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世 득기(得己) 만회공
자(字)는 중지(重之), 호(號)는 만회(晩悔)이다.
생부(生父)는 이판공 극례(克禮)이다.
1570년, 선조(宣祖) 경오(庚午) 10월 28일에 태어났다.
1589년 기축(己丑 20세)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제릉참봉(齊陵參奉)을 지냈고,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지냈다.
광해(光海) 경술(庚戌 1610)년에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시고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다.
서궁(西宮)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걸어서 도성을 나가 태안 바닷가 골짜기에 은둔하였다.
널리 배우고 이치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탁월한 절조와 독실한 행실로 한 세상에
명망이 있었다.《독서참의(讀書僭疑)》를 저술하였다.
1622년, 광해(光海) 경술(庚戌)년 9월 20일에 돌아가셨다. 나이 53세였다.
아들 시(諰)가 귀하게 되어 이조참판(吏曹參判)과 양관 (홍문관,예문관)제학(兩館提學)으로 추증되었다.
묘는 성남시(城南市) 분당구(盆堂區) 금곡동(金谷洞)에 있는데, 해좌(亥坐남동남)이다.
표석(表石)이 있는데, 포저(浦渚) 조익(趙翼)이 묘지(墓誌)를 지었고,
사위 만사(晩沙) 심지원(沈之源)이 묘갈(墓碣)을 지었으며,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전서를 썼다. 1693년 숙종(肅宗) 계유(癸酉)년에 도산서원(道山書院)에서 제향 되었으나, 1866년 고종(高宗) 병인(丙寅)년에 제향이 폐지되었다.
그 후로 56년이 지나 1921년 신유(辛酉)년에 단(壇)을 설치하고 다시 제향을 하였다.
그 후로 48년이 지나 1968년 무신(戊申)년에 서원을 복원하고 제사를 지냈다.
유집(遺集) 다섯 권과 참의(僣疑) 다섯 권이 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에 추증(追贈)된 전주 이 씨(全州 李氏)로
부친은 구성도정(龜城都正) 첨(瞻)이고, 조부는 풍산군(豐山君) 종인(宗麟)이며,
증조부는 덕양군(德陽君) 기(岐, 중종의 5남)이고,
외조부는 참찬(參贊) 창령(昌寧) 성세장(成世章)이다.
1571년 선조(宣祖) 신미(辛未)년 11월 25일에 태어났고, 1609년 광해(光海) 기유(己酉)년 1월 23일 돌아가셨다. 5남 2녀를 낳았다. 묘는 합장하였다.
부인 남양 홍 씨(南陽洪氏)는 부친이 첨지(僉知) 위(偉)이다. 묘는 감역공(監役公, 권극관(權克寬))의 묘 아래에 있었는데, 대전 광역시(大田廣域市) 동구(東區) 판암동(板岩洞) 뒷산의 차일봉(遮日峰)에 있는 최씨(崔氏)의 묘 위쪽으로 이장(移葬)하여 모셨다.
오좌(午坐, 정북향)이다. 아들 하나를 낳았다.(덕봉공)
부인 경주 최 씨(慶州崔氏)는 부친이 이조판서(吏曹判署)로 추증된 확(確)이며,
조부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안세(安世)이고,
증조부는 병조판서(兵曹判書) 린(燐)이고, 외조부는 대사헌(大司憲) 풍산(豐山) 유경돌(柳景湥)이다. 묘는 서구(西區) 탄방동(炭坊洞)에 있었는데, 차일봉(遮日峰) 아래 기슭으로 이장하여 모셨으니, 정좌(丁坐 북동북향)이다. 상석(床石)이 있다.(덕봉공을 기르심)
딸 하나를 낳았다.
부인은 종실(宗室)인 구성 도정(龜城都正, 이첨(李瞻))의 따님으로서 5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적(𧧌)이고, 차남은 구(訅)이고, 다음은 심(訦)이고, 그 다음은 증(譄)이고, 그 다음은 시(諰)인데, 구(訅)와 증(譄)은 일찍 죽었다. 딸은 두 명으로, 장녀는 홍문관 교리 심지원(沈之源)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한빈(韓彬)에게 시집갔다. 또한 서자(庶子) 1녀 1남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