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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늦었어! 빨리 타!”
갑작스럽게 여주로 사는 곳을 옮기다보니 고3인 동생의 통학이 가장 문제였다. 데려다주는데 한 시간 반, 다시 집에 오는데 한 시간 반 왕복 세 시간은 기본인 생활패턴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던 곳에 도배지를 바르고, 장판을 깔고, 싱크대도 없어 시멘트 바닥에서 가스버너로 끼니를 해결하다 신도중 한 분이 집에 안 쓰는 싱크대가 있다며 가져다주시고, 가스레인지 두 개라는 다른 신도분이 하나 가져다주시고 그렇게 하나하나 모인 것이 어느덧 살림집처럼 꾸려졌다. 그리고 이런 일을 겪으면서 정말 엄마가 그동안 많이 베풀었던 것을 보답 받는 거구나 싶어서 내심 엄마가 대단해 보였다.
처음에 집을 나올 땐 어떻게 살아갈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굶다 죽는 건 아닌가 싶은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신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위대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하나같이 우리의 나아지는 생활을 보면서 일반 사람이라면 이러기 쉽지 않다는 말을 입을 모아 했었다. 정말 신기할 따름이었다.
“누나, 나 똥 마려.”
“야! 너 그럼 학교 지각해.”
“나 쌀 거 같아 누나.”
“에잇 몰라! 일단 그럼 화장실 갔다 와.”
인근 공용 화장실이 있는 곳에 차를 세웠고, 루성이가 후다닥 화장실로 휴지를 들고 달려 들어간다. 사실 루성이에겐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대변을 꼭 봐야만 하는 것이 트라우마가 되어있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은 장거리를 차를 타고 가다보면 대소변 활동이 참아지고 하질 않는다는 것은 잘 알 것이고, 본능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장거리를 차를 타고 갈 적에는 집에서 미리 대소변을 해결하고 나와야 했고, 운행 중에 갑자기 화장실을 가고 싶단 말을 했다가는 오만가지 욕을 들어먹어야 했다. 루성은 그렇게 하루, 이틀 조금씩 그런 생활이 습관화 되어버린 듯 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방긋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고 타는 루성. P에 되어 있던 기어를 D로 전환하면서 다시 가던 길을 가는 날 향해 루성이 하는 말.
“내가 집 나와서 제일 좋은게 뭔 줄 알아?”
“뭔데?”
“차타고 갈 때 아무 때나 화장실 가고 싶으면 말해도 괜찮다는 거야. 만약 아빠랑 있을 때 그랬으면 또 별의 별 욕을 다 들어먹으면서 가야됐었겠지?!”
“그래, 남들은 우릴 이해 못할지 몰라도 우리가 지금 순간이 행복하면 된거야.”
“응!”
* * * *
[루성의 대학진학]
루성은 형편상 현재 자신이 대학을 갈 처지가 못 된다고 생각했다. 실업계 학교에서 취업반, 진학 반으로 나누는 신청 란에 취업반으로 체크를 하고 제출을 한다. 대학을 안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린나이에도 루성은 겉으로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속이 깊었다. 옥경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 대학진학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종이를 제출하고 자리로 돌아오는 루성의 표정은 그늘이 져있다.
어김없이 루나가 루성의 하교시간에 맞춰서 학교 뒷길에 차를 세워두고 루성이 오기를 기다렸다. 자그마한 경차 안에서는 나긋나긋한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곧 이어 음악이 틀어진다. 네비게이션, CD따위 아무것도 없었고, 유일하게 최신 곡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라디오뿐 이었다.
루성이 친구들과 루나의 차가 있는 곳으로 다가서며 인사를 나눈다. 이전보다 한결 학교 다니는 것도 즐거워 보이고, 표정이 많이 밝아진 루성이다. 어렸을적부터 옥경이 루나와 루성에게 거짓말이 세상에서 제일 못된 짓이니 솔직하게 항상 말하라는 인성교육을 시켜왔던 탓에 오늘 있었던 일을 루나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는 루성.
“오늘 학교에서 취업반, 진학 반 나눈다고 신청 받았다?!”
“진학 반에 넣었어?”
“어? 아니... 나 대학갈 형편 안 되잖아. 그래서 나 회사 들어가서 돈 벌어서 엄마 도와주려고 취업반 넣었어.”
“뭐?! 남자는 대학 나와야 지. 학자금 대출 이란 게 있으니까 돈은 걱정하지 말고 진학 반으로 바꿔.”
“나 이미 냈는데?!”
“내일 학교 가서 담임 쌤한테 다시 물어봐. 무조건 진학 반으로 바꿔.”
다행히 취합한지 하루밖에 안돼서 아직 반영이 안 된 상황이었고, 루성은 루나의 말에 따라 진학 반으로 선택을 바꾼다. 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여주 대학교에 입시원서를 냈고, 원하는 전공분야로 합격통지를 받게 되는 루성.
루나는 대학 합격소식에 신나하는 루성. 루성을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는 옥경과 루나. 예치금을 납부하고 학자금대출을 알아보려고 학교를 방문한 루나와 루성. 루나는 루성을 띄워주기 위해 건물 내부에 들어서면서 입이 마르도록 학교가 좋다며 칭찬을 했다. 그 덕에 구름 위를 나는 듯 한껏 들떠 보이는 루성이 방방거리며 발걸음을 신나게 옮긴다.
“학자금대출은 은행에 직접 방문하셔서 신청해 주시면 됩니다.”
“아, 학자금대출 신청은 처음이라서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루나와 루성은 학교 건물을 빠져나와 차가 주차되어 있는 주차장으로 향한다. 마냥 신나 보이는 루성이 폴짝거리며 외부 운동장에 있는 계산들 뛰어내려오다 아직 추운 겨울날씨에 얼음이 얼어버린 곳을 디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만다. 창피한 듯 말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로 달려가는 루성. 그런 루성을 보면서 픽 하고 웃음이 터지는 루나.
“안 아프냐 이루성?”
“조용히 해. 쪽팔리니까.”
“야, 저기 기숙사 같은데 저기 있던 애들이 너 미끄러져 넘어지는거 다 봤어.”
“나도 알거든?! 빨리 시동이나 켜.”
“알았다.”
내친김에 옥경을 데리고 읍내에 나와서 은행을 찾은 루성과 루나. 대출창구에서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던 셋은 들고 있던 번호가 불리자 허겁지겁 창구로 다가간다. 의자에 옥경을 앉으라 하고 양쪽에 루성과 루나가 나란히 서서 긴장되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린다.
“어?! 어머니, 아버님은 같이 안계시나요?”
“네? 별거중인데요. 왜요? 그 사람이 필요해요?”
“네, 호적상으로 아직 이혼이 되신 게 아니라면 아버님 동의도 받아야 하거든요.”
“둘 중 한쪽 보호자만 동의 해도 해주면 안돼요?”
“이전에 그런 적이 한번 있었다가 상대 쪽에서 자신의 동의 안 받고 대출해줬다며 컴플레인을 걸어와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마음 같아선 정말 해드리고 싶은데, 절차상 양쪽 동의가 필요합니다. 어머니.”
은행직원의 말을 듣자마자 루성은 한순간에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버린다. 그리고 이미 마음을 접은 듯 몸을 돌려 은행을 나가자고 한다. 하지만 그런 루성이 안타깝고 안쓰러운 옥경은 루성을 설득해보려 말한다.
“루성아, 눈 딱 감고 학자금대출 받을 때 까지만 들어가서 살래? 엄마는 루성이가 가자면 갈 거야.”
“내가 왜 그 인간한테 가서 살아? 됐어. 나 대학 안가.”
“후회 안 해?”
“그 인간한테 가서 내가 뭐 잘못했다고 굽히고 가? 잘못은 그 인간이 했는데. 나 대학 안가도 돼. 미안해 하지마 엄마.”
그렇게 루성은 호석의 집에 들어가서 사는 것 보다 대학 안 가는 게 낫다는 말을 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학에 대한 마음을 접는다. 옥경은 그런 루성에게 미안한 마음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 * * *
루성이를 통학시키느라 시간 때가 맞지를 않아서 쉽게 취직을 할 수 없던 나를 대신해서 엄마가 바쁘게 움직였다. 학생이 있고, 매일매일 끼니를 채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급하게 뽑은 차량의 대출 할부도 매월 납부해야하기 때문에 한 달에 지출되는 돈이 꽤 됐었다.
“루나야, 엄마 증평에 좀 태워다 줄래?”
“오늘도 일 있는 거에요? 완전 잘 나가네요 엄마.”
“고맙지 뭐, 사정알고 일 생기면 일부로라도 엄마 불러주고. 일 없을 땐 주방 알바라도 거들면서 도와드릴 수 있으니까.”
솔직히 속상했다. 사실 엄마도 신통방통 점괘가 잘 나와서 손님을 보고, 굿을 하고 해야 하는데 그 선생이란 사람이 허구한 날 엄마를 자신의 일터로 불러들였다. 동종업계 제자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주방찬모 취급을 하듯 부리는 그 선생의 행실이 못마땅했지만 아직 신 길에서 알아야 할 것, 배워야할 것이 많았던 애동인 엄마는 자존심 따위 바닥에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열심히 그 선생의 시중을 들으며 알바 비를 받고, 선생의 일에 수발을 드는 일로 들어가서 일당을 받으며 하루하루 그렇게 수입을 늘려가고 있었다.
어느 날 한가롭게 마당에 심어두었던 고추를 손질하며 집안을 돌보던 날이었다. 루성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온 나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말을 비추는 엄마.
“화 내지 말고 들어.”
“뭘요?”
“이번 주 주말에 미영이 올 거야.”
“조미영? 엄마 그동안 계속 연락하고 있었어요?”
“어. 그래도 항상 연락하면 루나 잘 있는지부터 묻고, 보고 싶어 했어. 그러니까 오면 막 다그치거나 따져 묻지 말고, 그냥 평상시처럼 대해.”
“...또 그냥 받아들여주란 말이네.”
“그래. 지가 먼저 굽히고 들어오는데 매몰차게 구는 것도 나쁜 거야.”
“...쉽게 될진 모르겠지만, 알았어요.”
* * * *
[첫사랑과의 재회]
루나의 형부는 성능이 원활히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름 쓸 만한 노트북이 하나 있다며 사주지 못하더라도 집에 있는 걸 갖다 준다며 들고 왔던 것이 있었다. 동생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음료공장에 알바를 다닐 때 즈음 루나에게 가져다 준 노트북.
루성이 군입대전 알바를 시작하고, 루나가 집근처 물류센터 사무직으로 취직을 해서 몇 개월이 흘렀을 때 즈음 이었다. 가져다준 노트북을 쓰기위해 인터넷을 신청하면서 IPTV를 신청하고, 대형할인마트에서 자그마한 TV까지 장만을 한다. 워낙 열악한 환경 때문에 인터넷 선이 들어온 것도 대단한 거라는 통신사 직원의 말.
무선인터넷이 되는 노트북은 아니었기에 랜선을 연결해서 인터넷을 사용해야 했었다. 노트북을 펼치고, 끊겼던 친구들 및 지인들과의 소식 망으로 가끔씩 접속을 했던 미니홈피에 낯익은 이름의 댓글이 남겨져 있었다.
‘루나야, 잘 지내? 폰 번호 좀 알려줘.-현재한’
분명히 잘 잊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루나는 다시 그 고등학교 시절에 재한과 연락을 하며 설레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치졸하게 굴기 싫어서 재한에게 연락처를 남긴 쪽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 한통이 온다.
‘오랜만이지? 뭐하고 있었어?-현재한’
그렇게 자연스럽게 재한과 루나는 다시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고, 연애할 때처럼 매일매일 문자가 오고가고, 하루에 한번 꼴로 전화통화를 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하루는 루나가 근무하는 물류센터 사무실 직원들끼리 뭉쳐 회식을 하던 날이었다.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렸고, 함께 한우를 구우며 술잔을 기울이던 동료들이 하나같이 울리는 루나의 휴대폰을 바라본다.
“루나야, 어디야?”
“나, 오늘 회식한다고 말했잖아.”
“남자도 있어?”
“있지. 회식이니까.”
애써 어색하게 웃음소리를 뱉으며 말하는 루나의 전화를 일방적으로 뚝 끊어버리는 재한. 재한의 이런 태도는 고등학교시절에 연애를 할 때도 종종 있었던 일이었다. 질투심이 강해서 자신 말고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은 이해조차 하지 못했었다. 지금 역시도 그런 식의 태도인 재한의 모습에 살짝 짜증이 나는 루나. 다음날 아무렇지 않은 척 혼자 화냈다가 풀어진 재한의 태도에 감정이 폭발하는 루나.
“어제 전화 그렇게 끊어버리는 매너 없는 행동이 어딨어?”
“어?!”
“회사식구들하고 회식을 하면 당연히 남자도 있을 수 있지. 그게 화내면서 전화를 끊어버릴 일이야?”
“루나야...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나 답지 않다고? 내가 어땠는데? 왜 그럼 난 화도 내면 안돼?”
“미안해, 안 그럴게 다음부터는.”
끝까지 화를 냈다면 루나는 끝을 볼 작정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하지만 금세 꼬리를 내리고 잘못했다 하는 재한의 태도에 금세 화가 누그러진다. 하지만 재한은 이전에 루나의 좋지않은 예감을 들게 한 행실들로 여전히 루나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루나는 깨닫는다. 한번 헤어졌던 관계가 다시 만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나아진 상태로 더 좋게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것을. 루나는 아직 마음에 남은 작은 미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매정하게 재한을 끊어내야 서로를 위해 좋을 것이라 판단한다. 어김없이 그 날도 전화벨이 울렸지만 루나는 풀리지 않은 감정으로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러자 문자를 보내온 재한.
‘루나야, 화 났어?-현재한’
‘오빠, 지금 오빠랑 나 무슨 사이야?’
‘어? 우리?-현재한’
‘바로 답 못하는 거 보니 이제 알겠다. 더 이상 지저분하게 굴지 말고. 연락 하지 마. 그게 나을 것 같아.’
‘미안해, 행복하게 잘 지내-현재한’
그렇게 다시 잘 될 줄 알았던 루나의 첫사랑과의 재회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씁쓸한 마음으로 상대를 정리한 루나의 기분도 썩 후련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관계가 늘어져 버리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영원히 재한과는 마지막의 연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