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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성심은 온 세상에서 사랑받으소서!
오늘로 성경통독이 3개월이 지나갑니다. 많은 은총을 받는 것 같습니다.
성경통독에 도움이 되는 자료가 있어 올려드릴까 합니다.
김혜윤 수녀님의 '구약노트'라는 강의가 우리들의 성경통독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마침 어느 분이
강의 내용을 적은 글이 있어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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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의 마지막책 사무엘기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기에 대한 명칭을 말씀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시간에 역사서에 해당하는 모든 책들은 -기라는 말을 붙인다고 말씀드렸어요. 사무엘서가 아니라 사무엘기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그야말로 사무엘의 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겠죠.
내용을 읽어보신 분들은 조금 의아해하실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 이야기는 앞에 조금만 나오고 대부분 다윗에 대한 이야기로 되어있어요. 그래서 다윗기가 맞지않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실텐데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계 역사서를 소개해드리면서 이 책이 제작된 목적은 유배중에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하게 되는지 그 '왜'에 대한 신학적인 답을 주기위해 만들어졌다고 말씀드렸어요.
거기에서 그들이 찾아낸 답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성실하지 못했다는 건데 특별히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왕과 백성의 관계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서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의 절대 주권자. 모든 것에 열쇠를 가지고 계신 가장 중요한 분, 왕으로서의 하느님이 계신데 인간왕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예요. 왕정이 시작이 되거든요.
이스라엘에서 갈등이 시작되는 것은 분명히 하느님이 시간과 공간을 다스리는 절대적인 왕이심이 분명하신데 그분이 잘 안보이시니까 보이는 인간왕에게 연연하는, 그가 하느님의 역할을 대신하려는 이런 문제가 계약을 성실하게 실행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됬다는 거죠. 인간왕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왕직은 그야말로 섬김직입니다. 하느님의 통치를 이 세상에 구현하기 위한 일종의 섬김직이여야 하는데 이 섬김직을 제대로 하는데 실패했다고 보는 거예요.
오히려 자기네들 스스로가 왕노릇을 하려고 하는, 그야말로 왕노릇을 하는 거지 왕은 아니였던 거죠. 이것을 철저하게 고발하는 내용이 사무엘기부터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왕정이 도입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사무엘입니다. 마지막 판관이였던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도요하고 나중에 다윗을 도요함으로써 이제 공식적으로 왕정이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하거든요.
그래서 실제 이야기는 다윗의 에피소드를 많이 다루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봤을 때 이들이 고발하는 것은 왕정에 대한 고발이기 때문에 왕정이 도입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무엘에게 비중을 두어 책 전체의 이름을 사무엘기라고 이름을 붙혔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사무엘기와 열왕기는 왕국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굉장히 유사한 구조로 되어있어요. 문체같은 것들이 유사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그리스말로 번역한 70인 역이라는 책에서는 이 책을 한 권으로 봅니다. 사무엘기, 열왕기 이렇게 두 권으로 보지 않고 왕국기 1,2,3,4,로 봅니다. 왜냐하면 사무엘기 상,하. 열왕기 상,하 이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왕국기 1,2,3,4로 제시되어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봤을때 사무엘기에서는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데 재밌는 것은 사무엘 상권 13장 1절에서 보면 사울이 겨우 2년 통치한 것으로 되어있어요. 사울이 임금이 된것은 서른 살 때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두 해 동안 다스렸다.(사무,13,1)
반면 사무엘기 하권 5장 4절과 열왕기 상권 11장 42절을 보면 오히려 다윗과 솔로몬은 40년동안 통치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것 같아요. 구약성경 안에서 분량이 많은 것은 중요한 인물, 그리고 어떤 부분은 분량을 의도적으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거든요. 소예언서, 소판관 같은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그런 구도, 즉, 신명기 저자들의 의도가 다시 한번 확인이 됩니다.
그들이 봤을 때 사울이라는 왕은 문제가 많았다고 보는 거예요. 특별히 어떤 문제냐면 스스로가 왕 노릇을 하려고 했다는 거죠. 하느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는 게 아니라 그들이 봤을 때 부정적인 통치를 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으로 2년 통치했다고 하고 나머지 다윗과 솔로몬이라는 경우 40년이라는. 40이라는 숫자가 완벽함을 가진 숫자거든요. 그런 의도로 편집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사무엘이라는 인물이 어떤 분인지 보겠습니다. 사무엘기 앞부분을 보면 그의 출생도 굉장히 신비로운 방법으로 제시되었습니다. 한나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나이가 굉장히 많죠. 할머니들은 애기 낳기가 어렵잖아요. 그런데 한나라는 인물은 아기를 낳았다는 거죠. 구약성경의 통념상으로 봤을 때 자손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건 뭐냐하면 뭔가에 대한 벌이라고 봤던 거예요.
애기를 못낳아서 속상한 것 보다도 주변에서의 시선, 저이는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애를 못낳나 하는 이런 시선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낍니다. 결국에는 대를 이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몸종을 자기 남편에게 대주는 제도가 굉장히 자주 등장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자기 몸종까지도 자기를 무시하죠. 굉장히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말 아기를 낳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런 시선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너무 힘든 상황이어서 성소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엘리라는 사제도 그 마음을 이해못하죠. 대낮부터 왜 술을 먹고 저러냐 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나는 자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얘기해줍니다. 사제도 이해못하고 남편도 못하고 그냥 오로지 하느님과만 소통을 하는 한나라는 여자가 나오는데요. 결국 기도를 통해 임신을 하게 되는데 그 아기가 사무엘입니다.
모세라는 인물도 출생부터가 비범했잖아요. 사내 아이로 태어났으면 다 죽어야 되는데 모세만 살아남는 이런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도 비슷하게 되있는거죠. 모세와 견줄만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인 걸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 히브리말로 읽으면 쉐무엘이 되거든요. 무슨 의미냐면 엘은 하느님, 쉐무는 이름이란 뜻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구약성경에서 이름은 호칭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존재 자체를 얘기하거든요. 하느님을 그대로 보여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 책을 고대 유다인들은 당연히 사무엘이 썼을 거라고 봤지만 지금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신명기계 역사학자라는 그룹에 의해 완성된 거라고 보고 있고요.
특별히 다윗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상세하게 나와있어요. 다윗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시간이 있은 후에 바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그 이전에는 기록할 수가 없어서 모세이야기나 아브라함 이야기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후대사람들의 신학적인 통찰을 통해서 재구성되거든요. 그런데 이제 다윗때부터 솔로몬 시대부터는 기록문화가 정착이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왕조가 워낙 건실하다보니 왕실의 인재도 굉장히 많았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다윗 왕조의 이야기는 잘 보전된 것을 볼 수 있고요. 다윗 왕조가 멸망된지 얼마 안되어서 많은 부분이 기록되었고 최종 완성은 유배 중에 했을 거라고 보여집니다. 사무엘기의 구조와 간추린 내용에 대해 보겠는데요. 내용이 복잡한 것 같지만 간단히 말씀드리면 상,하권으로 되있습니다.
(사무엘기)
사무엘기 상권
-변천과 전이
1-7장:사무엘
8-15장:사무엘과 사울
16장-31장:사울과 다윗
사무엘기 하권
-다윗의 정치3기
1-10장:다윗의 상승
11-20장:다윗의 실패
21-24장:부록
사무엘기 상권은 변천과 전이라는 제목을 붙여봤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이라는 최고 마지막 판관이 나오고 사무엘에서 사울로 변천하는 과정이 나오고 사울에서 다윗으로 변화해가는, 변천과 전이의 과정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모습으로 되어있고요. 하권은 다윗의 정치3기라고 이름 붙여봤습니다.
왜냐하면 하권의 초반부는 다윗이 승승장구하는 장면이 나오고요. 11장부터는 다윗의 실패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들한테서까지 살해의 위협을 느끼고 계속해서 쫓겨 다니는 모습이 나옵니다. 21장부터 24장까지는 부록입니다. 신명기계 역사학자들의 문학적인 특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학자들이 추정할 때는 실제 다윗의 역사가 어떠했을까 , 맨처음에는 승승장구로 가다가 나중에는 정말 저렇게 실패했을까. 분명한 것은 솔로몬이 거창하게 계승을 하게되거든요. 실제로 다윗이 실패했다면 아들인 솔로몬이 저렇게 계승을 한다는 것은 힘들었을 거거든요. 여기에서는 신명기계 역사학자들의 편집의도가 들어간게 아닐까 합니다.
왜냐면 10장 11장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냐면 잘 아시는 밧세바 이야기가 나옵니다. 즉, 신명기계 저자들은 역사를 어떻게 보냐면 하느님과의 계약에 성실했을 때는 축복, 성실하지 못할 때는 저주. 이런 인과율적인 사고로 역사를 봐요. 항상 고통과 벌이 온다면 죄가 있었고 죄에 대한 인과율적인 결과로 벌이 따라오게 된다 이렇게 봤던 겁니다.
그들의 역사관을 그대로 드러내주기 위해 11장 밧세바 사건 이후부터는 다윗이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는 모습으로 재편했다고 추정하는 거죠 .사실적으로 다윗은 사울의 아들이 아니었거든요. 정상적인 장자 계승과정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봅니다. 정상적인 계승이 없었다는 건 뭐죠? 쿠테타가 있었다는 겁니다. 유혈참극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사무엘기를 읽어보면 다윗이 쫒겨다니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장인이 되는 사울이 끊임없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고, 그는 계속 쫒겨다니면서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적군 필리스티아의 장수가 되어있어요. 남한사람인데 북한사람 장교가 되어서 만나는 이런 비극적인 모습이 있죠.
결국 사울이 전사하게 되고 그가 남,북쪽 이스라엘을 통합하는 리더로서 부상되게 되는데 이때도 한꺼번에 되는 게 아니라 어려움을 가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잔존하는 사울 세력을 어떻게 하면 통합할 수 있을까가 문제가 됐었을 것으로 보여요. 사무엘11장에서 제시되는 다윗의 어려운 모습들은 오히려 다윗 정치초반부에 있었던 모습이 아닐까라고 추정합니다.
하지만 신명기계 역사학자들의 역사관에 입각해서 밧세바하고 죄를 진 다음부터는 하느님한테 이런 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최고의 성왕으로 얘기하거든요. 이 성왕, 거룩한 왕이다라는 건데 이스라엘이 그를 성왕으로 고백하는 근거는 군사력이나 지도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뛰어나게 정치를 잘해서 나라를 부자로 만들어서 이게 아니라 그를 왜 성왕이라 인정했냐면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데 정직했던 인물이라는 거예요 .다윗의 실패부분에서 나오는, 자기 부하들이 무시하고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도 뭐라 하냐면 그냥 놔두라고 합니다. 내가 하느님한테 죄를 지었으니 그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건 당연히 받아야 한다. 그모습이 바로 성왕의 모습이었단 거죠.
사무엘기를 읽다보면 구약성경에서 익숙한 현상, 같은 사건에 대한 두세가지 다른 보도들을 만날텐데요. 예를 들어 사무엘을 이야기할 때 실로의 제사장이며 이스라엘의 예언자 이렇게 얘기하는가 하면 사무엘기 9장에서는 춥 지방의 선견자다라고 얘기합니다. 실로사람인지 춥사람인지 헷갈리게 되는 거죠. 그다음 나중에 7장,10장에서는 판관이며 왕 옹립자인 라마의 사무엘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가 어디 사람인지 충돌되는 거고요. 사울 역시도 그가 왕이 됐던 것은 분명한데 사무엘이 기름부어 왕으로 추대되는 과정이 사무엘기 상권 9장에 등장한다면 미츠파 라는 곳에서 제비를 뽑아서 왕으로 추대되요. 그러니까 뽑기를 잘한 거죠. 이런 전승이 있고요. 또 다른 거는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최고의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서 왕이 됐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가 어떤 통로로 왕이 됐는지 충돌되는 겁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죠. 원래 다윗도 사울의 무기당번, 베틀레헴 출신의 몸종으로 등장합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유명한 골리앗과의 대적관계에서 골리앗을 죽이고 부각되는 장면이 나오고요. 또 다른 내용은 사무엘이 아예 베틀레헴으로 갑니다. 가서 그 아들들 중에서 왕이 있을거다, 사울이 지금 너무 엉망이니까 왕을 새로 뽑아야 겠다. 이사이라는 사람의 집을 가봐라, 거기서 내가 알려줄거다.
이래서 갔는데 거기에 없잖아요. 그래서 부인더러 또 아들이 있냐고 물으니 너무 어려서 안불렀다 나가서 놀고 있다고 하죠. 그래서 그 아이를 데려오죠. 볼이 붉은 예쁜 소년이라 되어있는데 그때 얘를 왕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사무엘기 주요 세인물 사무엘, 사울, 다윗에 대해서도 보도가 서로 조금씩 달리 제시되어있습니다.
또 한가지 재밌는 것은 유명한 골리앗과의 싸움 부분에서 꼬마 다윗이 형들이 다 전쟁터에 나가니까 자기는 할 게 없는 거예요. 전쟁터인지 놀이터인지 구별 못하고 형들을 찾아서 전쟁터인데도 놀이를 하러 가는 거예요. 골리앗을 만나게 되면서 자기가 한번 싸워보겠다 이래서 골리앗과 대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사무엘기 상권 17장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장면입니다. 사무엘기 하권 21장19절을 보면요. 골리앗을 죽인 사람이 다윗이 아니라 엘하난으로 되있습니다. 곱에서 필리스티아인들과 다시 싸움이 일어났다. 베틀레헴 사람 야아레 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갓 사람 골리앗을 쳐 죽였는데, 골리앗의 창대는 베틀의 용두머리만큼이나 굵었다. (2사무엘 21,19)
엘하난이 죽였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미 사무엘기를 알고 다시 역사서를 쓰게 되는 사람들이 누구였죠? 역대기계 역사학자들이죠. 역대기계 상권에서는 이 부분을 다시 수정합니다. 왜나하면 이 장면은 굉장히 중요한데 앞 부분에서는 다윗이 죽였다고 하고 사무엘기 하권에서는 엘하난이 죽였다고 하니 이것을 정리하는 겁니다.
역대기계 상권 20장5절에서 보면 필리스티아인들과 다시 싸움이 일어났다. 야이르의 아들 엘하난이 갓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쳐 죽였는데, 라흐미의 창대는 베틀 용두머리 같았다.(1역대 20,5) 역대기에서는 엘하난이 골리앗의 동생을 죽였다라는 거예요. 성서안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글자 그대로 성경을 읽었을 때 이 부분에 대해서 신앙심이 부족해서 이걸 신학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만약 신자가 아닌 분이 이 부분을 찾아내서 글자 그대로 믿는다 라고 하면서 공격했을 때 합리적인 답을 드려야하거든요. 여기에서 제가 제시한 방법을 제시하면 쉽게 끝납니다.
다윗이 주인공인 책을 쓰는 게 이 저자들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는지 골리앗을 죽인 사람이 엘하난인지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집중하지 않는 거예요. 누구에게만 집중하겠다는 거냐면 하느님, 하느님이 다윗을, 이스라엘 영웅들을 이용하신겁니다. 결국 최고의 승자는 하느님이시라는 것. 이거에서는 어떤 오류도 없기 때문에 이것을 오류로 보지 않는 겁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듯이 구약성경을 보면서 균열이 생기는 것을 치밀하게 찾는 분들이 계신데 이런 분들이 작업을 하시면 두꺼운 대학노트 몇권은 나올 겁니다. 의미없는 작업입니다. 왜냐면 그런 의도로 쓰인 책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기 위해 오로지 그 목적으로 쓰인 것이고, 이게 이스라엘 역사책이라면 차라리 우리 대한민국 국사책을 읽는 게 훨씬 낫습니다.
우리 역사가 중요하지 남의 나라 역사가 뭐가 중요합니까. 그들의 역사책이 아니라 그들 역사안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역사책이기 때문에 읽는 겁니다. 노골적으로 제가 균열되는 부분을 공개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 전혀 우리 신앙을 축소시킨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내용이 어려우십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데 사실 쉽게 풀어드리기 떄문에 내용이 어려우시진 않으실 거고요.
제가 어려울까봐 걱정되는 부분은 이런 비평학적인 방법이 조금 불편하실까봐. 그게 어려운 거거든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너무나 잘 따라오고 계시고 '성서가이래서 그렇구나 '라고 편안하게 느끼실수 있다고 하시니 그런 분들을 보면서 제가 그렇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사무엘기를 읽으면서 충돌되는 부분이 하더라도 전혀 놀라실 필요없습니다. 신명기 역사학자들이 편집을 한 것이죠.
자, 그러면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신학적 주제는 무엇일까? 첫번째. 진정한 왕은 누구냐? 이 문제입니다. 대한민국에서도 얼마전에 대선이 있었죠? 대통령을 뽑았는데요. 저희는 별로 그런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하느님이 통치하실 수 밖에 없으세요.
여당이든 야당이든 많은 부분에서 저희가 결정한 것이라면 최대한 협조하면서 해야겠지만 인간들의 한계는 분명히 있는 것이고 세상의 역사는 하느님이 꾸려가신다는겁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부분을 사무엘기에서는 사울과 다윗의대조를 통해서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사울의 경우 굉장히 잘생겼던 인물인것같아요. 키크고 용모도.
군사적인 역량도 굉장히 뛰어났구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역사안에서 가장 넓었던 영토를 확보한 다윗 시대 전에 사울이 마련을 한 것이거든요. 굉장히 싸움을 잘했던것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제는 뭐냐하면 극도의 불안, 극도의 신경쇠약에 시달리거든요. 근데 신명기계 저자들은 그이유를 뭐라고 보냐하면요 .
자기가 지키려고 하니까 저렇게 힘든거 아니냐 이렇게 봅니다. 분명하죠. 왕으로써 책임을 져야하고 수호해야하니 스트레스가 없을순 없죠. 그런데 신명기계저자들은 무엇을 고발하냐 하면 사울의 문제는 예를 들어 이런 장면이 나와요. 전투를 하고나서 승전비를 세우는데 자기의 승전비를 세웁니다. 이것은 보통문제가 아니라는거예요.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의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 뿐이지 그의 승전은 아니었던 것이거든요. 사실은 이것은 일반적으로 저희가 많이 범하는 그런 죄이기도합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강력한 경계를 할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이겼다고 보고 자기가 지켜내야 한다고 보니까 너무나 고통스러운거죠. 그럴 때 그에게 심신의 안정을 주었던 사람이 무기당번 다윗이었던거죠. 다윗이 노래를 잘 하고 잘 만들고 이러면서 다윗을 무지 사랑하게 되었죠. 출신이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왕이 사랑하니까 부각이 되게되죠. 근데 나중에는 이게 애증의 대상이 되게되죠.
왜냐하면 결국에는 다윗을 예뻐하긴 했지만 자기 아들에게 계승을 해줘야 되는데 다윗이 너무 부각이 되다 보니 아들과 대립구도가 되는거예요. 근데 아들들 조차도 다윗을 사랑하고 특히 막내딸이 너무 좋아하게 되죠. 구약성서 전체에서 여자가 남자 좋아하는 동사가 나오는것은 미카엘, 이 막내딸의 경우가 유일합니다. 그래서 붐화가 되죠. 실질적인 역사에서 봤을 때 가장 신빙성있는게 아닐까라고 추정을 합니다.
그런 모습에 비하여 다윗의 모습은 언제나 자유로워요. 그래서 골리앗과의 싸움도 아름다운 문학적 장치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요. 그냥 놀러갔다가 자기가 싸우겠다고 하니까 갑옷을 입히잖아요. 그런데 갑옷이 너무 크니까 손을 못 올리는거예요. 그래서 나중에는 갑옷을 벗기죠.
이게 의미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장이 문제라는 겁니다. 정말 자기가 이길수있는 방법은 하느님과의 유착뿐인데 하느님을 소외시키고 스스로 갑옷을 입는 거는 승산이 없단 소리죠. 결국에는 다 벗기니까 너무나 자유자유자재로 손을 움직일 수 있게 되어 돌팔매질을 적중하게 되죠. 결국 성경이 이야기 하는 자유의 핵심은 뭐냐?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는게 아닙니다.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 그분의 영역안으로 구속되는 것. 왜냐면 인간이 아무리 보호 하려고 하고 대단한 정치력으로 뭔가를 이룬다 하더라도 한계는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뛰어난 분들이 외적인 건 지킨다하더라도 아픈일이 생겼을 때 언제나 완치될 수는 없습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죽음이라는 최종선 안에서 우리는 누구나 공평합니다. 이상황에서 하느님의 주도권을 결국에는 외면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결국 사울이나 다윗이나 엄청난 영향들을 발휘하면서 왕이 되지만 실질적인 왕은 하느님밖에 없다는 것을 이들의 모습을 통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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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성경이 이야기 하는 '자유의 핵심' 은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는게 아니라,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
저도 통독하면서 많은 은총을 체험합니다. 말씀안에 머무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하느님안에서 모든것은 하느님에게로 내자신의 삶을 오롯이 봉헌 해야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멘
사울같은 부분이 많았던 것을 인정합니다.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삶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수녀님의 말씀하시는 어법이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인간의 완전한 자유는 하느님 안에 있음을 묵상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지기님 수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내용이 있었네요.
성경읽기와 맞게 내용을 올려줘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보물 가져갑니다.^^
마음지기님!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마음 다시 일깨워 주심에 감사합니다.^^
또 읽어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