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산책] 팔천송반야경 ⑨
선정보다 반야의 마음부터 갖춰야
소·대승을 막론하고 선(禪)은 붓다의 마음을 얻는 강력한 수단이자 방편임에 틀림이 없다. 팔천송반야와 같은 대승의 입장에서도 결코 선 그 자체가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일은 없다. 반야를 우선시하고 선을 폄하 하는듯한 의도는 오직 선의 형식주의 내지 선만능주의를 경계하려 함일 뿐이다.
선이란 한마디로 마음을 정화하는 일이다. 곧, 맑고 착한 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이며, 그 노력의 결과로써 탐내고 성내고 우치한 삼독심이 제거됐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의 선이다.
선은 붓다의 마음 일구는 방편
대승의 보살이 닦는 선이나 성문·벽지불이 닦는 선은 그 내용으로 보면 하등 다를 바 없지만, 그 지향하는 바는 사뭇 달라진다. 대승이 되면 이제 더 이상 선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일은 없다. 곧, 선은 붓다의 마음을 일궈내는 방편임이 분명해질 따름이다.
초기불교 이래, 대체로 선은 지혜를 내는 유력한 방법으로 알려져 왔다. 대개의 사람들은 붓다의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선을 닦아야 한다고 인정한다. 아니면 선과 지혜를 동시에 닦아야 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팔천송반야에서는 선정 이전에 반야가 선행되야 한다고 단언한다. 곧, 반야지혜라는 인도자를 기다려 비로소 선정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자칫 혼란을 야기하지만, 팔천송반야에서 가리키는 지혜, 곧 반야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곧, 소승의 지혜와 대승의 지혜(반야)는 그 가리키는 바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챌 필요가 있다.
소승의 지혜는 수행의 결과로써 얻어내는 지적인 능력이지만, 대승의 지혜는 붓다의 마음을 갖고자 하는 이가 일으키는 헤아림 이전의 마음 그 자체이다. 팔천송반야에서는 이 반야의 마음이 준비된 뒤에야 비로소 선정도 길의 의미를 지닌다고 설하는 것이다.
이미 거듭 언급했듯이 반야의 마음이란 다름 아닌 자비, 곧 사랑하고 연민하는 마음이며, 유정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갖추어졌다면 그는 이미 선의 경지에 올라 어떤 길을 가도 물러섬이 없이 붓다처럼 나아가게 된다.
“그는 동요 없는 마음으로 온갖 유정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자 한다. 그는 나아갈 때나 돌아올 때나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 없이 바른 염(念)으로 나아가고 바른 염으로 돌아온다.”(팔천송반야 제17장, 불퇴전의 형상과 징표와 특징)
반야의 입장에서 보는 한, 고요와 한적함을 즐기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 정도로는 궁극의 선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보살의 선이란 세간을 상대로 해서 삶의 부조화를 해결하려는 유위의 노력을 거듭한 자가 얻어내는 성취감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한 선(禪)에 들지만, 오로지 선의 즐거움에 몰입하는 일은 없느니라. 오히려 그는 세간의 마음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택하느니라.”(팔천송반야 제17장, 불퇴전의 형상과 징표와 특징)
반야는 사랑하고 연민하는 것
유정을 상대로 고난과 역경을 거친 보살이 지니는 뿌듯하고 채워진 마음, 그것이 바로 선이다. 이는 억제와 통제를 통해 얻어내는 협소한 경지와는 차원이 다른 힘이 넘치는 평온감이기도 하다.
이 같은 선의 경지를 얻은 자는 괴로워하거나 싫어할 틈도 없이 벅차게 삶을 상대해 나갈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얻어낸 이를 대승에서는 불퇴전 보살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목적과 수단을 잘 구별하라 한다. 불도 수행의 목적은 무엇일까? 새삼스러운 질문 같지만,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가 그다지 쉽지만은 않다. 선정이 됐건 보시가 됐건 수행이라는 모든 형태는 수단일 따름이다.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과연 목적과 수단을 잘 가리고 있는지. 혹시라도 목적지를 찾기 위해 기차를 타고 있는지 잘 살펴 볼 일이다.
김형준 박사
경전연구소 상임연구원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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