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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의 센스 건배사(乾杯辭)
선조들은 권주가로 주흥(酒興)을 즐겼다. 대표적인 권주가는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産)놓고, 무진 무진 먹세 그려’는 풍류와 멋이 차고 넘친다. 술꾼들이 술 마시는 명분을 만들듯 송강도 술을 즐기는 네 가지 이유, 기주유사(嗜酒有辭)를 만들었다. 첫 번째 이유가 불평일야(不平一也)로 마음이 편치 못할 때 마신다. 두 번째가 우흥이야(遇興二也) 흥에 겨워 마시고, 세 번째는 대객삼야(待客三也) 손님접대를 위해 마신다는 것, 네 번째 이유가 걸작이다. 난거인권사야(難拒人勸四也)로 권하는 잔을 뿌리칠 수 없어 마신다니 핑계치고는 절묘(絶妙)하다.
한편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있듯이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과음․과식․과로․과욕 등 무엇이든 지나치면 몸을 해치는 독이 된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적정수준’에 대한 기준을 세워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과한 음주는 결단코 피할 때이다.
아울러 술자리가 잦은 연말연시 시즌이면 돌아가며 한 사람씩 건배사를 하는 자리가 많다 보니 은근히 신경이 쓰이곤 한다. 건배(乾杯)는 글자 그대로 ‘잔을 비우다’란 뜻이다.
중국인들이 건배를 한 후 머리 위에 잔을 터는 시늉을 하는 것도 잔을 비웠다는 확인의 표시다. 하지만 건배의 보편적 의미는 술자리에서 서로 잔을 들어 축하하거나 건강 또는 행운을 비는 일이다. ‘건배구호’는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좋은 도구다. 건배사를 들을 때마다 “다음에 나도 써먹어야지”하다가도 막상 건배제의를 할 기회가 오면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기가 일쑤다. 한물간 건배사를 하면 분위기가 썰렁해지고, 너무 천박해도 민망해진다. 인류 역사에서 건배는 술의 시작과 궤를 같이하지만 건배의 풍습은 아이러니하게도 불신(不信)과 의심의 산물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고대 로마시대 지중해 패권을 놓고 다투던 카르타고의 병사가 로마군이 즐겨 마시는 포도주에 독을 탄 데서 시작됐다.
이후 로마에선 꼭 건배를 하고 독이 들지 않았음을 확인시키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이젠 건배사 모음 책이 있는가 하면 건배사를 모은 ‘치어 업 건배사’, ‘스토리 건배사 100’ 같은 스마트폰 응용 앱까지 등장했다. 건배사는 술잔 속에 빛나는 센스(sense, 감수성)다. 유머가 담긴 따뜻한 메시지로 일사불란하게 잔을 부딪치게 만든다는 게 녹록치 않다. 노년들 술자리에서 따끈따끈한 건배사라며 ‘명품백(명퇴조심, 품위유지, 백수방지)’이나 ‘멘붕(만날 붕붕 뜹시다)’을 외치면 “치매 끼 있는 건 아니냐?”고 핀잔받기 십상이다.
‘구구팔팔이삼사(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만 앓고 사흘 만에 죽자)’와 ‘빠삐따(모임에 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따지지 말자)’는 구시대 건배사로 구닥다리 취급받는다. 분위기에 걸 맞는 건배사가 어려운 이유다. 시대의 코드를 관통하고 삶의 지혜가 녹아있으면서 듣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3합을 갖추었다면 최상의 건배사임에 틀림없다.
아직 건배사의 주류는 3행시 스타일이다. 오징어(오랫동안 징그럽게 어울리자), 소화제(소통과 화합이 제일이다), 발음이 다소 비속어 같지만 개나발(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당나귀(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위하여)등이 그런 예다. 응답 형식도 빼놓을 수 없다. ‘뭉치자’고 하면 ‘똘똘’이라고 답하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은’이라고 외치면 ‘당신과 함께라면’이라 말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응용하는 건배사도 인기다. 직원들이 회사의 연말보너스지급에 관심이 있을 경우, 건배 제안자가 ‘응답하라’고 선창하면 일동이 ‘보너스’라고 후창 한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술잔은 비우고~”라고 외치면 “마음은 채우고~”로 화답하는 건배사가 솔깃하게 와 닿는다. 대구(對句)와 운율이 어울린다.
‘마당발(마주 보는 당신의 발전을 위하여)’도 무난해 보인다. 동창회나 고향친구들 사이에 흔히 쓰는 건배사는 ‘변사또’다. ‘변함없이 사랑하고 또 만나자’는 의미가 담겼다. ‘사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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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을 나누자’는 ‘사우나’와 ‘소중한 여러분의 시간에 잔을 대보자’는 ‘소녀시대’, ‘진실로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의 ‘진달래’는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 있는 건배사다.
또 “조통수”라고 하면 좌중은 어안이 벙벙할 것이지만, 곧바로 뜻풀이가 뒤따른다. “조국 통일의 수호를 위하여”라고. 그러면 모두 웃음을 감출 수 없게 된다. 진지하고 진취적인 유형이라면 다소 딱딱한 발음이지만 ‘조통세평’도 있다. ‘조국의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다’는 대의적 명분을 지닌 건배구호다. 어디까지나 어감이 좋고 유행어이면서도 풀이가 좋으면 가장 좋은 건배사가 된다. 그러니까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 젊은이들은 톡톡 튀는 재능으로 얼마든지 멋진 건배사를 만들어 조직문화에 보탬을 줄 수도 있다. 건배사로 치자면 우리만큼 유별난 나라도 드물다. 건배사는 단순한 술자리 구호가 아니다.
건배사에도 ‘대세’가 있고 시대상이 담겨 있다. 1960, 1970년대 경제개발시절에는 공생(共生), 협동(協同)을 강조하는 건배사들이 많았다. ‘위하여’나 ‘우리는! (하나!)’, ‘함께! (가자!)’ 등 모임의 대표가 건배사를 제의하면 참석자들이 함께 외치는 형태였다. 때로는 돌아가며 하는 건배제의가 부담스러워지기도 한다. 떠오르는 건 오직 술잔을 들고 ‘위하여’를 외치는 것뿐. 하지만 ‘위하여’만을 외쳤다간 왠지 구닥다리처럼 보일까 봐 걱정스럽다.
이제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신의 건배사를 하나쯤 가지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건배구호는 일단 짧고, 입에 달라붙는 발음을 가져야 한다. 누구나 쉽게 한 잔 ‘짠’하고 부딪치며 따라 외칠 수 있도록 말이다. 바로 “통통통, 쾌쾌쾌”. 언뜻 들으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된다. “통은 3통, 즉 소통, 형통, 대통. 의사가 소통하면 만사가 형통하고, 운수가 대통한다.” “쾌쾌쾌의 3쾌는 유쾌, 상쾌, 통쾌. 3통이 잘 되면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하다.” 또 우리의 건강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쾌식, 쾌면, 쾌변 즉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설하라는 웰빙을 기원하는 소망이 담겨 있는 청량제의 건배사도 보인다.
좋은 건배사로 연말연시 회식에 가장 어울리는 구호로 ‘나이야가라’를 빼놓을 수 없는데, ‘나이를 잊고 살자’는 뜻이다. 때로는 건배사가 엉뚱한 화살을 맞기도 한다. 경만호 전 대한적십자부총재는 2010년 11월 기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오바마(오빠, 바라만 보지 말고 마음대로 해)라는 건배사로 물의를 일으켜 사퇴했다. 건배사 내용이 부적절한데다 동맹국 국가원수의 이름을 들먹였다는 죄목(?)이다. 그 후 건배사 오바마는 두 가지 버전(오직, 바라는 대로, 마음대로/오늘은 바빠서 마누라에게 못가!)으로 진화(進化)했다.
‘성공과 행복과 위기극복을 위하여’의 ‘성행위’는 뜻은 좋아도 성적호기심을 유발하여 점잖은 자리에선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자제해야 한다. 직장동료끼리의 회식자리에서는 ‘주전자’가 주류 건배사. ‘주인의식을 갖고, 전문성을 갖추고, 자신 있게 살자’는 정체성이 담겼다. 상사가 “SS"라고 외치면 직원들이 ‘’KK"라고 화답하는 건배사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끼리는 끼리는 대로’의 줄인 말로 군사문화의 잔재가 엿보인다.
거듭 건배사는 짧지만 폭발력이 있어야 한다. 사회생활에서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건배사인 만큼 개성 넘치는 자신만의 건배사를 준비하여 스스로를 보여주는 기회로 만드는 것도 송년모임의 활력소가 될 것이다. 21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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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送舊迎新!
가는 한해! 모든 먹구름이 가고 우주의 장막을 뚫고 지상에 빛을 던지는 태양처럼 2014년 새해엔 벅찬 희망이 가득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불초 소생이 1999년 8월 퇴직 후 10년에 걸쳐 10여종 신문과 교양서적을 챙겨 에세이나 칼럼 등의 잡문을 만들어 50여명 동호인에게 발송하여 너무 雜多하다는 질책과 공감 등의 지도편달을 받아왔으면서도 관심과 배려로 값진 삶의 보람을 지녀왔습니다. 해가 갈수록 내 공부와 자질이 모자라 畵虎不成이 두렵고 그렇다고 絶筆하려니 덧없이 지내는 세월이 아쉽기 그저 없습니다. 따라서 새해엔 연 번호로 週 2회 일상생활에 많이 오르내리는 온갖 재담과 해학이나 인터넷유머들을 찾아 발송하려 하오니 파일을 열어 저장 복사해두면 전자책 이상의 ‘유머모음’책으로 간직할 수 있어 수시로 웃음의 대화로 활용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웃음이 넘치는 유머는 짧은 몇 마디의 말만으로 메말라가는 마음을 풍성하게 해줄 것입니다.
웃음은 상대방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웃음이 있는 삶은 행복이고 새해에도 더욱 건강하심을 기원합니다. 2014년 1월 1일. 남산범 이종범 배
첫댓글 자세한 건배사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와우~^^이렇게 멋진 건배사를 너무 쉽게 거저 얻어 횡재한 것 같습니다. ㅎㅎㅎ 회장님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