일을 다운로드하는데 불편합니다.(내 경험)
2. 폰에 한글 프로그램이 설치되지 않은 일부 회원님들께서 불편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3. 의무감에 글을 쓰지만 나중에 출판물을 보면 비문과 중복 문장 등 퇴고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회원 여러분들의 솔직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도 몇 군데 고칠 부분이 보이지만 회원님들의 도움을 종합해서 수정하려고 합니다. 부담 없이 합평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