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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水然) 선생님과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며,
백현(白玄) 최동락(동성고등학교)
2015년 3월 31일, 삼성병원 장례식장 앞뜰에 하얀 매화꽃이 짙은 향기를 날리던 날, 水然선생님은 이 세상을 떠나셨다. 발인 전날 밤 늦게 상청에서 나와 뜰에서 매화 향기에 젖으며, 이승에서 선생님과 함께 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난날들의 큰 자취들은 순식간에 거의 다 떠올려졌다. 과거는 그렇게 압축될 수 있었다.
지난 시간 속의 만남은 모두 기적처럼 느껴진다. 수연선생님과의 추억의 이야기는 뜻밖에 얻은 행운인 나의 서울 진학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내가 동성중학교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경북 영천시(永川市)에서 30리길 떨어진 시골인 해선동(海仙洞)의 작은 성당에 다녔기 때문이었다. 영천시 본당에서 오전미사를 드린 신부님이 오후에 오셔서 미사를 올리던 성당은, 햇살 좋은 남향에 자리 잡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가는 길 옆, 동네 가장자리에 위치한 성당은 늘 조용하면서도 엄숙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학교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종종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사에까지 동참하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중인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다시는 성당에 가지 말라는 호령을 내리셨다. 이유인즉, 신부님이 미사를 드리고 영천 본당으로 가시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 나를 중학교는 카톨릭소신학교(중학교에 해당)에 보내라고 아버지를 설득하셨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도포를 입고 영천 향교에 출입하시던 유학자이셨고, 또 장래에 집안의 제사를 모셔야할 처지에 있던 나를 신부로 키울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사정상, 중학교 진학은 못한 채 별 볼일 없이 시골에서 소꼴이나 하면서 부모님의 잔일을 거들고 있던 나에게 큰 변화가 오게 되었다. 67년 가을, 추석을 맞아 고향에 제사를 모시러 오신 큰집 형님이 이렇게 시골에 두면 안 된다고 나를 서울로 데리고 온 것이다. 그게 10월 중순 경이었다. 그래서 낮에는 형님 집에서 혼자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근처에 있던 입시전문 학원에 다니면서 중학교 진학 준비를 하였다.(이 학원에서 동기 이병호를 만났다.) 그리고 3 개월 후에 치러진 입학시험에서 1차를 떨어지고 나니, 형님이 시골에서 성당에 잘 다녔으니 중학교는 당연히 카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동성에 가야한다는 말에 끌려 동성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수연 선생님과의 인연의 시작은 중학교 2학년 봄에 싹이 텄다. 그때 시인 황금찬 선생님이 맡으신 국어시간에 시조읽기란 수업이 있었다. 황금찬 선생님은 그 과목이 끝나는 날의 수업시간을 시조 한 편씩 짓는 것으로 마무리하셨다. 마침 그날따라 봄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비에 젖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고향을 향한 감상에 빠져 쓴 시조가 황금찬 선생님에게 큰 칭찬을 받게 되었다. 그 순간 느꼈던 강한 희열로 인해, 나는 지금도 이 시조를 잊을 수가 없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놈이 겪게 된 이 일은 결국 오늘날까지도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런 계기에 그 시조를 한번 소개해 보고 싶다. <가고픈 고향땅을 단꿈으로 찾아가니/ 옛 벗은 간 곳 없고 나비만 나폴거려/ 잠깨어 일어나 보니 봄비소리 쓸쓸하네. -봄비->
그래서 그해 가을 황금찬 선생님의 추천으로 문학의 밤에 발표할 시 한 편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 그 시를 가지고 조언을 구한 것은 황금찬 선생님이 아니라, 바로 수연 박희진 선생님이었다. 왜냐하면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등나무 아래나 장미꽃 앞에서 홀로 하염없이 생각에 빠져 계시던 수연선생님의 모습과 분위기가, 당시 서울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헤매고 있던 나의 모습과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이때 나를 돌봐 주기로 하신 큰집 형님은 부도가 나서 망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그 해 겨울 선생님의 초대로 안암동 아파트를 방문하면서 긴 흐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힘들게 선생님 댁을 찾아가서는 막상 할 말이 없어, 몇 마디 인사의 말을 나눈 후 곧 침묵에 빠졌다. 나의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성격이 선생님과의 대화를 잘 풀지를 못했던 것도 있었지만, 선생님 또한 과묵하셔서 말씀이 적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때 어색한 침묵을 풀기 위해 선생님이 택하신 방법은 음악이었다. 첫 음악이 바로 <그레고리안 찬트>였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잘 모르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러시아소년들의 맑고 장엄한 합창 소리는 그냥 편하게 빠질 수 있었다.(선생님이 평생 곁에 두고 들으셨던 명기인 AR스피커를 생전에 선물로 주고 가신 것도, 아마 이때부터 좋아하게 된 음악 사랑에 대한 보답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혹 그때 들었던 스피커가 이 AR이 아니었을까? 미쳐 여쭈어보지는 못했다.) 이 추억은 평생 이 곡을 좋아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클래식이라는 음악의 세계에도 서서히 젖어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종종 클래식 선율을 타고 편안하게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갖곤 한다.
그리고 그날, 또 하나 깊이 새겨진 기억이 있다. 복숭아 연적에 관한 것이다. 몇 곡의 음악을 들으며 별 말도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그 침묵을 깨고 선생님이 문득 책상 위에 있던 연적을 집어 들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산만할 때는 늘 이 연적을 머리에 기우린다. 그러면 오랜 시간 동안 이 연적 안에 고여 있던 고요가 내 머리를 맑게 해준다.” 라며, 연적을 들고 머리에 기우리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그때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이야기와 상황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교지에다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라는 제목의 수필로 발표하였다.
선생님의 49제가 끝난 후, 추모문집 발간과 유품 전시관에 관한 의논을 위해, 상주를 같이 했던 제자들이 선생님 댁에서 모였다. 선생님이 계시지 않은 텅 빈 집, 책상 위에는 여전히 그 복숭아 연적이 시간을 정화시키고 있었다. 아니 추억마저도 그 연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거실로 나와 소파에 깊게 앉으니, 바로 정면에 안나푸르나 연봉과 산자락에 듬성듬성 붙어있는 집들이 액자 속 사진에서 속삭이듯 다가왔다. 아릿한 파장을 일으키며 점점 선명해지는 추억들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저 사진에는 선생님과의 네팔여행의 추억이 서려있다.”고 했더니, 이인평 시인이 “그 얘기 추모문집에 쓰면 되겠네요.”라고 했다. 아, 맞아.
그래 2000년도 봄이었다. 그 몇 해 전부터 네팔 카투만두에 자리 잡아 살고 있던 시인 김홍성 선배가 선생님과 나를 초대했던 때는. 그래서 곧 히말라야의 산자락을 향해 트레킹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 선생님을 모시고, 동기 문병옥과 함께 비행기를 탄 것은 나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먼저 떠나 설산트레킹을 마치고 내려온 동기 임준도 카투만두에서 만났다.
지금은 지진으로 많이 파괴되었을 카투만두 시내의 이국적인 풍경을 경이로운 눈으로 구경을 하고 난 후, 곧 이어서 김홍성 선배의 안내를 받으며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랑탕 계곡으로 트레킹을 떠났다.(네팔에 머문 30여 일 동안, 카투만두에 있을 때는 늘 김홍성 선배집에서 지냈다. 저녁이면 한국의 막걸리 비슷한 뚱바를 마시며, 김선배 내외분의 푸짐한 대접을 받았다.) 새벽에 출발하여 경사가 심한 산자락에 층층이 이어진 손바닥만한 밭들과 드문드문 제비집처럼 붙어 있는 집들에 시선을 뺏기다가 트리슐리 강 옆에 있는 작은 동네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그 차를 타고 출발하니 고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마찻길처럼 좁은 길이 굽이굽이 이어지는 수백 미터의 절벽 위로 곡예를 하듯 기어가는 차 속에서, 바깥 풍경을 감탄과 두려움에 마음을 졸이면서 바라보았다. 저녁나절에야 무사히 종착역인 둔채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다음날 새벽, 어둠이 채가시지 않은 시간에 일어나 설산을 행한 트레킹을 시작했다. 오르면 오를수록, 숨이 가빠지면 가빠질수록, 눈부시게 가까이 다가오는 설산을 바라보는 호사.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느낌으로 산자락을 오르다가 샤브르란 마을에서 트레킹의 첫날밤을 맞았다.
그 날 밤, 피곤한 몸에 옷을 몇 겹이나 껴입어도 파고들던 추위 속에 뒤척이다가(선생님이 얇은 슬리핑백을 가져오셔서 나의 좀 두터운 슬리핑백과 바꾸어서 잤음), 깜박 잠에 빠졌다. 그런데 곤하게 잠든 나를 깨우는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내 눈에다 강한 빛의 손전등 같은 것을 비췄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그건 허름한 지붕을 뚫고 들어온 설산의 강렬한 달빛이었다. 곁에 주무시던 선생님도 이 달빛에 먼저 잠에서 깨어나 계셨다.(네팔 여행 내내 선생님과 한방에서 지냈는데, 이 한방 생활은 그 후 몇 차례의 중국여행이나 국내여행에서도 늘 이어졌다. 지금 되돌아보면 이렇게 한방에서 같이 지내며 나누었던 이야기들과, 같이 마셨던 술에서 묻어나는 기억이 참으로 소중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리고 공간시 낭독회의 수많은 인연들과 더불어 한 추억들도.)
그때의 추억을 선생님은 이렇게 시로 표현하셨다.
(앞 생략)
점점 밝아지는 달빛 때문일까.
나는 여러 번 반전을 거듭하다
잠든 모양인데, 새로 2시쯤엔
아예 일어나 앉기로 한다.
맞은편 침대위에 잠들어 있는
백현(白玄)의 얼굴, 거기에 쏜살처럼
달빛이 꽂히자 그가 잠에서 깨는
희한한 모습을 나는 옆에서
역역히 지켜보다.
벌떡 일어나며 백현(白玄)이 하는 말,
「꿈속에서 달빛이 이마에 꽂혔어요
그래서 잠 깨 보긴 처음이네요.」
<랑탕 히말 트레킹> 중에서
이 랑탕 히말의 트레킹은 선생님의 고소증으로 싱곰파란 곳에서 끝내게 되었다. 그리고 하산하여 떠난 곳이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였다. 고산에서 아열대의 평지로 떠난 것이다. 한창 건축 중인 대성(大聖) 석가사(釋迦寺)에 여장을 풀고, 오후의 맑은 하늘과 햇살아래 한적하게 펼쳐진 길을 따라 부처님 탄생 장소로 향했다. 석가사 주변에는 세계 각국에서 건립한 사찰들이 있었고, 룸비니 동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평화의 불꽃"이 외롭게 타고 있었다. 세계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UN이 정한 세계 평화의 해인 1986년 11월 1일 점화되었다고 하였다.곧게 뻗은 긴 길에는 아무도 없었고, 저녁나절 붉게 물드는 햇살만 가득하였다.
탄생지에 도착하니 사각으로 된 연못 옆에 큰 보리수나무에는 화려한 룽다(시골 운동회 때 만국기처럼 인쇄한 불경을 끈에 묶어 바람에 날리게 한 것.)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고, 그 아래에 한 티벳 스님이 좌정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우뚝 솟은 돌기둥에 새겨진 글들은 이곳이 바로 부처님이 탄생한 곳이라고 여전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연못 옆의 마야데비 사원에는 봄꽃들이 화려한 축제를 열고 있었다. 마야데비 왕비가 친정으로 가던 중, 이곳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낳게 되었다는 것을 꽃들이 축복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사방 일곱 걸음을 옮긴 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고고한 소리를 내셨다는데, 문득 그 전설이 가슴을 스쳐갔다. 그리고 여행의 고독감도 전설과 함께 노을에 짙게 물들어 갔다. 선생님도 사원 앞에 서서 입정에 드신 듯 두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지셨다.
그리고 그때의 감흥을 선생님은 또 이렇게 읊으셨다.
「오오 룸비니,
처음도 없거니와 끝도 없는 이곳
무한 고요와 광활한 초원만이
부드러움으로 펼쳐져 있구나.
참으로 부처님 탄생지다워라.
간밤에 들리던 늑대 울음소리
어디로 사라졌나.
(가운데 생략)
그렇다 룸비니,
이곳은 진정 세계 평화의 샘,
아니 온 우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한 송이 꽃임을
증거하는 생명의 핵(核)이어늘.」
<룸비니 찬가> 중에서
마침 백양사에서 인도와 네팔의 불교성지 순례를 오신 스님들과 하룻밤을 같이 머문 인연으로, 다음날엔 냉방 잘되는 대형 버스에 편안하게 몸을 실었다.(이때 날씨는 무척 더웠고, 포장 안된 거리에서 날리는 입자고운 황토먼지를 목으로 삼키며 힘들게 다녀야 할 처지였다.) 그리고 룸비니 주변의 카필라 성과 불교 성지들을 둘러보고, 하루 더 석가사의 적막감 속에서 부처님의 탄생을 떠올리면서 편히 쉬었다.
다시 카투만두로 돌아와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파탄과 박다푸르의 고풍스러운 옛 도시를 며칠 동안 구경하였다. 특이한 것은 그 오래된 건물에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관광객들 속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떠난 곳이 아름다운 페와 호수가 있는 포카라였다. 바람 없는 맑은 날에는 안나푸르나의 설봉이 호수에 내려와 곧잘 물에 잠겨 명상에 들곤 한다는 데, 우리가 간 날에는 바람에 이는 물결로 인해 그런 풍경을 상상으로만 해 보았다. 하지만 배 위에서 멀리 있는 설봉들과 눈빛은 주고받을 수 있었다. 호수 밖으로 나오니, 거리에서 파는 사진에는 안나푸르나 설봉들이 고요하게 호수에 잠겨 있었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서 안나푸르나의 일출을 보기 위해 미리 예약한 택시를 타고 어둠을 뚫고 ‘사랑곳’ 전망에 올랐다. 어둠 속에서, 어둠의 무게만큼이나 적막한 침묵 속에서, 모두들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순간, 안나푸르나 제1봉의 정점에 미세한 점과 같은 불꽃이 당겨지더니, 곧이어 다음다음 봉우리로 불길이 옮겨가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확산되는 빛의 향연, 숨이 멎을 듯한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아! 아! 하고 감탄을 쏟아내었다. 이와 더불어 맑은 눈을 뜨기 시작하는 주위의 풍광들과 산자락의 집들도 하나씩 다가왔다.
선생님 댁의 거실에 놓여 있는 사진은 바로 그때 그 추억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사진 속의 풍경은 바로 그 전망대에서 바라본 맑은 아침의 모습이었다. 선생님은 그때의 감흥을 간직하기 위해 이 사진을 그곳에서 구입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또 이렇게 그 느낌을 표현하셨다.
(앞 생략)
이윽고 맨 먼저 동트는 햇살 받고
신묘(神妙)한 백금의 연소를 보인 한 점,
그것은 역시나 안나푸르나 주봉인 제1봉
그것의 심장부, 그 백금의 연소는 차츰
연봉 전체로 퍼져나가누나.
풍요의 여신(女神), 안나푸르나가 베일을 벗고
마침내 순백의 알몸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저마다 넋을 잃을밖에.
그것은 단순히 순수무구한 미(美)일 뿐 아니라
그야말로 초절적 신성(神聖)인 때문이리.
찰칵 찰칵 사진을 수십 번 찍는데도
결국 그건 헛거다. 순간 소리 없이
신속(神速)한 뇌수술을 받는 것에 비한다면.
신성한 것에 의해 그것을 받을진대
그는 이제 영원히 히말라야 사람 되리.
<새벽의 포카라 전망대에서> 중에서
그래 그때, 나도 신속(神速)한 뇌수술을 받은 것이다. 사진을 바라보니 15년 전의 추억들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인 듯 선명하고 오롯하게 펼쳐졌다. 아니 그때 그 포카라의 냄새까지도 코로 전해지는 듯했다.
그날 저녁 포카라에서 겪은 또 하나의 일, 역시 잊을 수가 없다. 호텔에서 좀 이른 저녁식사를 끝내고 산책도 하고 이국의 정취도 느낄 겸하여, 맛있는 술을 파는 집을 물었더니 주인은 약도를 한 장 그려 주었다. 전통적인 제조법으로 만든 락시(소주를 직접내린 것)를 파는 집이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 속에 섞여 약간의 불내음도 나는 락시를 맛있게 마시며 여수를 즐겼다. 기분 좋게 번지는 취기에 몸을 맡긴 채, 호텔에서 한 잔 더 마시기 위해 락시 한 병을 사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시 전체가 갑자기 암흑으로 변해 버렸다. 전기가 나간 것이다. 초행길에 힘들게 찾아간 술집, 돌아오는 길도 겨우 기억을 더듬는 중이었는데 난감하였다. 골목들이 모두 비슷해 보였고, 작은 호텔들도 비슷비슷하게 길게 이어져 있어 그 집이 그 집처럼 자꾸 헷갈리었다. 땀을 흘리며 찾아 헤매다 겨우 호텔이름을 확인하고 들어가니, 마신 술이 다 깨버린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호텔 옥상에 올라가서 안나푸르나 설봉을 비추는 일출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종종 이 ‘사랑곳’에서 만났던 안나푸르나의 일출과 태양을 떠올리곤 하는데, 선생님도 역시 그 일출의 강렬함을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렇게 거실에서 사진을 보시면서.
이 거실은 선생님과 함께 이승에서 마지막 포도주를 마셨던 공간이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쯤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다. 저녁에 올 수 있겠느냐고. 그래서 같이 집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서 포도주를 마셨다. 누가 선물로 주고 갔는데 혼자 드시기보다 같이 먹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불렀다고 하셨다. 그 날 밤, 선생님은 당신께서 돌아가신 후의 몇 가지 일을 말씀해 주셨다. 미리 예감이라도 하신 듯. 그날 그렇게 포도주를 같이 마시며 나눈 그 대화가, 선생님과 함께한 긴 인연의 마지막이 되었다.
그런데 수연선생님이 돌아가신 며칠 후인 4월 17일, 선생님의 초상에서 장지까지 같이 가셨던 시인 이무원 선생님이 너무나 뜻밖에, 이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고교동기 곽희준, 후배 조환수(문학평론가)와 함께 문상을 갔었다. 그때 환수가 말했다. “수연선생님은 형님을 자식처럼 생각하셨어요.” 순간 가슴이 멍해졌다. 평소 이런 말씀은 한 마디도 없으셨는데.
이제 다시 이렇게 선생님과의 지난 추억을 떠올리면서, 몇 자 회고의 글을 쓰는 순간 또다시 가슴이 멍해진다. 시골에서 홀로 서울에 올라와 마음을 의지했던 선생님.(동성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선생님과 같이 보냈던 수많은 시간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온 몸을 흔드는 듯하다. 그렇다, 추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 문득, 번개처럼 순식간에 가슴을 파고드는 것이다. 매화향기 짙게 가슴을 적시는 날이면 돌아가신 날의 백매(白梅)를 생각할 것이고, 초록의 나뭇잎들이 춤을 추며 속삭일 때는 혹 선생님의 말씀인양 귀를 모아 볼 것이다. 아니, 햇살과 바람의 애무 속에서도 문득문득 추억의 한 순간이 떠오를 것이다.
이제 선생님과의 추억을 접어야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시 <히말라야 정상(頂上)에서>를 읊어 본다. 아마 지금쯤은 싱콤파에서 돌아섰던 그 아쉬움을, 히말라야의 산자락과 설봉들을 마음껏 거닐며 풀고 계실 지도 모른다.
은둔자(선생님은 생전에 스스로 도심 속 은둔자라고 하셨음.)에서 벗어나 시공을 넘나드는 자유인으로서, 투명한 기쁨을(선생님 수필집 제목)무한히 누리시면서.
세계의 지붕
신(神)들의 거처
지구의 지성소(至聖所)
히말라야 정상(頂上)에서
인간은 오래 머물 수 없다.
몸과 마음을 더불어 홀랑
벗기 전엔
삶뿐 아니라
죽음도 홀랑 벗기 전엔
텅 비어 있는 투명한 영기(靈氣 )로
환원되기 전엔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보이는 빛깔이 있음이여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들리는 소리가 있음이여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열리는 경지가 있음이여.
빛도 아니요 어둠도 아닌 것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닌 것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
깨끗하지도 않고 때묻지도 않은 것
끝도 아니요 시작도 아닌 것
(뒤 생략)
<히말라야 정상(頂上)에서> 중에서
첫댓글 수연 박희진 선생님 9주기가 되었네요... 아름다운 사제의 인연 감동적입니다.
강박사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답글을 주시다니~~
맞아요.
9주기가 있었습니다.
늘 뜻하시는 바를 이루는
멋진 미래가 펼쳐지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