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골로새서 2장 8-15절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
계속해서 골로새서를 살펴보고 있지만 골로새서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미 우리가 살폈지만 골로새서 1장 15절부터 20절을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고 말하며,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그리고 모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인간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이란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고 말하는 게 어떤 면에서는 핵심으로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되, 하나님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기 때문에 몸 된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고, 또한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분명히 인식하라는 측면에서 바울은 교훈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지난주에 살핀 골로새서 2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 2절 하반부와 3절을 통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한다고 하면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보화가 다 감추어져 있다. 달리 말하면 보화 가운데 일부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냥 보화가 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보화입니다. 더 이상 채울 수 있는 보화란 없다는 소리입니다. 충만한 상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상태!
그렇기 때문에 교훈하는 것이 뭐냐? 골로새서 2장 6절과 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간단히 말하면 믿음에 있어 흔들리지 않도록 그리스도 안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강조가 있느냐? 골로새 교회 안에 거짓된 가르침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된 가르침의 핵심은 뭐냐 했을 때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한다는 내용이 아니라 그리스도 외에 뭔가를 덧붙이고자 하는 것이 있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스도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동일합니다. 8절을 보시면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여기 보면 철학이라는 말이 있는데,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필로소피아’(philosophia)라고 해서 ‘필레오’(phileo, 사랑하다)라는 단어와 ‘소피아’(sophia, 지혜)란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로서는 인생이나 세계 등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하는데, 지금 바울이 주의하라는 것은 그런 학문의 모든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이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모든 것,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인간의 이성을 따라 고안해 내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매튜 헨리 주석을 보면 “이것은 신앙을 왜곡시키며 인간의 지혜를 들어 하나님의 지혜와 대립하게 하며 인간의 상상력을 즐겁게 하면서 한편 그들의 믿음을 파멸시킨다”고 말하는데, 주석의 내용에 근거하자면 신앙과 관련해 인간의 지혜와 상상력이 들어가 신앙을 왜곡시키거나 믿음을 파멸시키는 것을 철학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칼빈의 경우 사람의 머리에서부터 나오는 모든 거짓된 교훈들을 정죄하고 있다고 하는데, 쉽게 말하자면 교회 안에서의 거짓된 가르침 자체를 지금 바울은 철학이라는 말로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철학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16절 이하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내용이 의식법에 관한 문제입니다. 1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러한 것들은 다 헛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속임수를 써서 마치 그것이 괜찮은 것처럼 위장하려 하지만 결코 괜찮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그래서 ‘헛된’ 속임수라 말합니다. 마치 텅 빈 것처럼 무익하며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헛된 속임수로 말미암아 거짓된 가르침이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왜 철학이 헛된 속임수인가?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요,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바울이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큰 틀로서 보자면 사람의 전통이라는 것이고, 세상의 초등학문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이기 때문에 결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의식법 자체를 생각해 볼 때 의식법은 구약 시대에 분명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율법 가운데 의식법을 명하셨고, 그 의식법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내다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그림자 역할을 했던 것이 의식법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초등학문일 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구약의 교회를 유아교회라고 하는데, 바로 그 유아교회를 위한 방식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느냐? 4장 1절 이하에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1-5) 그러니까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던 때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입니다. 그때는 마치 어리아이와 같아서 유업을 이을 자이지만 종과 같이 하라는 대로 하는 그런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는 더 이상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명분을 얻어 더 이상 의식법에 매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모든 것을 다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의식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에 실체가 온 이상 더 이상 의식법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이후에도 의식법을 따른다면 그것은 뭐냐?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요,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이지 결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된 것을 가지고 온다는 것은 뭐냐? 덧셈, 뺄셈, 그리고 구구단과 같은 것은 기본적으로 다 할 수 있어야 되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와서도 그것을 하겠다고 다시 초등학교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헛된 것이요 매우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의식법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거짓된 가르침 자체가 다 이러한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모든 것,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인간의 이성을 따라 고안해 내는 모든 것들을 다 뭐냐? 사람의 전통이요,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매우 주의하셔야 합니다. 아니 외형적으로 볼 때는 따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과 상관없이 무조건 성경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외형은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적할 뿐이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럼 왜 우리가 그리스도만을 따라야 하는가? 지난주 말씀으로 하자면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골2:3).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요,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외에 뭔가를 덧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을 교회의 머리로 두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다르지 않은 의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9절을 보시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때가 차매 육신을 취하시되,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게 하시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매튜 헨리 주석을 참고해서 말씀드리자면 그림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림자와 상치되는 몸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신성의 충만함이 상징적으로 거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에 관해 말할 때 그분은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누구의 머리가 되셨는가?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단지 교회의 머리만 되신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는 충만함으로 몸 된 교회를 충만케 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시면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쉽게 말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처럼 우리도 충만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 안에만 있으면 결코 부족할 것이 없는 자로 있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분의 충만하심으로 말미암아 충만해진 교회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외에 뭔가를 더하거나 그리스도께 속한 것의 일부를 빼고자 한다면 그것이 과연 옳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가 의식법에 대해 잠시 설명했지만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도 계속해서 율법 가운데 의식법을 고집했던 것 같습니다. 16절에 있는 것처럼 먹고 마시는 문제, 절기와 초하루, 안식일에 관한 문제 등 그것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모든 것을 다 완성하심으로 더 이상 구약의 의식법이 필요치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고집하는 것은 뭐냐?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철학이요, 헛된 속임수일 뿐입니다. 사람의 전통에 지나지 않으며,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결코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그것들이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말미암아 충만해져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충만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이 더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 외에 의식법을 지켜야 한다거나 혹은 어떤 신비주의적인 그런 것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할례에 대한 문제가 나오는데, 할례를 받아야지만 참된 구원이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할례 역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거짓 교사들은 항상 뭔가를 더하고자 합니다. 신인협력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은혜와 더불어 인간의 공로가 있어야지만 참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철학이요, 헛된 속임수일 뿐입니다.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일 뿐,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매우 주의해야 할 내용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내용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성경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때문에 다른 모든 세상의 유익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빌3:8). 또한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합니다(신8:3).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말하느냐?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떡과 함께 말씀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말씀만이라고 말하지 않고 항상 말씀과 더불어 떡, 말씀과 더불어 물질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떡 없이 살 수 있는가? 없습니다. 물질이 있어야 육신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느냐 하면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마10:28). 달리 말하면 떡이 우리의 두려움이 되거나 혹은 물질이 우리의 두려움이 된다면 그것조차 성도의 마땅한 바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히 여긴다면 재물은 경히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고, 재물을 중히 여기면 하나님을 경히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마6:24). 당연히 말씀과 더불어 떡, 말씀과 더불어 물질을 말한다는 건 뭐냐? 말씀을 내려놓고 떡을, 말씀을 내려놓고 물질을 더 중히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2:3).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충만을 누구에게 주셨는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교회에서 주셨고,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우리의 머리로 있게 하셨습니다.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무엇으로만 만족해야 하는가?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외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외에 우리의 만족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직 그리스도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족하는 삶을 성경은 우리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은 이런 의식법의 폐지와 관련해 할례와 세례로서 설명하게 되는데, 먼저 11절을 보시면 할례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0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가 충만해졌다고 말하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해진 자는 어떤 자인가? 구약의 할례처럼 육적인 할례를 받는 자가 아니라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아마도 구약에서처럼 육적인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참된 구원을 맛볼 수 있다, 그렇게 해야지만 완전해질 수 있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해진 자, 즉 모든 참된 교회는 더 이상 그런 육적인 할례를 행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칼빈 주석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말씀드리면, 바울은 모세의 할례를 전혀 쓸데없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손으로 행한 할례가 가리고 있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더 이상 손으로 행한 열매는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마음에 하는 할례가 ‘그리스도의 할례’이기 때문에 외면적인 것이 이제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도 외형적인 것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그 외형에 나타내고 있는 바가 성취되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영적인 할례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은 할례라는 이 한 가지 예를 통해 구약의 의식법이 폐지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고 있는 겁니다. 더 이상 손으로 하는 할례가 필요치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할례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할례의 의미는 뭐냐? 육의 몸을 벗는 것입니다. 부패한 우리의 성품을 벗어 버리는 것,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할례의 의미입니다. 구약의 할례는 어떻습니까?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육의 몸을 벗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삭보다 앞서 난 이스마엘의 경우 할례를 받았지만(창17:26) 육의 몸을 벗지는 못했습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분명 할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결국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수에 들어갔던 것이 아니라, 유기자로서의 열매만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참된 할례의 의미는 반드시 육의 몸을 벗는 데 있습니다. 부패된 우리의 성품을 벗어버리는 것이요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 이것이 할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단 1%도 인간이 할 수 없습니다. 누가 이 일을 이루시는가?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되, 누구를 통해 이루시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99% 나머지 1%는 인간, 이렇게 되어있지 않습니다. 100% 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십니다. 거기에 할례라는 의식을 덧붙일 수 있는가?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을 때 거기에 구약의 할례를 덧붙일 필요가 있는가?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약의 할례의 경우 약속의 표징이었습니다(창17:1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마치 몸에 새기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인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 또한 번성케 하겠다. 그리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누구를 통해 이루시느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 보면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러니까 약속의 성취가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누구를 통해 성취가 되느냐?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약속의 표징인 할례 역시 누구를 보도록 하는 것이냐? 그리스도를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 언약의 표징인 할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시적으로 주어진 그런 외적인 할례를 행해야 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것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로서, 육의 몸을 벗은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자, 그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받아 믿음에 굳게 서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골2:6b-7) 이것이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향한 교훈인 것입니다.
1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여기 보면 세례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가 했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할례는 무엇을 표로 삼는가? 세례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할례의 경우 그 의미가 지금 여기서 말하는 세례의 의미와 같습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시는데, 왜 이런 명령을 하시는가? 창세기 16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그 약속을 성취해 보겠다고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7장 1절에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스마엘을 낳을 때는 86세입니다. 13년이 지난 99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리고 이후에 다시금 약속의 말씀을 주시면서 명하시는 것이 할례인 겁니다. 약속의 말씀을 표로서 주신 것이 할례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할례의 의미가 뭐냐? 무엇보다 할례는 부패한 인간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끊어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회상시키며 확인시키는 표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누구를 통해 성취시키시는가? 앞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시키는 내용입니다. 말씀만 성취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표 역시 성취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의미를 무엇으로 해서 우리에게 주셨는가? 세례로서 주셨습니다. 할례와 세례의 의미가 동일한데, 할례를 폐하시고 세례로서 지금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손으로 행하는 할례가 필요하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물론 이때도 주의해야 할 것은 할례를 받는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가 아니듯,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보시면 세례와 관련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세례 자체가 구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표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육체의 더러운 것이 제하여 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례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하는데, 우리의 양심을 하나님 앞에 세울 뿐입니다.
어쨌든 지금 바울은 11절과 12절을 통해서 구약의 할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 이상 지키지 않는다는 것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세례가 그 역할을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례 역시 할례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누가 받을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자,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바로 그들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할례, 즉 세례가 의미하는 내용을 믿음으로 받은 자들은 의식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식법은 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완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측면에서 의식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맥추감사절이다, 혹은 추수감사절이다 해서 교회마다 구약 성경의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그런 절기를 지키고 있지만,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사람의 전통이요, 세상의 초등학문일 뿐입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 보면 공적인 감사일에 대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사일이 구약의 어떤 절기로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구약의 절기조차 거절된다면 성경이 명하고 있지도 않은 부활절, 성탄절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활절이나 성탄절의 경우 다 이방 신들을 기념하는 축제일을 기독교화해서 지키고 있는데 무엇보다 성경이 명하고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부활이나 그리스도의 탄생은 다 어디에 집약이 되어 있느냐 하면 주일에 다 집약이 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지키지 말아야 할 절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 이하 15절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말하는데, 먼저 13절을 보시면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여기 보면 우리의 본래 상태가 어떤 상태였는가? 범죄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은 지금 골로새 교회가 이방교회로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자들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육체의 무할례가 죽음의 원인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부분은 에베소서 2장 11절과 12절의 말씀과 같은 의미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1절과 12절을 읽어드리면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러니까 육체의 무할례라는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 하나님이 없는 자라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살리신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까지 포함한 말입니다. 그리고 범죄로 말미암아 죽었지만 이제는 살리셨기 때문에 그 모든 죄에 대하여 사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14절에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여기 보면 법조문이라고 되어 있는데, 율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기록으로 남기신 율법! 그런 율법이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한다는 것은 뭐냐? 그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을 어떻게 하셨느냐?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철저히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율법 가운데 도덕법은 영원히 지켜야 할 법으로 있습니다. 율법의 증서를 지웠다고 해서 도덕법의 요약인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 가운데 도덕법은 영원한 법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주신 법입니다. 영원한 법이기 때문에 폐할 수 없는 것이고, 또한 모든 인류에게 주셨기 때문에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은 그러한 도덕법으로서 심판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것으로도 정죄를 받을 수 없는 겁니다. 왜 그런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화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 안에는 의식법과 재판법도 있는데, 그런 것들은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이 되고, 성취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가 없게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더 이상 의식법이 교회 안에 들어올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 15절입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모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시키시고 그들을 이기셨는데, 무엇으로 그렇게 하셨는가? 십자가입니다. 칼의 방식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인간의 방식으로 이해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칼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힘의 원리요,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세상의 방식, 힘의 원리, 인간의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았습니다. 무엇으로 일하셨는가? 하나님의 지혜로서 일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십자가가 거리낄 수 있습니다. 미련하게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대신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말합니다(고전1:22-23).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입니다. 인간 스스로 구원을 찾습니다. 그러나 표적으로도, 인간의 지혜로도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히려 칼의 방식에 의해 못 박히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어떻게 말하느냐?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여러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이 더해질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뭐냐? 다음 주에 다시 보게 될 16절 이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교회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모든 충만을 다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범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자로서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정죄하던 모든 것을 다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셨습니다. 물론 도덕법은 지금도 성도에게는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서 주시는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심지어 구약의 모든 의식법과 재판법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도록까지 하셨습니다. 나아가 모든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이 우리 위에 군림할 수 있는가? 없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법이 우리 위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 한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폐지하신 의식법이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외에 다른 것들이 들어올 수 있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둔 심리학과 상담학, 그리고 실용주의적인 방식들, 심지어 신비주의적인 방식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어지럽히는 일들이 많다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는 반드시 분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든 방식들과 내용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을 마치 무효로 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며, 그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다시금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충만한 교회, 때문에 그리스도의 충만하심 외에 다른 것이 더 필요하지 않는 자들의 모임, 그것이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이 교회의 정체성을 놓치지 마시되,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분명한 분별력을 가지셔서 우리의 모든 방향이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자로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