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머리에
이 책은 고구려 요동 출신으로 동아시아 불교의 초석을 놓은 승랑(僧朗: 450~530년경) 스님의 행적과 사상에 대한 연구서다. 승랑은 지금부터 천오백여년 전 중국 남조의 수도인 건강, 즉 현재의 난징(南京) 부근에서 교화활동을 하였는데 그 가르침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의 방식으로 제자 승전에게 전수되었고 손제자인 법랑 대에 이르러 하나의 학파를 형성한 후 증손제자인 길장과 혜균의 저술을 통해서 삼론학으로 집대성되었다. 삼론학의 사상적 토대 위에서 천태의 교학과 남종선의 수행론이 창출되었으며 남조의 화엄학 역시 그 연원이 승랑에게 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불교사상사에 끼친 승랑의 영향은 지대하다.
근대 불교학 탄생 이후 국내외의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승랑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다. 국내의 경우 1918년 <조선불교통사>를 통해 승랑을 소개한 이능화를 시작으로 최남선, 정인보, 김동화, 김잉석, 박종홍, 이민용, 유병덕, 최동희, 김항배, 김인덕, 이중표, 고익진, 박성배, 강건기, 남무희, 김영태, 박선영, 박상수, 이현옥 등의 연구가 이어졌고 일본의 경우 대표적인 연구자로 사카이노코요(境野黃洋), 사토타이슌(佐藤泰舜), 히라이슌에이(平井俊榮), 이토타카토시(伊藤隆壽)를 들 수 있으며, 중국의 탕용통(湯用彤)과 독일의 요르크 플라센(Joerg Plassen) 역시 승랑에 대해 연구한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승랑과 관련한 이들의 주장을 서로 비교해 보면 불일치한 내용들이 너무나 많다는 점이었다. 일본의 사카이노코요가 1907년 <지나불교사강(支那佛敎史綱)>에서 처음으로 승랑에 대해 소개한 이후 근 100여년 이상 지났지만 승랑의 본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승랑에게 삼론을 가르친 스승이 누구였는지, 승랑이 고구려 요동을 떠나서 중국의 장강(長江) 이남으로 내려온 시기가 언제였는지, 승랑이 남조 불교계에 전했거나 창안했던 신(新)삼론 사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끊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승랑에 대한 연구 자료가 너무나 빈약하고 그 가운데 상충된 내용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고대불교사상가 가운데 승랑이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점하는 위상은 다른 누구보다 높지만 원효나 원측 등과 달리 승랑에게는 독립된 전기도 없고, 저술도 전하지 않는다. 승랑과 관련된 단편적인 기록들조차 방대한 삼론학 문헌과 각종 사료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다. 승랑의 행적과 사상을 정확하게 그려내기 위해서는 산재하는 승랑 관련 기록들을 일일이 찾아내어 모두 취합한 후 서로 대조함으로써 작업가설을 세워야 하고, 그런 가설들을 반증하는 사례가 있는지 검토하면서 정설을 확정해야 하며, 그렇게 채택한 정설들을 논리정연하게 엮어내야 한다. 참으로 지난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승랑과 관련한 기록들을 취합하면서 누락시킨 내용이 있거나, 가설과 반례를 검토하면서 정설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연구자의 사심(私心)이나 편견이 개입하거나, 과거 선학들의 연구 성과 가운데 잘못된 내용까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연구를 진행할 경우 모든 연구는 사상누각이 될 뿐이다. 승랑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이설(異說)이 많은 이유가 이에 있을 것이다.
필자가 승랑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 석사과정에 재학하면서 고익진 교수의 <한국의 불교사상>(1987년)의 한 장(章)인 ‘승랑의 중관적 공관’을 읽은 이후였다. 그러나 그 당시 필자는 ‘원천의 불교’인 인도불교의 정체를 모색하는 데 전념하였기에 승랑을 연구할 여력은 없었다. 십수 년의 세월이 지난 2000년에 불교학연구회 학술회의에서 박상수 박사가 발표한 논문 「승랑의 삼론학과 사제설에 대한 오해와 진실」의 논평을 담당하면서 승랑과 관련한 많은 내용들이 아직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확인하였고, 언젠가 동아시아불교로 연구영역을 넓혀서 승랑에 대해 깊이 천착해보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 후 개인적으로 진행하던 다른 연구들을 모두 마무리 한 2004년부터 승랑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숙독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먼저 승랑에 대한 과거의 연구성과 가운데 삼론학 문헌에 실린 내용과 상반된 주장을 담은 현대의 연구성과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일본의 사카이노코요나 중국의 탕용통은 천태종의 담연(湛然)이 <법화현의석첨(法華玄義釋籤)>에서 승랑의 강남도래 시기를 제(齊)의 건무년(建武年: 494~498)이라고 기록했던 점에 근거하여, 길장이 칭송하는 승랑의 역할 가운데 많은 부분이 사실과 다를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아시아불교사에서 점하는 승랑의 위상을 격하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논지는 김잉석(1959)과 일본의 히라이슌에이(1978)에 의해서 반박되었으며, 박상수(2000)가 이런 격하와 반박의 과정을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필자는 「승랑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라는 이름의 시리즈 논문 세 편을 통해서 이에 대해 밝히면서 승랑의 생몰연대, 승랑의 삼론학습 과정, 승랑이 고구려 요동을 떠나서 섭산의 서하사에 머물기까지의 행적, 승랑이 교화한 인물 등에 대해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였다. 세 편의 논문 가운데 제1편은 2005년 2월 발간된 <한국불교학> 제40집에 실었고, 제2편은 같은 시기에 발간된 <보조사상> 제23집에, 제3편은 2008년에 발간된 <한국불교학> 제50집에 실었다. 또 2006년 <한국불교학> 제45집에 발표했던 「신삼론 약교이제설의 연원에 대한 재검토」라는 논문에서는, ‘약교이제설의 창안자는 승랑이 아니라 광주의 대량’이라고 주장하는 일본학자 사토테츠에이(佐藤哲英)의 논지를 비판하였다. 이상 네 편의 논문을 쓰면서 필자는 과거에 일본이나 중국의 학자들이 승랑의 위상을 격하시킨 것과 달리, 동아시아 불교사상사에 끼친 승랑의 영향이 삼론학 문헌에서 전하는 것 이상으로 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승랑은 동아시아 불교의 흐름 전체를 대승으로 전회케 한 사상가였다.
과거의 연구물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승랑에 대한 필자 나름의 연구를 시작했는데, 승랑을 객관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 선행해야 할 작업은, 유관 자료에 산재한 기록들 가운데 어느 것이 승랑과 관계된 것인지 선별하는 일이었다. 이를 연구하면서 작성한 논문이 2007년 <불교학연구> 제17호를 통해 발표한 「삼론가의 호칭과 승랑의 고유사상」이었다. 필자는 이 논문을 통해서 삼론학 문헌에 실린 다양한 호칭 가운데 승랑의 특칭이 무엇인지 검토하였고, 그런 특칭과 관계된 내용들을 취합함으로써 이어지는 연구를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승랑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지만 승랑의 사상이 담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헌으로 양무제의 「주해대품서」와 그 장남인 소명태자의 「해이제의」가 있다. 전자는 양무제의 <대품반야경> 주석의 서문으로 517년에 작성되었으며, 후자는 진속이제(眞俗二諦)에 대한 소명태자의 강의록으로 518년에 작성되었는데 승랑이 512년에 양무제에게 간접적인 가르침을 주었다고 전하기에 그 시기나 내용으로 볼 때 이 두 문헌 모두 승랑의 영향 하에 저술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불교학> 제53집에 발표한 「양무제의 ‘주해대품서’에서 보이는 승랑의 영향」과 <불교학연구> 제24호에 실린 「소명태자의 이제 해석과 그 연원」이라는 두 편을 논문을 통해서 이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 승랑과 양무제 부자의 관계를 조사하면서 양의 삼대법사 가운데 개선사(開善寺) 지장(智藏)을 통해서 승랑의 가르침이 소명태자에게 전해졌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국불교학> 제54집에 「개선사 지장과 삼론학의 성립」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이를 발표하였다. 이상 소개한 필자의 논문들을 발표 시기 순으로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 「승랑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1」, <한국불교학> 제40집, 2005년(2월)
B. 「승랑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2」, <보조사상> 제23집, 2005(2월)
C. 「신삼론 약교이제설의 연원에 대한 재검토」, <한국불교학> 제45집, 2006
D. 「삼론가의 호칭과 승랑의 고유사상」, <불교학연구> 제17호, 2007
E. 「승랑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3」, <한국불교학> 제50집, 2008
F. 「양무제의 ‘주해대품서’에서 보이는 승랑의 영향」, <한국불교학> 제53집, 2009
G. 「개선사 지장과 삼론학의 성립」, <한국불교학> 제54집, 2009
H. 「소명태자의 이제 해석과 그 연원」, <불교학연구> 24호, 2009
이 논문들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본서 ‘Ⅱ.승랑의 생애와 사상’에 삽입 또는 반영하였다. 승랑의 행적과 생애에 대한 논문인 ‘A, B, E’의 경우 본서 ‘2.승랑의 생애’에 반영되어 있고, 약교이제설의 기원을 추적한 ‘논문C’의 경우 ‘4.승랑의 사상, (3)승랑이 창안한 신삼론 사상, ③이제시교론 - 진속이제는 교법이다’에, 승랑의 특칭에 대해 조사한 ‘논문D’는 ‘1.승랑의 호칭, (2)삼론가의 호칭과 승랑’에, 양무제의 ‘주해대품서’에서 승랑의 영향을 찾아 본 ‘논문F’는 ‘4.승랑의 사상, (2)승랑이 전한 관하의 삼론학, ④하서 도랑의 중도불성론’에, 개선사 지장에 대한 ‘논문G’와 소명태자에 대한 ‘논문H’는 ‘2.승랑의 생애, (4)강남에서 승랑의 행적, ⑤양무제에게 끼친 영향’에 그 일부가 실려 있다.
상기한 여덟 편의 논문을 통한 예비연구를 마친 후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가기에 앞서 필자는 두 가지 작업에 주력하였다. 하나는 근대불교학 탄생 이후 지금까지 국내외 학계에서 이루어진 승랑 관련 연구성과 가운데 유의미한 것들을 선별하여 그 요점을 정리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각종 대장경과 사서(史書) 등에서 발견되는 승랑 관련 기록들을 모두 모아서 번역하고 주석하는 일이었다. 전자는 ‘Ⅳ.승랑 연구의 역사’, 후자는 ‘Ⅴ.승랑 관련 자료의 번역과 주석’이라는 제목으로 본서 후반부에 배치했다. 서술의 논리적 순서로 본다면 연구사를 정리한 ‘Ⅳ.승랑 연구의 역사’를 본서의 전반부에 싣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그럴 경우 독자들은 정리 안 된 이설들을 접하면서 혼란만 느낄 것이고, 결국 본론을 읽어보지도 않은 채 책을 내려놓을 것이다. 그리고 ‘Ⅱ.승랑의 생애와 사상’에서 ‘승랑의 호칭’[제1절], ‘승랑의 생애’[제2절], ‘삼론학의 특징과 승랑 사상의 성립 배경’[제3절] ‘승랑의 사상’[제4절]에 대해 상술하였으며, 제Ⅲ장에서는 승랑의 생애와 사상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도록 이상의 논의들을 종합, 요약하였다.
연구 도중인 2007년 말에 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의 ‘인문저술지원사업’ 과제로 채택되어 연구비 지원을 받게 되었다. 완료시한이 정해져 있었기에 연구에 속도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연구재단의 ‘당근’과 ‘채찍’이 없었다면 본서는 수 년 후에야 세상에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본서에 대한 지원을 결정해 주신 인문저술지원사업 심사위원과 한국연구재단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
2003년의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 연구>에 이어서 ‘(주)지식산업사’에서 본서의 출간을 맡아주셨다.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대한 깊은 관심과 높은 식견으로 연구자들을 항상 격려하고 후원하시는 김경희 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끝으로 본서를 포함하여 필자가 쓴 글들을 언제나 즐겁게 읽으면서 조언해 주는 도반, 길상화(吉祥華) 최선원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함께 적는다.
부처님 열반하시고 2555년 지난 2월 22일
사당동 서재에서 도남 김성철 합장
|
첫댓글 진짜 희귀한 책입니다. 고생고생한 흔적이 보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선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가슴 벅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