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9> 윤창화
‘존재의 무상성 ’깨달아야 ‘마음의 평온’ 얻어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주제로 벌이고 있는 본지의 지상토론이 날이 갈수록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누구에게나 문호를 열어 놓은 공개토론마당인 탓에 스님, 학자, 일반불자 등이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번호에는 불교전문출판인 윤창화 선생이 보내온 기고를 싣는다. 윤선생은 우리나라 불교인들은 ‘깨달음과 수행’을 지나치게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본지는 지금까지의 토론에 대한 반론과 재반론도 실을 계획이다. 강호논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한다.
불교의 깨달음은 신비체험과는 달라…환상 벗어나야
삼독을 버리지 못하는 수행과 깨달음이라면 ‘무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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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화두를 참구할때 ‘오매일여’나 ‘몽중일여’가 된다는 것은 수행에 집중한다는 의미인가, 실제로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인가. 사진은 선방에서 좌선수행을 하는 모습. |
‘깨달음’이란 불교가 추구하고 있는 최고 목표인 동시에 모든 불교인들의 최대 관심사이다. 그렇지만 ‘깨달음’이란 유형(有形)의 세계가 아닌 무형(無形)의 정신적인 세계이므로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란 곤란한 일이다. 또 어떤 정형이나 정답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실체가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깨달음을 논하는데 있어서 가장 난점인 동시에 장점이기도 하고, 또 때론 그 자체가 함정이 되기도 한다.
부처님을 비롯한 인도의 여러 각자(覺者)들과 중국의 보리달마, 육조혜능, 그리고 원효, 경허 등 수많은 선지식들은 과연 무엇을 깨달았던가? 무엇을 깨달음이라고 생각했던가? 그들이 정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깨달은 실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부처님을 제외한 많은 이들은 “뜰 앞의 잣나무니라” “산은 산, 물은 물”과 같은 지극히 추상적인 언어로 일관하고 있다. 깨달음 그 자체가 바로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세계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한계성을 갖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추상적인 표현을 통해서, 또 자신이 느끼고(사유) 체험한 바를 통해서 (비록 주관적이지만) 깨달음의 실체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주제에 비이성적으로 집착해 있다. 그래서 깨달음의 실체와 가치관에 대한 구체적 현실적 규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깨달음을 논하면서, 각자(覺者)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분명하지 못하고, 또 쉽게 말하거나 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직 확실한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타성적 깨달음’에 젖어 있는 것이다. 또는 막상 깨닫고 보니 (깨달음이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일상적인 삶의 일면을 새롭게 절감하는데 불과했다든가, 선승 특유의 화려하고 거창한 언어의 함정에 속아 장구한 세월을 헤매고 고생했던 데에 대한 보상심리 같은 것은 아닐까?
나는 먼저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깨달음이란 다름 아닌 ‘존재에 대한 무상’과 ‘마음의 평온’이라고 말하고 싶다. ‘존재에 대한 무상’ 그것이 깨달음의 출발이고 ‘마음의 평온’ 그것이 깨달음의 실체이다. 현상은 물론 더 나아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그 어떤 생각(고정관념)도 결국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그리하여 모든 집착과 욕망, 생존으로부터 벗어나 버린 마음, 고요하고 청정한 마음 상태(寂靜), 그것이 깨달음의 실체가 아닐까?
‘인생은 고(苦)이다. 괴로움은 집착과 애착(集)에서 온다. 그것을 없애(滅)는 길이 팔정도’라고 선언한 사성제나, ‘우리의 삶은 무상한 것이다(諸行無常).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도 영원불멸하는 자기란 없다(諸法無我). 깨달음의 세계, 해탈의 세계, 그리고 번민이 소멸된 열반의 세계는 고요(寂靜)하다’고 설파한 삼법인 역시 무상에서 출발하여 마음의 평온(涅槃寂靜)을 찾는 문제로 귀결된다. 초기불교가 깨달았던 진리는 바로 이것이었다.
진리란 영원토록 변치 않는 이치이다. 그러나 모든 존재, 있다는 것(有)은 언젠가는 변한다. 불변의 진리는 공교롭게도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뿐이다. 유형과 무형을 막론하고 태어난 모든 것은 결국 성장과 변천을 거듭하다가 언젠가는 없어지게 된다는 사실(生住異滅), 이것이 모든 존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진리이다.
대승불교와 중국의 선승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공(空)’ ‘중도(中道)’ ‘무집착’ ‘무념(無念, 무망념)’ 등의 언어로 구체화하여 초기불교의 무상관에서 오는 한계(무상성), 회의감을 극복하고자 했다. 확실히 초기불교의 무상에 대한 인식은 매우 훌륭한 발견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외면, 현실부정, 또는 염세적 개인주의 경향으로 흐르게 했다. 현실에 대한 제시는 부족했다.
중국의 선승들은 이것을 극복하고자 중도사상에 입각하여 이상적인 삶으로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을 제창했다. ‘그날 그날’을, 아니 어느 때든 항상 ‘그 순간이 가장 좋은 때’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승들이 초기불교의 진리였던 ‘무상성’이나 ‘열반적정’의 한계, 즉 현실외면주의, 또는 깨달음의 사회성에 대한 문제점을 느끼고 다시 현실생활 속으로 되돌아왔던 것은, 중국인 특유의 현실 긍정적인 문화적 풍토에 기인하지만, 사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은 이후 각자(覺者)의 삶의 방법론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진일보한 새로운 발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그러나 이 역시 폐단은 막행막식이 마치 선승의 삶인 것처럼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후 입멸할 때까지 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중생을 교화했던 것 역시 각자(覺者)의 현실 인식이었고, 깨달음의 사회화였고, ‘날마다 좋은 날’의 전형이었다.
우리는 다분히 ‘깨달음’에 대한 착각, 환상, 허영에 젖어 있다. 우리는 깨달음을 신비화하여, 예컨대 깨달음을 얻으면 미래사를 훤히 꿰뚫어 보는 신통력이 생긴다거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언가 특이한 현상이 생길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된다. 또 그런 것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는 화두를 들어 실제 ‘오매일여(寤寐一如)’나 ‘몽중일여(夢中一如)’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자나깨나 정성스럽게 화두를 들어야 한다’는 간화선의 상징적인 언어를 가지고 정말로 실제 잠 잘 때나 꿈에서도 분명(醒醒)하게 화두가 들려야 비로소 깨달음에 도달한 말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초능력을 추구하는 것이지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화두지옥’ ‘화두의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잠 잘 때는 정상적으로 잠을 잘 자야 할 일이지 꿈속에서도 화두를 들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두통과 신경통에 걸리는 것은 ‘오매일여’와 ‘장좌불와’ 때문이다. 그것은 행복이 아니고 불행이다. 또 깨달으면 생사(生死)를 해탈한다는 것 역시 번뇌망상의 생사윤회, 즉 마음을 괴롭히는 욕망의 생사심에서 해탈한다는 말로 이해해야지 실제 육체적인 죽음에서 벗어난다는 말로 이해한다면 그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깨달음에 대한 허상이고 환상이고, 신비적 요소를 전제로 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깨달음이란 철저한 인식의 세계이지 육체적 신비스러움을 추구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화두)는 깨달음을 얻는 일보다 깨달음을 얻은 뒤에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다양한 현실 속에서 욕망(탐욕)과 분노(성냄), 절망과 회의 등으로부터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자유스러울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깨달음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마음의 평온을 갖는 것이다.
깨달았다고 해서 갖가지 욕망(물욕, 탐욕, 소유욕, 명예욕 성욕 등)과 분노, 집착 등 번뇌망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직 거기에 빠지지 않을 뿐이다(處染常淨). 만일 각자(覺者)로서 이러한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그는 인식의 세계에서만 깨달음을 얻었을 뿐 아직 현실의 세계에서 깨달음을 체득, 실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았다고 해서 생로병사가 사라져 버린 것도 아니고, 노인이 젊은이로 둔갑한 것도 아니고, 현실이 고통 없는 이상세계(극락)로 확 바뀌어진 것도 아니다. 깨달은 사람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쓰고 입고 먹어야 하고, 최소한의 인간관계는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무상’하다고 해서, ‘심중무일사’(心中無一事, 무망념을 가리키는 말인데,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로 와전되고 있음)라고 해서 하루 24시간을 그냥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인식의 세계만 달라졌을 뿐, 현실은 엄연히 존재한다. 화두는 정작 여기에 있다.
깨달음이란 현실을 떠난 이상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우리의 삶과 생활 속에서 발견되어야 하고, 또 거기서 전개되어야 한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집착하지 말고 ‘지금 여기’ 이 순간이 ‘가장 좋은 때’라고 인식하여 청정심, 무망념의 자세로 사는 것, 더 나아가서는 각자(覺者)다운 모습으로 중생을 위해 사는 것, 그것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윤창화/ 민족사 대표
[출처 : 불교신문 2043호/ 6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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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다양한 읽을거리와 생각할 것을 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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