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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안내]『김교신전집』 표지 문안을 소개합니다.
『김교신전집』1, 2권 표지 자켓(앞날개와 뒷날개)에 실릴 김교신 선생과 편집자인 노평구 선생의 프로필과 전집 간행 안내, 그리고 1, 2권 뒷표지 문안 등을 소개합니다.
앞 날개
- 김교신(金敎臣)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하다가 함흥보통학교를 거쳐 1919년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했다.
그 해 일본에 건너가 도쿄(東京)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으며,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가르침을 받으며 기독교 신앙에 들어갔으며, 진정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1922년 도쿄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에 입학했으며, 1927년 졸업과 더불어 귀국하여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양정고등보통학교, 경기중학교, 송도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1927년부터 혼신의 힘을 쏟아 월간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간행했으나 1942년 3월호(제158호)에 실은 권두언 “조와(弔蛙)”가 조선의 민족혼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잡지는 폐간되고, 신앙 동지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것이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이다.
출옥 후 흥남의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복지를 위해 진력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불과 넉 달 앞두고 1945년 4월 25일 타계했다.
- 노평구(盧平久) : 『김교신전집』편집자
1912년 함경북도 경성(鏡城) 어랑(漁郞)에서 태어났다.
1929년 배재중학교 3학년 때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출감 후 학업의 길이 끊겨, 서울 마포 도화동 토막(土幕) 빈민촌에서 여러 해 동안 빈민 아동 교육에 종사했다.
빈민 아동 교육을 하던 중 내면적인 갈등과 종교적인 번민에 휩싸여, 김교신 선생을 찾아 한동안 신앙 지도를 받다가, 1936년 선생의 권유로 일본에 건너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제자인 쓰카모토 토라지(塚本虎二) 선생의 주일 성서연구회에서 10년간 성서를 배웠다.
1945년 귀국하여, 1946년부터 월간지 『성서연구(聖書硏究)』를 간행했으며, 제500호(1999년 12월)까지 발간했다. 같은 기간 서울 종로 YMCA에서 매 주일 성서 집회를 주관했다.
일제에 의해 거의 멸실되다시피 했던 『성서조선』 158권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편집하는 등, 10여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75년 『김교신전집』을 완간했다.
뒷날개
『김교신 전집』
제1권 인생론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성찰한 인생 에세이 모음집.
(신국판 / 400쪽 / 양장본 / 18,000원)
제2권 신앙론
일체의 형식과 제도를 거부한 순수한 기독교의 관점에서 다양한 신앙상의 문제점들을 짚어보는 신앙 에세이.
(신국판 / 400쪽 / 양장본 / 18,000원)
제3권 일기 1 / 제4권 일기 2 / 제5권 일기 3
1930년부터 시작해 1942년 폐간되기까지 『성서조선』에 게재된 일기로서, 김교신의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근간)
제6권 성서 개요
『신약성서』와 『구약성서』 전편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요지를 압축하여 정리한 성경 개설서.
(근간)
제7권 성서 연구
“성서조선 사건”으로 구속되는 탓에 결국 미완으로 남게 된 「데살로니가전서」를 비롯하여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 「골로새서」 등에 대한 성경 강의록.
(근간)
제8권 아직 활자화되지 않은 미공개 일기 및 서간문 등으로 꾸며질 예정이나, 편집 작업이 용이하지 않아 정확한 출간 일정을 발표할 수 없음.
별권 : 김교신을 말한다.
김교신을 가까이에서 바라본 벗과 후배, 제자들, 그리고 그의 글로부터 감화를 받은 독자들이 기록해나간 일종의 “김교신 평전 모음집”
(신국판 / 쪽 / 14,000 원)
1권 뒷표지
100년이 지나도 그리운 사람, 김교신
오늘에 와서 저를 생각함이 더 간절하다. 오늘에 저를 그리는 생각은 그 의미가 다르다. 나라의 미친 꼴을 보고, 썩는 꼴을 보고, 생명의 말씀을 가진 참 산 인물이 그리워서다. 저로 하여금 이 나라에 있게 하라. 있어서 말씀하게 하라.
―함석헌 (전 『씨알의 소리』 주필)
바른 삶이야말로 선생의 생의 지표요 척추였다. 선생 앞에서는 정부정(正不正)이 오직 정의일철(正義一徹) 사정없이 일도(一刀)로써 양단되어 생애를 통해 선생 좌우에 청탁(淸濁)이 함께 모이질 못했다.
―노평구 (『성서연구』 주필)
당시 지리 과목은 대부분 일본 지리였고, 우리나라 지리는 두서너 시간으로 마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1년을 우리나라 지리만 배웠다. 대(大) 고구려를, 세종대왕을, 이순신을 배웠다. 식민지 교육 아래서 자신에 대해 소경이었던 우리 소년들은 비로소 자신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 국토가 넓지 못한 것을, 인구가 많지 않은 것을, 백두산이 높지 못하고 한강이 깊지 못한 것을 한탄하지 않게 되었다.
―류달영 (서울대 명예 교수)
시험 보는 시간에 컨닝하는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눈물이 글썽해지는 선생이 계셨다. “아무개는 더럭더럭 내주는 졸업장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퇴짜를 놓고 나간 적이 있는데, 그대는 어쩌자고 그 짓을 하고 앉았는고.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협잡꾼밖에 더 되겠는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는 것이었다.
―윤석중 (아동문학가, 새싹회 회장)
수난과 순교의 시대를 살다 간 김교신 선생은 “한국의 흙으로 만들어져, 한국의 흙을 디디고 살고, 한국의 흙으로 돌아간 참 한국인”이다. 모세가 그랬듯이 그는 민족 구원의 복지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인도하였고, 드디어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생명을 묻어 단절된 역사를 이어준 다리가 되었다.
―외솔회 『나라사랑』 제17집 “김교신 선생 특집호”에서
2권 뒷표지
100년이 지나도 그리운 사람, 김교신
김교신은 민족적 기독교를 위해 싸웠다. 그의 싸움은 일본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한 싸움과는 달리, 조선의 이상을 중심으로 한, 말하자면 더욱 적극적, 장기적 전망을 갖는 싸움이었다.
―다카사키 쇼지(高崎宗司)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 편집 책임자
김교신은 … 참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일제에 저항하다 쓰러졌다. 그런데 교회 측은 어떠했던가 … 오로지 신앙과 전통만을 간판으로 내걸고 민족 해방에 대해서는 방관자적 중립적 태도를 취했고, 현장의 참여 속에서 선교를 한다는 의식화는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런 상황이 기독교를 일제가 강요한 신사 참배에 순응하고 나아가서 전쟁에 협력하고 더욱 일본 천황을 또 하나의 신으로 모시는 군국주의 찬양 친일 기독교로 전락시켰다.
―송건호 (언론인.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한겨레신문 사장)
김교신이 죽은 지 벌써 반세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는 놀라울 만큼 자랐지만 성숙 면에서는 하나도 성장한 것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김교신과 같은 선각자가 교회가 민족과 세계를 위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수 있는가를 오래 전에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가 전혀 귀머거리로 있었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홍근수 (목사. 향린교회 당회장, 한국기독교협의회 통일위원)
현대 한국의 종교계 인물 중에서 한용운과 김교신은 종교로 민족을 거듭나게 하려 한 종교개혁자다. 한용운이 불교계의 그 기수라면 김교신의 기독교계의 그 기수라 할 것이다. 그런데 한용운은 널리 알려져 있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김교신의 경우는 일반인에게는 물론이요, 기독교계에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한 분은 “민족의 시인”이라는 좋은 인상 때문에 그 불교개혁론도 전적으로 공감·수용되었는데, 한 분은 처음부터 기독교의 “이단자”로 안팎에서 몰렸기 때문이다.
―김정환 (교육학자. 고려대 명예교수)
격무 중에서도 가족을 위해 밭을 일구고, 가축을 기르시며 수고를 아끼지 않았음은 청빈만을 덕으로 삼고 가족에 대한 책임을 등지고 앉아 글만 읽으며 무기력한 생활인으로 자족하고 안거하며 처자를 희생시킨 우리의 선비들의 폐풍을 산 신앙으로 지양한 저에서 특이점을 찾을 수 있다.
―석진영 (시인, 찬송가 작사자. 현 『복음의 전령(The Christian Ambassador)』 주필)
첫댓글 '김교신'이 누구인 줄도 모르는 목사의 설교를 17년이나 들었으니...기껏 설명했더니 이단타령이나 해대고...진작 나왔어야 했는데...
선정애 님 덕분에 카페 초창기 묵은 글을 저도 읽어보네요..참 새삼스럽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