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례’ 그 유래와 ‘임을 위한 행진곡’
노조활동을 하다보면 집회, 회의 등 각종 행사에 앞서 늘 민중의례를 합니다. ‘민중의례’는 ‘국민의례’와 같은 것이지만 그 내용과 유래는 많이 다릅니다.
국민의례는 각종 행사에 앞서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과 애국가 제창 순으로 진행합니다. 이때 묵념과 함께 흐르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197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이 만들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강제로 외우게 했고 못 외우면 외울 때까지 나머지 공부를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박정희 정권은 ‘국기에 대한 맹세’를 군사독재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습니다.
또한 노동자, 민중의 요구에 반하는 정치를 해 온 역대 정권이 국민에게 강요한 ‘애국’, 그리고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친일파였다는 역사적 사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에게 애국가에 대한 기억은 매우 애매합니다.
반면 민중의례는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묵념을 하며 전태일 열사 등 노동자들의 권리와 노동해방 된 평등한 세상을 위해 투쟁하다 숨진 수많은 노동, 민주열사들의 정신을 기립니다. 그리고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릅니다. 비장한 가사에 행진곡 풍 리듬을 가진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민주항쟁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서 시민군 대변인으로 도청에 남아 마지막까지 투쟁하다 장렬하게 숨진 윤상원 열사, 1979년 ‘들불야학’에서 윤상원 열사와 함께 야학교사로 활동하다 불의의 연탄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박기순 열사,
1981년 군사독재의 탄압을 피해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이 ‘빛의 결혼식’이라는 노래극 형식으로 비밀리에 진행됐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 결혼식에서 처음으로 불러졌습니다. 한 동안 작사 작곡 미상으로 대학가에서 퍼져 운동권 노래로 불려지기 시작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제 ‘투쟁의 노래, 민중의 노래’이자 ‘민중의 영원한 애국가’로 각종 투쟁현장에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 선생님의 시에 제1회 대학가요제에 나왔던 김종률이 곡을 붙였다는 사실도 뒤늦게 드러났습니다.
첫댓글 자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토요일날 쉬지도 않고 애쓰셨네요. 감사드립니다. ^^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