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에는 야외에 흡연구역이 있다. 그곳에는 흡연자들이 주로 모이는데 나처럼 비흡연자도 가끔씩 보인다. 비흡연자들은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말벗이 되어 주기 위해 흡연자들을 따라 나오는 경우가 많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머리도 식힐 겸 흡연자인 김 사무관을 따라 나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마침 김대영 실무관, 제명근 실무관, 이선정 실무관이 흡연구역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모두 민사항소부 소속이었다. 목을 잔뜩 집어넣고 호주머니에 손을 깊숙하게 찌른 품이 꽤나 추운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 중 김대영 실무관에게 말을 걸었다.
"김 실무관, 김상환 부장님에게는 전화드렸나?"
"바쁠 것 같아서 우선 메일만 드렸습니다. 며칠 있다가 전화를 드릴까 합니다."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는데 자네는 와닿는 게 없나?"
"자랑스럽지요. 제가 2013년에 모시던 부장님이 아닙니까? 굉장히 인자하시고 재미 있으시고 소탈하셨습니다."
2월 9일.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서울고등법원청사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오후 2시에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의 항소심 선고공판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사 앞에는 선고 30분 전부터 취재진과 빨간 모자를 쓴 해병구국결사대원 남성 수십여명 등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1시 45분 정도 지났을 때 흰색 와이셔츠에 하늘색 넥타이, 갈색 체크무늬 정장을 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엷게 웃으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취재진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여러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변호인이 자신만만한 태도로 "재판 후 1층 입구 포토라인 앞에서 짧게 한 마디 할테니 재판 들어갈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며 약속했다. 그러나 그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과가 예상과 달랐기 때문이다.
서울고등법원 312호 법정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100여명의 취재진과 방청객으로 법정은 꽉 들어찼고 미처 앉지 못한 사람들은 법정 옆과 뒤쪽에 서서 판결 내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재판장이 재판부의 판단을 설명하는 데만 1시간 30분이 걸렸다. 원세훈 전 원장은 판결 선고 내내 곧은 자세로 재판장을 쳐다봤다. 고개를 움직이거나 별다른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유죄선고가 내려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김 부장판사는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며 목이 마른 듯 여러차례 물을 마시기도 했고 배석판사가 직접 옆에 있는 생수통을 옮겨주기도 했다. 2시간 여에 걸친 낭독이 끝나고 드디어 판결이 선고되었다.
"원심 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 원세훈,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구속영장을 발부한다."
오후 4시께 김상환 부장판사가 실형을 선고하면서 법정구속을 결정하자 방청석을 가득 메운 수십명의 지지자들 사이에선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원 전 원장은 뜻밖의 결과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한때 정보기관의 수장이었던 사람답게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재판부가 선고를 마치고 할 말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머뭇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한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재판을 받을 것입니다."
재판부가 법정을 나가자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법정을 한차례 둘러봤다.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어떤 회한 같은 게 배어 있었다. 그는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법원경위가 내민 구속영장 발부 서류를 작성할 때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류 작성을 마친 뒤 입고 온 외투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잠시 허둥대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린 듯 지인에게 "그것만 가져가 주세요"라며 자신의 지갑을 건넸다.
나는 여러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바탕으로 그날의 법정상황을 간략하게 묘사했다. 사건내용은 언론에 자세히 보도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판결문은 주문 및 이유를 시작으로 공소사실과 원심판단 및 항소 이유의 요지, 공소제기의 적법성과 증거능력 유무와 관련된 주장에 대한 판단, 증거능력 있는 증거들에 의하여 인정되는 사실관계, 정치관여 행위로 평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 공직선거법상 '선거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 범죄의 성립 여부와 관련된 피고인들의 주장에 대한 판단 등을 거쳐 결론에 이르기까지 무려 274쪽에 달한다.
이만하면 웬만한 장편소설 분량에 해당한다. 읽는데만도 몇 시간이 걸리는데 이를 작성한 재판부는 며칠 아니 몇 주가 걸렸을 것이다. 나는 판결문을 상세하게 읽어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양형의 이유(판결문 내 '양형의 이유'는 통상 앞부분에는 벌을 많이 줘야 하는 이유를, 뒷부분에 벌을 적게 줘도 되는 이유를 쓴다)를 설명한 부분은 문장력은 물론 내용이 너무 좋았다. 특히 다음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논어의 ‘위정’편에서 공자는,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하여 공격한다면 이것은 손해가 될 뿐이라고 하였다{공호이단(攻乎異端) 사해야이(斯害也已)}. 나와 다른 쪽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배척한다면 결국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의미이고, 이단에 대한 공격과 강요가 결국 심각한 갈등과 분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이다.
미국에서는 판사가 나라를 망치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고 한다. 어디 미국뿐이겠는가. 대한민국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라를 살린 판결, 역사적인 판결을 내린 재판부에 경의를 표한다. 그는 2013년에 부산고등법원창원재판부에 근무했다. 나와 같은 청사 내에 있었기 때문에 분명히 뵈었음직도 하건만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판사 김상환과 그의 재판부, 나라를 살린 판사와 재판부로 기억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