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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지킨 북벽의 약속
알프스 그랑조라스 북벽 워커 스퍼 등반기
X뗐다!
렛쇼 산장(Refuge de Leschaux)에서 눈을 뜨니 새벽 4시.
2시에 일어나서 3시에 함께 그랑조라스로 출발하기로 했던 프랑스 로컬클라이머 녀석들이 의리 없이 우리를 깨우지 않고 저들끼리 출발을 한 것이다. 4시에 눈을 뜬 것만도 어찌 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녀석들을 향해 뒷담화를 쏟아내다가 결국 내린 결론은 “놈들이 우릴 경계해서!” 였다. 우리가 생각해도 우습다. 우리 다섯 명 중에 프로 클라이머의 포스를 풍기는 몽타주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용학 선배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면 조금…
어쨌든 부랴부랴 채비를 하고 산장을 나선다. 렛쇼에서 그랑조라스까지만도 2시간 남짓 빙하를 거슬러 올라야 한다. 아직 그랑조라스에 닿지도 못했는데 어스름 날이 밝아온다. 우리보다 2시간을 새치기한 녀석들은 이미 저 위에 있다.
아침 7시 반, 드디어 그랑조라스 북벽 워커 스퍼의 등반이 시작되었다.
날이 쨍하다. 알프스의 날씨에 트라우마가 있는 나로선 그저 등반이 끝날 때까지 이런 날씨만 이어지길 빌 뿐이다. 다른 해보다 눈이 많이 와서 등반이 힘들 거라고 허긍열 선배를 포함해 여러 사람들이 걱정을 했는데, 이젠 빼도 박도 못한다. 며칠 전에 확인한 일기예보와 달리 그제 다시 확인해 보니 우리 일정보다 비가 일찍 올 거라 해서 그제 고소적응 후에 원래 어제 잡혀있던 하루 휴식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곧장 올라온 터였다.
우리 워커 스퍼 등반대는 두 팀으로 출발을 했다. 전용학, 윤용수, 강한별 한 팀, 강원도 동해에서 온 정영석, 안문기(뫼우산악회) 한 팀으로 따로 등반을 하기로 했다.
한때 5.13급 등반까지 했었던 천안의 윤용수 형은 나는 그 전엔 잘 몰랐는데, 전용학 선배와의 친분으로 함께 원정대를 꾸리게 되었다. 워낙 시원하고 깔끔한 성격에 등반도 잘 해 등반과 원정기간 내내 많이 의지한 형이었다.
강원도를 주름잡고 있는 동해 뫼우산악회의 정영석 형과 안문기도 사람들이 어찌나 호인인지 함께한 첫 원정길이었지만 우리 캠프에는 늘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첫 피치는 온통 눈이었고 하단부에 전체적으로 눈이 많아 한동안 크램폰을 벗지 않고 등반을 할 수 있었다. 시스템은 두 팀 모두 더블 로프 시스템, 낙석의 위험 때문이다. 세 명인 우리 팀은 선등자가 등반을 한 후 두 줄로 나머지 두 명을 한꺼번에 빌레이를 보면서 시간을 줄였다.
전용학 선배가 등반을 하고 용수 형이 빌레이를 보는 사이 캠코더로 영상을 찍고 있는데 순간 뻑! 하면서 별이 보인다. 낙석이 얼굴을 때린 것이다. 여름철 북벽등반은 늘 낙석의 위험이 도사린다. 다행히 조약돌이었지만 머리가 핑 돌고 얼굴에 굵은 생채기를 남겼다. 그 옛날 발터 보나티(Walter Bonatti)도 그랑조라스를 등반하면서 낙석에 맞아 얼굴에 상처가 난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럼 이건 좋은 징조인가? 어쨌든 그 후로도 크고 작은 낙석들이 우리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내 1m 옆을 배낭만 한 낙석이 스쳐간 적도 있었다. 낙석 때문에 탈출을 하거나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은 등반가들이 적지 않은 만큼 낙석에 신경이 바짝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그랑조라스로 향하면서 가졌던 우려는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3년 전 우리의 발길을 돌려세웠던 날씨, 또 하나는 길찾기다.
특히 리더인 전용학 선배는 출발 전부터 길찾기에 엄청난 신경을 쓰는 것이 역력했다. 그랑조라스에 붙었던 팀들마다 길을 헤매 고생하고 실패하기까지 했던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탓이다. 실제 벽에 붙어보니 과연 헤맬 만한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다. 고정확보물은 아예 없고 가끔 하켄이 박혀 있고 슬링이 걸려 있는데, 이게 제 루트에만 있는 게 아닌 거다. 그 전에 헤맸던 팀들이 그 헤맨 곳에도 이것 저것 박아 놓은 탓에 바른 길을 찾는 것이 훨씬 힘들어졌다.
우리도 딱 한 군데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워커 스퍼 루트상에는 루트를 대표할 만한 독특한 피치가 몇 군데 있는데, 첫 번째로 만나는 것이 그 유명한 레뷔파 크랙이다. 현지에서는 'Diedre Rebufat'라 불리는데, 1939년 리카르도 캐신(Ricardo Cassin)과 동료 3명이 이 북벽을 초등한 후 10여 년이 지난 뒤에 가스통 레뷔파(Gaston Rebufat)가 재등하면서 초등루트보다 안전한 그러나 기술적으로는 더 어렵게 오른 구간이다. 이 유명한 크랙을 찾아 가다가 헷갈린 것이다. 등반 시작 후 약 200m 정도 올랐을까, 직상하던 전용학 선배가 한 25m 위에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무래도 아닌 거 같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봐도 딱히 등반루트로 보이는 방향이 없다. 너트 하나로 확보한 후 다시 하강을 하고서 한참을 찾다 보니 우리가 가려던 길은 오른 쪽으로 트레버스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트레버스 루트에 눈이 너무 많이 쌓여있어 보이지를 않았던 것이다. 막상 길을 찾고도 눈 때문에 건너가는 데 한참이 걸렸다. 거기서만 시간을 많이 까먹었다. 그 바로 위가 레뷔파 크랙인데 그 이후로는 한번도 길을 헤매지 않았다.
그 즈음부터 뒤에 따라오던 동해 팀도 우리와 함께 줄을 묶게 되었다. 어차피 같은 루트를 등반하는 거니까 체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예정에 없던 5인 등반팀이 된 것이다. 그러자 그 순간 전용학 선배는 과감하게 싱글로프 시스템으로 등반형태를 바꾸었다. 그 뒤로는 각자 알아서 톱니바퀴처럼 연쇄반응이 일어나는데 시스템 변화에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누가 선등을 하던 선등자가 나가고 후등자가 회수를 하면 그 때부턴 바로 로프를 고정, 그 이후 등반자들은 로프맨이나 베이직으로 자기 확보 등반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선등자는 바로 또 선등을 나갈 수 있다. 인원이 많아지면 시간이 지연되게 마련인데 이런 시스템으로 시간 낭비를 최소화했다.
3년 전에 드루 남벽 등반을 해보긴 했지만 그땐 당일이었고, 알파인 북벽 등반은 이번이 처음인데, 등반 내내 등반의 성패를 가르는 또 하나의 중차대한 요소가 판단력이란 것을 끊임없이 깨달았다. 선등이건 아니건 이 거대한 벽에선 모든 멤버들이 끊임없이 판단의 순간에 직면한다. 하다못해 지금 배낭을 벗고 헤드를 열어 행동식을 꺼내 먹을 것인가, 물병을 꺼낼 것인가, 썬크림을 바를 것인가, 오버 재킷을 입을 것인가 같은 사소한 옵션들에서부터 여기서부턴 빙벽화를 신어야 할 것인가, 어디에 어떤 장비를 설치해야 할 것인가, 비박 장소는 어디로 할 것인가 같은 등반에 직접 관련된 문제들까지. 어쩌면 등반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판단력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잠깐의 귀찮음 때문에 판단을 미뤘다가 그 뒤에 어마어마한 결과를 맞을 수도 있다. 우유부단한 성격이거나 망설임이 많은 이는 이런 등반엔 적합하지 않다.
하물며 리더의 판단력이야 그 가치를 말할 수가 없다. 아니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면에서 전용학 선배는 단언컨데 최고의 리더이자 알피니스트였다. 10년 가까이 봐왔기 때문에 나는 안다. 전 선배도 나도 체력과 힘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 전 선배는 그것을 빼어난 판단력과 정신력으로 완벽히 커버했다. 일기예보가 변해서 비소식이 앞당겨지자 하루 휴식을 취소하고 바로 렛쇼로 향했던 그 판단부터, 총 5일의 등반기간 내내 수많은 결정의 순간에 그의 판단은 빗나간 적이 없었다. 딱 한번, 레뷔파 크랙 아래서 잠깐 아르바이트한 것밖에. 이런 리더와 등반을 나섰으니 얼마나 든든할까.
여러 장의 사진으로 보았던 30여m 되는 레뷔파 크랙을 어렵사리 통과하고, 40m 정도의 트레버스후에 80m 정도를 직상하니 두 번째로 눈에 익은 크랙이 나타났다. 워커 스퍼 등반사진에 꼭 나오는 80m 디에드르다. 보통 75m 디에드르라고 하는데 우리가 가져간 50m로프로 등반해 보니 80m 정도 되는 것 같다. 디에드르의 크랙에 물이 흐르고 좌우로 얼음까지 붙어있어 당최 등반이 쉽지가 않다. 건너편 능선을 향해 이미 해는 내려가고 있었다.
아침에 등반을 시작하면서 내가 전용학 선배에게 건방지게 말했었다. “오늘 한 3800m까지만 가서 자죠?” 하도 추운 것을 싫어하는 나로선 벽상에서 비박을 한 번만 하고 두 번째 밤은 정상을 넘어 보칼레트 산장(Refuge Boccalatte)에 가서 보내고 싶었던 욕심이었다. 하지만 첫날 해가 질 때까지 우리는 500m를 올랐을 뿐이었다. 레뷔파 크랙과 80m 디에드르를 돌파해 3,500m 지점에서 첫 비박을 해야 했다.
저녁 9시가 넘어 해가 반대편 능선을 넘어가려 하면서부터 전용학 선배는 매의 눈으로 비박지를 찾고 있었다. “별이는 여기서 자고, 용수형은 여기서 자고!” 하는데 그 손가락 끝을 따라 눈길을 돌린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수직에 가까운 벽에 달랑 가로 40Cm, 세로 25Cm의 턱이 무슨 바위에 상처난 것처럼 패어 있었다. 그 거대한 산덩어리에 내 한 몸 누일 틈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달랑 저기서 자라고? 허나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다. 날은 급하게 어두워지는데다, 우린 너무 지치고 갑자기 추위가 몰려와 정신 없이 침낭부터 꺼냈다. 행동식 약간으로 허기를 달래고 침낭 속에 기어들어가 엉덩이 걸칠 위치를 잡는다. 그나마도 밤새 계속 흘러 미끄러져 내려간다.
북벽인지라 눈앞에 북극성이 떠있다. 밤하늘의 모든 별은 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돈다. 난생 처음 북두칠성이 북극성을 도는 궤적을 밤새 관찰할 수 있었다. 온갖 상념과 함께.
등반가라 불리기에도 어줍잖은 내가 알프스의 3대 북벽을 꿈꾸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하긴 산쟁이를 자부하는 사람치고 북벽 꿈을 안 가진 이가 한 명이라도 있을까?
처음 등산학교에 다닐 때 강사들을 통해 수없이 들은 “3대 북벽”. 뭔지도 모르고 그저 '대단한 게 있나 보다..' 했지만, 임덕용 선배의 <꿈 속의 알프스>, 정광식 선배의 <영광의 북벽>, 허긍열 선배의 <몽블랑 익스프레스>, 안데를 헤크마이어(Anderl Heckmair)의 <알프스의 3대 북벽> 같은 산서들을 읽으면서 내 마음 속의 북벽은 점점 더 거대해져만 갔다.
가스통 레뷔파(Gaston Rebufat)가 “얼마나 많은 저녁을 나는 쿠베르클 산장 테라스에서 보냈는지 모른다. 지는 해가 하늘 높이 솟은 톱날 같은 봉우리들을 붉게 물들이는 것이 보고 싶었다. 골짜기는 벌써 야음이 짙고 높은 데도 점점 어두워갔다. 그러나 저 위는 잿속의 불처럼 빛나더니 갑자기 그랑조라스 북벽이 빨갛게 타올랐다.” 라던 그 북벽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지만 그렇게 그리는 꿈이라는 것은 언제나 막연하다. 추상적이다.
나의 그 추상적인 “북벽”이라는 꿈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걸출한 두 클라이머 친구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동갑내기 김주영(마운틴 기어)과 차호은.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 선배인 주영이는 10여년 전에 이미 마테호른 북벽을 등반했고, 호은이는 5.14급 등반실력에 로체남벽 등반에도 참여했던 테크니션이다.
주영이는 요세미티 원정도 같이 다녀왔던 내 등반 파트너인 데다, 호은이는 주영이랑 어릴 때부터 단짝에 성격도 워낙 좋아 셋은 너무나 죽이 잘 맞았다. 일사천리 원정을 준비했고 그렇게 3년 전, 서른 일곱의 우리는 꿈에 그리던 그랑조라스를 마주하게 되었다.
겨우 3년 전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참 젊고 겁도 없었다. 사기충천, 호기롭게 그랑조라스 북벽의 앞에 섰던 우리는 그러나 알프스의 변화무쌍한 날씨에 렛쇼 산장에 처박혀 와인만 축내다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알프스를 떠나며 셋이 했던 약속, “3년 뒤에 우리가 마흔이 되면 다시 오자!”던 그 약속이 이번 원정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3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나이 마흔이 된 생활인들에게는 자신의 꿈 말고도 지켜야 하는 것들이 더 많아졌다. 먼저 호은이가 개인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하게 되고, 그 자리에 전용학 선배가 들어왔다. 내 사부(내가 처음 등반의 바다에 빠지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인 전용학 선배랑 아직 원정등반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랑조라스를 같이 오르는 것이 큰 의미가 있겠단 생각에 내가 요청을 드렸다.
그렇게 해서 석 달 전 원정기간을 정하고 항공편을 예약하려 하는데 이번엔 주영이가 온 우주가 블랙홀 속으로 꺼져들 듯 한숨을 내쉰다. “내도 몬간다… 와이프가 셋째 가짔다”. 녀석을 두들겨 패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고 황당했지만 이것도 경사가 아닌가. 거참,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다. 3년 전 처음 그랑조라스 갈 때 둘째를 만들었던 녀석이다. 이제 알프스 원정은 끊어야지, 갈 때마다 애 생기면…
결국 전용학 선배와 둘이 가게 됐는데, 북벽등반에는 아무래도 세 명이 안전하다 싶은 전 선배의 판단에 천안의 윤용수 형이 합류하게 된 것이다. 마침 그랑조라스 생각이 있던 동해 뫼우산악회 팀과도 일정을 맞춰 함께 움직이게 되었고.
친구 셋이 꿨던 꿈을 나 혼자 이루려고 왔다는 생각에 지금 저 북쪽 하늘에 반짝이는 수만 개의 별들만큼이나 많은 감정들이 로프 한 줄에 달랑 매달려 있는 내 몸을 휘감는다. 아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은 죽도록 외롭기도 하다.
감상에 잠기다 엉덩이가 미끄러져 매달리면 또 “씨X” 하고 엉금엉금 꿈틀거리며 기어올라 자리를 잡는다. 밤새 몇십 번을 그랬는지 모른다. 유난히 추웠던 그 날 밤은 내 몸에도 오래 가는 북벽의 추억을 남겨줘 아직까지 엄지발가락 동상치료를 받고 있다.
알프스의 여름은 해가 정말 길다. 특히 높은 고도에선 낮이 영원히 이어질 것 같다. 새벽 5시쯤 어스름 날이 밝아오면 눈을 떠 간단히 요기를 하고 6시에 등반을 시작해 밤 10시 해가 떨어질 때까지 등반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등반속도는 생각만큼 붙질 않는다. 일단 배낭이 너무 무겁다. 침낭, 침낭커버 같은 비박장비에 등반장비, 식량, 물, 거기다 가장 무거운 건 빙벽화다. 등반할 땐 암벽화를 신기 때문에 2kg이나 나가는 빙벽화는 배낭에 짊어져야 한다. 모든 등반가의 적인 중력의 횡포가 너무 가혹하다.
또 3~4천 미터 고도에서의 등반은 난이도를 떠나 쉽지가 않다. 몇 동작 올라가면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게 된다.
마지막으로 많은 로컬 클라이머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눈이 너무 많았다. 1934년 그랑조라스 북벽 초등을 노리던 안데를 헤크마이어가 “암벽은 또다시 눈과 얼음의 두꺼운 갑옷으로 덮였다”면서 쓴 입맛을 다셨던 때만큼은 아니겠지만. 게다가 어차피 알파인 등반이라는 것이 암벽, 빙벽, 설벽 등반이 다 섞여 있는 것 아닌가? 그렇긴 해도 암벽화와 빙벽화를 갈아 신으면서 낭비되는 시간이 만만치가 않다.
무게가 아주 가벼운 체인젠(암벽화에 간단히 두를 수 있는)을 준비한다면 신발을 갈아 신는 시간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20m만 넘어가면 되는데 암벽화로는 죽어도 안 되는 곳이 있더라. 겨우 그만큼 올라가려고 빙벽화 꺼내고 크램폰 끼우고 또 암벽화 갈아 신고, 허비되는 시간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 곳은 크램폰까지도 필요없는데… 간단히 아이젠 하나 끼워서 그 구간만 살짝 넘어서면 되는 것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샤모니 장비점에도 그런 아이젠이 있었다!
또 플라스틱 접이식 컵을 하나씩 달고 다니면 물을 먹는데 있어서 굉장히 유용하겠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북벽에는 눈과 얼음이 곳곳에 많아서 물을 구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그 물을 모으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눈이 녹아 똑똑 떨어지는 곳에 물병을 아슬아슬하게 세워놓아 물을 받는데 하마터면 물병까지 떨어뜨릴 뻔한 게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등반이 힘들고 고도가 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목이 탄다. 틈날 때마다 물을 마셔야 하는데, 무게도 거의 나가지 않는 접이식 컵을 장비걸이에 달고 있다가 물이 똑똑 떨어지는 곳에서 잠깐 받아서 목을 축인다면 정말 유용할 것이다.
비박을 할 때는 비상용 은박 블랭킷의 위력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첫 날은 귀찮아서 쓰지 않았다가 추위에 혼쭐이 나고서 둘째 날 밤에 침낭커버 위에 둘러서 사용을 했는데 그 얇은 블랭킷이 엄청난 보온효과를 발휘하더라. 북벽이나 알파인 등반을 떠날 땐 반드시 챙기는 게 좋겠다.
마지막으로 틈날 때마다 앉아서 쉬도록. 등반 시작부터 전용학 선배가 이것을 강조했었다. 등반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도 모르고 등반길이 1,200m에 대한 감도 없는 상태에서 무거운 장비를 메고 등반을 하는 것은 체력 안배에 상당한 어려움을 야기한다. 정말 틈날 때마다 먹고, 마시고, 앉아서 쉬어라. 빌레이도 가능하면 앉아서 봐도 된다.
이상의 것들은 등반을 모두 마친 후 우리의 등반에 대해 토론을 하면서 나온 아이디어들이다. 다음 번 등반에 유용한 팁이 될 것 같다.
둘째 날 아침 6시에 80m 디에드르 위에서 출발해 회색 슬랩과 회색 암탑을 거쳐 끊임 없이 등반을 이어갔다. 회색 슬랩 닿기 전에 유일한 하강 구간이 있는데, 개념도에서 본 것과 달리 채 20m도 안될 정도로 짧아 의외였다.
무려 16시간을 쉬지 않고 등반한 끝에 두 번째 밤을 보낼 비박지에 도착했다. 3,900m 지점에 있는 삼각설전이었는데, 첫 날보다 등반 거리가 더 짧다는 것이 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만큼 이 날의 구간들이 어려웠다는 얘기일 터. 심지어 어떤 피치에서는 피치 전체가 얇은 얼음에 뒤덮여 손으로 잡아도 미끌, 밟아도 미끌, 도대체 전진이 불가능했다. 결국 나는 주마를 썼는데, 주마를 잡고도 얼마나 버둥거렸는지 모른다. 그 피치를 선등한 전용학 선배가 불가사의였다.
삼각설전 위쪽에 우리 세 명, 그리고 아래 쪽에 동해 팀 두 명이 각각 자리를 잡았다. 두번 째 비박 장소도 전날에 비해 더 나을 것이 없었다. 결국 이틀 밤 동안 잠은 거의 자지를 못했다.
하지만 그 두 번의 밤, 북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바라본 알프스의 일몰을 지울 수가 없다. 저 너머 병풍처럼 줄지어 늘어선 연봉들, 마치 공룡의 등뼈처럼 저마다 날카로운 뿔들을 하늘 높이 겨누고 있는 봉우리들 허리춤에 정말로 솜사탕 같은 구름들이 그림처럼 걸려있고, 그 뒤로 하루 일과를 다한 태양이 그날의 가장 예쁜 빛줄기를 자상하게 깔아준다. 하얀 구름과 하얀 눈과 회색 봉우리들이 조금씩 다른 톤의 붉은 빛을 반사하면서 빛의 오케스트라가 되는데, 이 광경의 스케일이 내 두 눈에 담기엔 턱도 없을 만큼 거대하다.
영화 <버킷 리스트 bucket list>에서 말기암 환자로 3개월 선고를 받은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은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들로 리스트를 만들고 하나씩 해 나간다. 스카이다이빙 하기,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인과 키스하기, 이태리에 가서 명품 양복 맞춰 입기, 카 레이싱 하기, 다른 사람에게 선의를 베풀기 등등이 자리를 차지한 그 리스트의 첫 번째는 'Witness something truly majestic'(장엄한 광경을 목격하기)였다. 가진 게 돈밖에 없는 잭 니콜슨의 능력으로 하나씩 버킷 리스트를 지워가던 그들도 결국 첫 번째 리스트를 지우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일몰에 넋을 잃고 등반의 고단함도 잊고 있다 문득, '그렇게 가진 게 돈밖에 없는 이가 죽을 때까지 죽어도 못 본 것을 난 지금 보고 있구나'. 빨간 색 침낭커버를 황금색 블랭킷으로 두른 북벽의 남자가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다행히 비박지가 다들 떨어져 있어 아무도 몰랐다. 봤으면 이 형들 한참을 골려 먹었을 게다.
셋째 날, 삼각설전의 위쪽으로는 말 그대로 믹스 등반이다. 각도가 너무 세서 등반이 쉽질 않다. 붉은 암탑을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고 트레버스를 하니 머리 위에 눈과 하늘의 경계선이 나타난다. 이제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고도가 높아져서 눈과 얼음이 더 많고, 낙석의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 상단부에는 자연낙석보다 등반자가 실수로 떨어뜨리는 낙석이 더 많다. 살짝 얹혀있는 푸석바위가 많아서 손만 대면 부서져 떨어진다. 직상을 할 때는 아래에 있는 동료들을 위해 특히 주의해야 하겠다.
태양이 바로 우리 머리 위에 멈춰 서자 드디어 마지막 피치, 정상을 왼쪽에 두고 오른쪽에 있는 오버행 눈 처마를 넘어서야 한다. 전용학 선배가 “별아, 마지막은 니가 올라가라” 하며 정상을 양보한다. 아마도 이번 그랑조라스 원정의 설계자였던 나를 생각해 준 것이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함께 그랑조라스 북벽 등반을 마쳤다는 만족감으로 충분했다. 전용학 선배부터 모두가 정상에 오른 것이 사흘 째 오후 2시. 웰리 스텍(Ueli Steck)의 동영상에서 수없이 봤던 그 모양 그대로 그랑조라스 워커봉(Pointe Walker, 4208m)은 거기 있었다.
정상에서의 감격? 사실 그런 거 별로 없었다. 너무 힘든데다 그날 아침 행동식이 떨어져서 하루 종일 사탕 세 개밖에 먹지를 못했던 탓이다. 그 뒤에 이어진 상상을 초월하는 기나긴 하산길에 나는 완전 탈진하고 말았다.
정상에서 동료들을 기다리고 사진을 찍는 30여분 동안에도 날씨의 변화는 정말 드라마틱했다. 처음 정상에 올라갔을 땐 구름 한 점 없었는데 금세 구름과 가스가 하늘을 뒤덮더니 강풍이 몰아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 시간 동안 나는 평생 기억할 그 정상의 모습을 사진과 내 기억에 담았다.
2013년 7월, 우린 각자의 버킷리스트에서 한 줄을 지웠다. 너무 지치고 발가락에 동상까지 얻어서 돌아왔지만 벌써 저 깊숙한 곳에서 스멀스멀 그 멋진 뾰족 봉우리의 마테호른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니 이 놈의 버킷리스트는 죽을 때까지 다 못 지울 듯 싶다.
첫댓글 멋진사진 감사합니다
안데클 헤크마이어의 알프스 3대북벽만큼이나 잼나다.
소중한 인연과 최고의 추억을 가슴에 다 담았으니 별이 행복한 산사람이다.
한별이의 멋진등반을 축하한다.
내가 생각하는 한별이 너는 멋진 등반가다.
하고싶은꿈 항상 도전하고 이루길 바란다. 멋쟁이....
10년같은 1월을 보내고...이제 정신을 가다듬어야 할것 같아 정신을 차리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야 원정기를 읽게 되었습니다...고 안문기를 보내는길...
먼길 마다 않고 와주신 강한별선배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뫼우 경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