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고종 22)∼1943년. 독립운동가‧실업가. 본관은
탐진(耽津).
(주1)
본관 |
李東彦, 白山 安熙濟 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1994.12. pp.313-335에 본관이 강진[탐진]이라고 나옴. |
호는
백산(白山).
경상남도 의령 출신.
21세에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봄에 양정의숙(養正義塾) 경제과로 전학하여 24세에 졸업하였다.
그뒤 1907년
동래의
구포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고, 1908년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에 창남학교(刱南學校)를 창설하여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09년 10월
윤세복(尹世復)‧
서상일(徐相日)‧
신성모(申性模)‧
남형우(南亨祐)‧
박중화(朴重華)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1년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다.
1914년
부산에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경영하여 무역업에 종사하는 한편, 국내외 독립운동단체의 연락처를 제공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서 각지에 배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해에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로 확대 개편하여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조달기관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청년학생들을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이러한 장학생들 중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5년에는 운영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인수하여 중앙일보로 개칭하고 사장이 되어
일본의 총독정치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또한, 1927년
이시목(李時穆) 등과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뒤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31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고, 1933년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세워 교포들의 생활안정과 청소년교육에 힘썼다.
즉, 중국인 지주들의 불리한 조건하에서 착취당하고 있던 한국인 소작농 300여호를 유치하여 토지를 분배해주고 5년분할상환 조건으로 자작농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발해농장 안에 발해학교를 설립하여 농민들과 그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더욱이, 대종교를 신봉하여 총본사전강(總本司典講)‧교적간행회장(敎籍刊行會長)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 고유의 종교를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그러나 1942년 11월 일제가 대종교를 독립운동조직으로 간주하여
만주와 국내에서
윤세복 이하 대종교 지도자 21명을 일거에 체포한 임오교변사건으로 투옥되었다.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혐의로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9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목단강병원에서 순국하였다.
대종교에서는 순국십현(殉國十賢)의 한 사람으로 추존하였고,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