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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6년
고려사 제29권 - 세가 제29 충렬왕 경진 6년(1280)
경진 6년(1280년) 봄 정월 갑진일에 주열, 곽여필을 파면하였다. 기유일에 별들의 운행 현상이 자주 변동되었으므로 참형, 교형 이외의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계축일에 왕이 처소를 본 궁궐로 옮겼다. 계축일에 대장군 인후, 장군 고천백(高天伯)을 탑납과 함께 원나라에 파견하였다. 임술일에 왕과 공주가 동지(東池)의 경치를 구경하고 그 길로 관음사에 갔다. 을축일에 덕천사(德泉寺)의 주지 익장(益藏)이 영춘현(永春縣)의 아전을 때려죽이고 또 기생 옥진(玉眞)과 간통하였으므로 해도(海島)에 귀양 보냈다. 익장은 원종이 총애하던 비(妃)의 아들이다. 병인일에 홀적이 새 궁전에서 왕을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였다. 기사일에 친종(親從) 장군 박연(朴延), 중랑장 이인(李仁)을 동녕부에 보내 부장(夫匠)을 조사하여 데려오게 하였다. 2월 초하루 계유일에 홀적이 왕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고 을해일에도 또 연회를 열어 왕을 대접하였다. 기묘일에 교위 정지연(鄭之演)을 원나라에 보내 환도 3백 78자루를 바쳤다. 경진일에 낭가대가 왕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임오일에 응방이 왕을 위하여 연회를 열었는바 합팔나, 낭가대 등 여러 외국 사신들이 모두 이에 참석하였다. 병술일에 중랑장 유거에게 명령하여 대부(大府)의 재물과 보화를 수색하여 궁중으로 반입하였다. 무자일에 왕이 수강궁에 처소를 옮겼다. 을미일에 왕이 사판궁에 돌아왔다. 병신일에 밀직부사 이존비가 합백나(哈伯那)와 함께 전라도에서 전함을 돌아보았다. 무술일에 왕과 공주가 현화사(玄化寺)에 가서 승지 염승익(廉承益)에게 명령하여 불전(佛殿)을 만들게 하였다. 3월 초하루 임인일에 대장군 인후, 장군 고천백이 탑납과 함께 원나라에서 돌아왔다. 탑납이 절령참에 이르니 옹진 등 몇 개 현이 점심 대접을 훌륭하게 하면서 어떤 사람이 탑납에게 고하기를 “우리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다 응방에 예속되었으니 얼마 남지 않은 가난한 백성들이 무엇으로써 국가의 만반 경비를 감당해 내겠는가? 우리는 국가에 주기(朱記)를 도로 바치고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소연하였으므로 탑납이 와서 재상들을 힐책하여 이르기를 “동쪽 (고려) 백성은 어찌 천자의 적자가 아니란 말인가? 백성들의 곤란과 고통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구제하지 않고 있으니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실정을 묻는다면 무슨 말로 대답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재상이 왕에게 말하기를 “응방의 폐단을 없애 주도록 하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왕이 노하여 회회 사람으로서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자를 청하여다가 여러 도들에 있는 응방을 나누어 관리하도록 하고 재상들을 억압하여 다시는 감히 말을 못하게 하였는데 조인규가 힘써 충고하였고 또 공주도 좋지 않다고 말하였으므로 왕이 겨우 그 일을 그만두었다.
계묘일에 검교 대장군 오광찰(吳光札)을 불러다가 명인전(明仁殿)의 시위 장군으로 임명하고 붉은 띠를 주었다. 광찰은 89세의 노령으로 동복현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아들인 중 조영(祖英)이 왕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이러한 명령이 있은 것이다.
갑진일에 서해도의 기묘년 전미(轉米)를 그만두게 하고 그것을 절령도의 각 역참(驛站)에 주어서 낭가대를 접대하게 하였고 또 궁실(宮室)과 전함 건설에 소용되는 철 값(鐵價) 부장(夫匠)의 식량 등을 지급하게 하였다. 무신일에 왕이 친히 본 궁궐에서 3계(三界)에 기도하였다. 경술일에 여러 왕족들과 재상들이 새 궁전에서 왕을 위하여 연회를 열었는데 유경, 황보기(皇甫琦), 최영(崔瑛), 송송례, 변윤 등 퇴직(致仕)한 재상들을 불러다 연희에 참석하게 하였다. 임자일에 감찰사(監察司)에서 왕에게 고하기를 “전자에 강도(江都)에 있을 때에는 공납물과 세곡의 수입으로써 충분치는 못하나 그런대로 수요를 충족하였는데 지금 좌우창(左右倉)의 수입이 급격히 감소되었고 또 대방주(大坊廚) 외 칠색(漆色), 안색(鞍色), 아도적 등 여러 곳에 주는 식량도 모두 우창에서 공급받으니 청컨대 이런 공급은 면제시켜 주십시오. 또 궁궐을 건축하는 공사가 벌써 3년이나 되는데 양반들 가운데 복예(僕隸)가 없는 자들은 다만 자기 녹패를 팔아서 사람을 고용하여 부역에 응하든가 또는 자기 스스로 역사에 나가 일하는 자들이 있으니 청컨대 이것 역시 면제하게 하고 농한기를 기다려 일을 시키게 하여 주십시오. 또 각 도의 안렴사 별감은 그 직분이 수령들의 사업 정형을 고찰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탐문하는 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즈음은 모두 다 왕에게 바친다는 구실로 백성들의 명주, 모시, 가죽, 돈, 포(脯), 과실, 명표지(名表紙) 등의 물건들을 수탈해서 권세 있고 지위가 높은 자들에게 뇌물로 주니 청컨대 모두 그 죄를 다스리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더니 왕이 다만 명표지(名表紙) 수납을 면제할 것을 허락하였을 뿐이었다. 을묘일에 감찰사에서 왕에게 진언하여 당시의 정사에 대하여 논박하였더니 왕이 크게 성을 내어 숭문관에서 시사(侍史) 심양을 문초하고 잡단 진척(陳倜)과 시사 문응(文應)을 해도(海島)에 귀양 보냈으며 전중 시사 이승휴(李承休)를 파면시켰고 장군 김일(金鎰)을 시승(侍丞)으로, 낭장 우천석을 잡단으로 좌랑(佐郞) 민훤(閔萱)을 시사(侍史)로, 전(前) 광주 판관 이인정(李仁挺)을 지후(祗候)로, 민지(閔漬)를 전중 시사(殿中侍史)로 각각 임명하였다. 병진일에 왕이 본 궁궐에 가서 장경 도량을 베풀었다. 왕이 궁전 뒤에 진달래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사운시(四韻詩) 1편을 짓고 사신(詞臣) 백문절(白文節), 반부(潘阜), 곽여(郭預), 민지 등 18명으로 하여금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문절 등이 왕에게 진언하여 심양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더니 왕이 즉시 명령하여 석방케 하였으며 얼마 있다가 또 척, 응 등도 석방케 하였다. 무오일에 원나라에서 만자(蠻子) 해아(海牙)를 보내 황제의 칙명으로 천하의 군, 국(郡國)들에서 도망한 군사들과 회회 사람들이 제멋대로 가축을 도살하는 것을 금하게 되었다고 전달하였다. 신유일에 왕이 명령을 발포하였는데 “현 시기 유학(儒)을 한다는 선비들은 다만 과거에 필요한 글만 공부하니 경, 사(經史)를 널리 통달한 자들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경서(經書) 하나의 사서(史書) 이상을 통달한 자로 하여금 국자감(國子監)의 교수로 임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재윤(司宰尹) 김제, 정랑 최옹(崔雍), 좌사간 방유(方維), 전(前) 통사 사인(通事舍人) 유윤(柳治), 권지 지후 설조(薛調), 전 지후 이극, 오한경(吳漢卿)들로 경사(經史) 교수(敎授)에 임명하였다. 무진일에 장군 조윤통(曹允通)이 원나라에서 돌아왔다. 중서성(中書省)에서 담선 법회(談禪法會)를 다시 개설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여름 4월 계미일에 서리가 내려서 볏모가 죽었으며 갑신일에 역시 이와 같이 서리가 내렸다. 병술일에 중랑장 간유지(簡有之)를 원나라에 파견하였다. 평장 아합마(阿哈馬)가 아름다운 여자를 구하였는데 홍원사 진전 직(直)인 장인경이 자기 딸을 보내자고 요청하였기에 간유지가 그를 데리고 갔다. 그래서 이에 장인경에게 낭장 벼슬을 주었는바 당시 사람들이 그가 딸을 팔아서 관직을 얻은 데 대하여 비난하였다. 그런데 아합마는 그 여자가 명문의 딸이 아니라 하여 받아들이지 아니 하였다. 경인일에 왕이 공주와 함께 길상사에 갔고 박연 폭포를 구경하였다. 줄랑장 지선(池瑄)을 동녕부에 보내 선대의 임금들의 능묘를 발굴한 데 대하여 물었다. 신묘일에 왕이 공주와 함께 새로 짓는 궁궐에 갔는데 장인(匠人)들이 말하기를 “3년 동안 고역에 하루도 쉬지 못하였으니 처자들은 무엇으로 살아가겠습니까? 지금 농번기가 되었으니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애걸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계사일에 가물이 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부채나 삿갓(笠)을 쓰는 것을 금지하였다. 을미일에 이백기(李伯琪) 등에게 급제를 주었으나 날씨가 가물었으므로 꽃을 주는 의식은 거행하지 않았다. 또 날씨가 가물었으므로 시장을 골목 안으로 옮겼다. 5월 계묘일에 왕이 친히 시부(詩賦)를 짓는 것으로써 문신들을 시험 치게 하여 서적점 녹사(書籍店錄事) 조간(趙簡) 등 아홉 명을 뽑았고 그들에게 황패(黃牌)를 주었으며 그들을 내시(內侍)에다 입적(入籍)시켰다. 왜적이 고성 칠포에 침입하여 어부를 사로잡아 갔으므로 대장군 한희유(韓希愈)를 파견하여 바닷길을 지키게 하였다. 또 홀적(忽赤) 순마 여러 영부(領府) 등에서 2백 명을 선발하여 경상도 전라도로 나누어서 수비하게 하였다. 왜적이 또 합포에 침입하여 어부 2명을 잡아갔으므로 이에 대장군 인후, 낭장 지선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을사일에 홀적에게 명령하여 격구(擊毬)놀이를 하게 하고 왕이 공주와 더불어, 양류(凉樓)에 올라 구경하였다. 임자일에 우박이 내렸으므로 장님, 중들을 모아서 비가 내리기를 기도케 하였다. 계해일에 비가 내렸다. 을축일에 왕이 공주와 더불어 현화사에 갔다. 병인일에 문학을 하는 신하들과 전시(殿試) 급제자들을 불러서 왕이 지은 사운시를 내어 보이고 촛불을 켜서 그것이 닳는 시간 이내에 운에 맞추어 시를 지어 내게 하였다. 좌사간 반부와 대제(待制) 곽여는 후배들과 한 자리에서 짓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였으나 좌우에 있는 사람들의 강요로 할 수 없이 그들도 시를 지어 올렸다. 갑술일에 유비(柳庇)가 원나라에서 돌아왔는데 황제는 고려의 군졸들로써 왜적을 방어할 것을 명령하였다고 전달하였다. 이달에 한재와 충재가 있었으므로 원나라 중서성에서 공문을 보내 쌀 1만 석을 더 사들이게 하였다. 6월 기묘일에 낭장 지선이 원나라에서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만자(蠻子), 해아는 원나라 조정에서 보낸 자가 아니니 마땅히 원나라 서울로 압송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전하였다. 신사일에 새 궁궐이 완성되었으므로 그 이름을 응경(膺慶)이라 하고 누각은 한벽(寒碧), 문은 태통(泰通)이라고 하였다. 장군 박의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새매를 바쳤다. 가을 7월 계묘일에 왕이 승지 염승익의 저택으로 처소를 옮겼다. 장군 원경을 원나라에 파견하였다. 병오일에 첨의 중찬 김방경이 글을 올려 퇴직할 것을 청원하였더니 왕이 승지 정가신(鄭可臣)을 보내 김방경을 잘 회유하여 다시 벼슬살이를 하도록 하였다. 신해일에 장군 박의가 원나라에서 돌아왔는데 황제는 왕에게 입조(入朝)할 것을 통고하였다. 갑자일에 왕이 사판궁에 처소를 옮겼다. 을축일에 서해도 계점사 우준충(禹濬沖)을 도지휘사로 임명하였다. 병인일에 밀직부사 김주정을 원나라에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정묘일에 중서성(中書省)에서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내 왔다. “쌍성(雙城)에 있는 민호(民戶)들 가운데 한신(韓信) 등 3호를 이미 데려가도록 하였다. 그 밖에 덕광(德光) 등 6호는 쌍성에 아직 머물러 두게 하였는데 앞서 연첩아(宴帖兒) 원단(元斷)과 고려에서 파견한 관원인 위문개(魏文愷)가 본국(고려)에 전호(全戶) 30호와 독신자 남녀 42명을 놓아 주어 돌려 보내게 결정한 후에 덕광 등을 돌려 보내는 일을 도성(都省)에다 보고하였더니 도성에서는 이 보고에 준하여 상기 호구 인원들에 대하여서는 공문을 개원로(開元路) 등의 선위사(宣慰使)에게 보내 쌍성에 내려가서 사실을 조사 구명하여 성에다 보고케 하였다. 그 밖에도 공문을 띄우게 하였으니 잘 받아 보고 덕광 등 6호도 데려 가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8월 신미일에 왕이 장차 원나라로 떠나려고 하였고 또 천문 현상이 누차 변화되었으므로 참형, 교형 이외의 죄수들을 용서하여 주었다. 같은 날에 왕이 원나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계유일에 원경이 원나라로부터 중서성의 명령을 가지고 돌아왔는바 그것은 탐라 달로화적(達魯花赤)으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 자기의 철장(鐵匠)을 시켜 전함(戰艦)을 만들게 하라는 것이었다. 병자일에 원나라에서 황제의 아들 애아적(愛牙赤)을 대청도에 귀양 보냈다. 계미일에 왕이 창의현(昌義縣)에 들르니 영녕공(永寧公)이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왕에게 인사하였다. 신묘일에 공주가 애아적을 위하여 새 궁전에서 연회를 배설하였다. 왕이 상도에 도착하였는바 이때 황제는 도간나올에 있었으므로 왕이 그 길로 황제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을미일에 황제를 예방하니 황제가 왕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고 왕을 따라 간 신하들도 연회에 참석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박의를 시켜 황제에게 보고하기를 “동정(일본 정벌)의 일에 관하여서는 내가 조정에 가서 면담하고 지시를 받겠다”고 하였더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흔도, 홍다구, 범문호(范文虎)는 모두 왕보다 먼저 명령을 받았는데 홍다구가 말하기를 “제가 만약 이번에도 일본을 정복하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다시 폐하를 뵈옵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약속하기를 “홍다구, 흔도는 몽고, 고려, 한의 4만 명 군대를 인솔하여 합포를 출발하고 범문호는 만군(蠻軍) 10만 명을 인솔하고 강남을 떠나 모두 일본의 일기도(一岐島)에 모이기로 하되 두 군대가 다 모인 다음에 곧바로 일본을 친다면 반드시 격파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일곱 가지 일을 가지고 요청하였는데 그것은 “(1) 우리 나라 군대로써 탐라를 지키고 있는 자들을 동정 군대에 보충하도록 할 것. (2) 고려군, 한군을 감소시키고 도리 첩목아로 하여금 몽고군을 더 많이 징발하여 진격하도록 할 것. (3) 홍다구의 관품 직무를 더 높여 주지 말고 그가 성공하는 것을 기다려 상을 줄 것이며 또 도리첩목아로 하여금 나와 함께 정동서(征東省)의 사업을 관할하게 할 것. (4) 우리 나라의 군관(軍官)에게도 모두 패면(牌面)을 줄 것. (5) 한지(漢地)의 바닷가 사람들도 아울러 초공(稍工)과 수수(水手)로 충당할 것. (6) 안찰사를 보내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일에 대하여 위문하도록 할 것. (7) 내가 직접 합포로 가서 군대와 마필을 검열하여 보내도록 할 것” 등이었다. 황제가 왕의 말을 듣고 대답하기를 “보고한 바는 다 접수한다”라고 하였다. 무술일에 원나라 황제가 왕에게 귀국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승상 안동(安童)의 어머니가 좋은 말 한 필을 왕에게 선물로 드렸다. 9월 기유일에 왕이 북경에 이르니 강수형(康守衡)이 그의 저택에서 왕을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였다. 동지(同知) 송정(宋貞)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유학자였다. 왕이 그에게 자기가 지은 9일 시(九日詩) 2편을 내어 보였다. 병진일에 도리 첩목아가 길가에서 왕을 맞이하여 말 3필을 바쳤다. 정동원수부 진무 야속달(也速達)이 두 통의 공문을 가지고 왔다. 그 하나는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흔도, 홍다구, 범(范) 우승(右丞) 이(李) 좌승(左丞)에게 일본을 정복하는 행중서성(行中書省)의 사업을 위임하니 즉시로 군대 마필 군수품을 조사하되 고려에서 현재 관찰하고 있는 군량 저축, 전함, 초공, 수수(水手) 및 일체의 군수품들의 수량에 의거하여 조회-검사하여 법식대로 준비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쓰게 할 것이며 그때에 가서 실수가 생기지 않도록 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군대들이 지나가는 곳들에서 공법(公法-국법)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들이 불을 질러 곡식을 태워 버릴 우려가 있는 바 이런 일은 나라와 백성에게 이해 관계가 있으니 지시하는 공문을 내려보내어 마땅히 방(榜)을 써서 내붙이어 금지하게 할 것을 요망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후과를 책임지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병인일에 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와서 사판궁에 자리 잡았다. 정묘일에 원나라에서 야속달 최인저(崔仁著)를 보내 수달단으로서 개원(開元), 북경, 요양의 각 노(路)에 있는 자들을 동녕부에 이송하여 두게 하였는바 이것은 장차 일본 정벌에 동원하려는 것이었다. 겨울 10월 신미일에 경외병(京外兵)들을 점검 사열하였다. 정해일에 각 도(道) 지휘사들로 하여금 판관 녹사를 폐지하게 하고 다만 도평의록사(都評議錄事)만 남겨 두게 하였다. 무자일에 궁인들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케 하였는데 젓대와 퉁소를 불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궁 바깥에 들려 왔다. 나라 사람들은 일본 정벌의 큰 사업을 앞둔 까닭에 이런 유흥에 대하여 모두 이맛살을 찌푸리고 탄식하였다. 기축일에 감찰사(監察司)가 각 관아의 근무 정형을 검열하였는바 이것을 아시 감검(衙時監檢)이라고 하였고 항상 겨울 여름의 첫 달에 실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지방에 변고가 많다는 것으로 팔관회와 신년 및 동지(正, 至)에 제하여 축하의 글을 올리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경인일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정유일에 정동 행성에서 자모아(者毛兒)를 피견하여 군량과 군기를 갖추고 군사들을 징발하였고 두목(頭目)을 결정 임명하고 출정 준비를 하였다. 무술일에 중찬 김방경이 노쇠로 인하여 퇴직하겠다고 다시 청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달에 원나라 행중서성에서 정동군사(征東軍事)에게 공문을 보내 왔는바 그 공문은 다음과 같다.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일본을 정벌하게 되었는데 이에 지원 15년(충렬왕 4)에 도착한 추밀원 공문에 의하면 먼젓번에 군대를 전선에 출동시켰을 때에 도망 사고와 헐역(歇役) 군인들이 있었으매 황제에게 보고하여 명령을 받고 관원을 각 노(路)에 파견하여 각 노의 오로(奧魯) 관리들과 함께 다시 조사하게 하였고 만일 그 사이에 기만 온폐 도익(逃匿)한 자가 있으면 오로 관리들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그들을 파직시키고 그 인구(人口)와 재산을 몰수하였는바 이와 같이 엄격히 취급하여 (오로 관리들로 하여금 해당 인원을 오로들 가운데서) 보충케 하였다. 본원(추밀원)에서 조사하여 얻은자료에 의하면 상기한바 도망 사고와 헐역 군인이 많이 생긴 것은 대개 강을 건넌 이후 군대와 군마를 여러 곳에서 나누어 징발하여 출정케 하였다. 그 관군 두목(管軍頭目)이 자기가 직접 관할하는 군인들이 아니라 하여 그들을 배려하여 돌보아 주지 않았으며 또 힘이 강하고 돈이 있는 자들을 합필적 발도아(合必赤拔都兒)로 만든다는 명목으로 때때로 자기 소속 인원으로 차지하여 부려먹고 따로 두목에게 위임하여 관리케 하고 해당 군대 가운데서는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친관(親管) 두목은 도리어 관할 할 군대가 없어 출정(出征) 순찰 보초 기타 일체의 공역(工役)이 있을 때면 그 나머지 군인들을 시켜서 하게 되니 응당 이들에게 점차로 이탈을 가져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혹은 또 전선에 나갔을 때 사소한 재물을 얻었다든가 포로를 잡았다든가 하면 또 이름을 지정하여 구전(口錢)으로 한몫 먹으며 군인들에게 금전 재물을 얼마씩 할당하여 거두어 내며 군인들이 좋은 말을 가지고 있으면 군관들이 임시로 빌려 쓴다 하고는 억지로 나쁜 말과 바꾸며 군대와 군마의 식량 사료를 깎아 먹으며 군인들이 굶는지 추워하는지 돌보지도 않는다. 관청들의 공역(工役)을 너무 빈번하게 또 한꺼번에 몰아서 시키며 군인들의 힘으로 하기가 쉬운가 어려운가에 대하여는 고려해 보지도 않는다. 군인이 병 들면 의원을 시켜 고쳐 주지도 않고 겨우 치료되어 가는 것 같으면 곧 과중하고 어려운 일을 시켜 군인이 죽게 만들어 놓는다. 병기 갑옷 기타의 물건들이 손상되어도 미리 조사 검열해 두지 않고 어쩌다가 주관(主管)하는 자의 검열을 받게 되면 그때에야 바삐 서둘러 군인들에게 강요하여 빚을 내어서라도 사서 보충하게 하는 등 이와 같이 정실과 폐단이 많다. 때문에 도망 헐역 군인들이 많이 생겨 전선에 나가게 될 때에는 군용으로 쓰는 데 실수와 오착이 생기게 하고 또 오로 내부에서 보충하게 하니 오로 관리들로 하여금 이 때문에 또 폐단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므로 소요스럽고 불안한 정세를 조성하여 놓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관군(管軍) 관리의 잘못이니 만일 금지하지 않는다면 새로 군인들이 보충되어 전선에 나갔을 때에도 그 전과 같은 나쁜 버릇을 그대로 배워서 이전처럼 합필적 발도아로 만든다는 명목으로 함부로 차지하여 부려먹으며 주의하여 배려해 주려 하지 않는다. 또 급한 때를 당하여 도망하는 자가 생기면 다시 와서 오로들 가운데서 보충 인원을 내게 하니 이럭저럭하여 결국은 군호(軍戶)를 손상시키고 파괴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이 사실을 보고하여 황제의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행성(行省) 행원(行院) 도원 수 각 위(衛)의 지휘사 초토(招討) 만호 이하의 상급 및 하급 관군관(管軍官) 수령관(首領官) 진무인(鎭撫人) 등을 훈계하며 그들에게 추밀원에게 제정한 일반적 규율 조항들을 교부하여 금지하고 처벌하게 할 것. 다시 제형 안찰사(提刑按察司)의 관원에게도 교부하여 항상 주목을 돌리어 구체적으로 규명하도록 하며 추밀원과 행성 행원은 함께 군관들이 실행한 직무상 공사(公事)의 정형을 고찰하여 그 공적과 과오를 명백히 규명하고 황제에게 보고하여 상벌을 사정하도록 할 것이다. 본 성(행중서성)에서는 지금 바로 출정(出征)이 가까웠다는 것을 참작하고 만일 미리 군관 군인들에게 상세하게 훈계하여 주지 않는다면 예정된 때에 이르러 실수 오착을 범하여 공연히 죄책을 지게 될 것이라고 인정한다. 이제 본래 내렸던 황제의 명령을 전부 그대로 요약 기록한 것과 이전의 추밀원에서 제정한 조례들을 아울러 다음과 같이 열서(列書)하여 보내니 대조 검사하여 전자에 전달받은 황제의 명령과 추밀원의 조례에 의거하여 일을 처리하고 다시 군인들이 주둔하러 간 곳으로 이것을 보내 항상 명백하게 읽어 주고 엄밀하고 상세한 훈계를 하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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