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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논어」가 體라면 「맹자」는 用이다 : 『孟子 易解』 後記
孟子, 그 사람(其人)!
孔子는 『주역』 계사하전에서 이미 글이 있고 법도가 있음에도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도가 헛되이 행하지 않는다(苟非其人이면 道不虛行이라).”고 했다.
聖人의 도를 계승한 『맹자』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2천 3백여 년을 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은 공자가 말한바 ‘바로 그 사람’인 맹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맹자』로 인해 비로소 儒學은 관념의 이상정치 사상이 아닌 현실의 실천정치에 적합한 학문이 되었다. 즉 ‘바로 그 사람(其人)’인 맹자의 ‘不得已한 好辯’이 있었기 때문이다.
『孟子』는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仁政을 내세웠으나 그 핵심은 井田法이라는 經世致用(경세치용)의 國家經營(국가경영) 이론이다. 맹자는 국가의 興亡盛衰(흥망성쇠)가 역사적으로 一治一亂(『孟子 』등문공하편)으로 나타남을 알고 있기에 무차별한 약육강식의 戰國時代(전국시대)가 종식되고 대동세상의 仁政이 펼쳐지기를 희망하며 공자의 뒤를 이어 철환주유에 나섰다.
결국 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철환주유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돌아와 일곱 편의 글을 썼다. 戰國시대에 王이라고 칭하는 자들이 일곱이나 되었지만(戰國七雄) 王道를 펴려는 자가 아무도 없었기에 맹자는 물러가 후대를 위해 글을 쓴 것이다. 공자가 詩 · 書 · 易 · 禮 · 樂 · 春秋 등을 편 뜻과 같다.
맹자, ‘바로 그 사람’이기에 유학의 도맥 이어져
復
『孟子』 일곱 편은 『주역』 地雷復卦(지뢰복괘 : ䷗)에서 문왕이 말한 “反復其道 七日來復(그 도를 반복하여 칠 일만에 와서 회복한다)”의 의미와도 통한다. 1년 12달이라는 천도와 천지자연의 운행이 『주역』의 대성괘 여섯 효에서 消息盈虛(소식영허)의 이치로 음양이 發揚(발양)되는 것과 같다(䷗ ䷒ ䷊ ䷡ ䷪ ䷀ ䷫ ䷠ ䷋ ䷓ ䷖ ䷁).
陰(음)이 다하고 나면(䷁, 음력 10월, 亥月) 그 추운 속에서 다시 陽(양) 하나가 저 땅속에서 復活하여(䷗, 음력 11월, 子月) 나오듯이 맹자는 弱肉强食(약육강식)의 살벌한 戰國時代에 희망을 잃지 않고 堯舜임금과 三代 聖王의 정치가 부활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유세했다.
맹자는 세상 모두가 迂闊(오활)하다고 비웃어도 枉尺直尋(왕척직심 - 등문공 하편)하며 井田法(등문공 상편)이라는 經道를 조금도 구부리지 않았다. 井田法이 왜곡되는 순간 王道政治는 사라지고 覇權政治(패권정치)만이 남아 하층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孟子』 일곱 편에는 맹자가 펴려는 왕도정치의 핵심이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맹자 7편(상하)과 왕도정치 개요
옆 편액은 청나라 강희제의 글씨로 맹부에 걸려있는데 맹자 7편이 전해짐으로써 이것이 후대의 규범이 되었다는 뜻이다.
제1편인 ‘양혜왕편’에서 맹자는 利만을 말하는 양혜왕에게 오직 仁義(인의)만이 있을 뿐임을 설파했다. 풍류를 좋아하는 제선왕에게 선왕들의 예를 들어가며 與民同樂(여민동락)이 곧 仁政임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양혜왕과 제선왕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에 맹자는 ‘양혜왕 하편’ 제6장에 이르러 비유를 들면서 백성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떤다면 그 책임은 바로 왕에게 있음을 직설적으로 따졌다. 즉 왕만의 이익을 위한 速成의 패권정치가 아니라 백성 모두에게 보탬이 되는 求益(『논어』 헌문편)의 왕도 정치를 일깨워주고자 했다. 이는『주역』風雷益卦(풍뢰익괘 : ䷩)의 彖傳(단전)에서 공자가 말한 “見善則遷, 有過則改(선을 보면 옮겨가고 허물이 있으면 고친다)”의 화법이다.
공자를 私淑하며 그 도를 충실히 계승했던 맹자는 먼저 聖人의 道를 例示하면서 따르도록 했고[見善則遷], 왕이 이를 잘 듣지 않을 경우는 직접 그 잘못을 지적해 주면서 고치도록[有過則改] 유도하였다. 왕이 잘못을 지적당해도 알아듣지 못하거나 아예 못 들은 척 할 경우, 맹자는 왕에게 ‘나라가 망하는 길밖에 없다’며 과격한 직언도 불사한다.
맹자의 이 화법은 공자가 “천하에 도가 없으면 예악과 정벌이 제후로부터 나오니, 제후로부터 나오면 대개 10세에 잃지 않음이 적고, 대부로부터 나오면 5세에 잃지 않음이 적고, 배신이 국명을 잡으면 3세에 잃지 않음이 적으니라(天下 無道則禮樂征伐이 自諸侯出하나니 自諸侯出이면 蓋十世에 希不失矣오 自大夫出이면 五世에 希不失矣오 陪臣이 執國命이면 三世에 希不失矣니라 - 『논어』 계씨편).”에 근거하여 단호하게 답한 것이다.
제2편 ‘공손추편’에서는 맹자가 齊나라에 客卿(객경)으로 등용되었다가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었는데 이 편에서는 聖賢들에 대한 역사적 사례를 들면서 주로 신하로서의 도리와 자세를 摘示(적시)하고 있다. 맹자는 신하로서 지녀야할 不動心과 知言, 浩然之氣 등의 말을 통해 만약 왕이 패권정치로 흐르면 신하는 왕에 타협하지 말고 과감히 간언과 직언을 해야 한다고 유세한다. 신하된 입장에서 왕도를 보필하는 도리에 대해 설파한 것이다.
또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不忍人之心’이라는 四端이 있으므로 위정자 역시 이를 몸에 채워 나간다면 仁政을 행할 수 있음을 力說했다. 공자의 道를 실천하려는 맹자의 절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제나라에서 道를 실현할 수 없게 되자, 맹자는 마침내 부모의 나라를 떠나듯이 그 무거운 심정을 더디고 더딘(遲遲) 발걸음이라는 말로 표현한다(만장 하편).
제3편인 ‘등문공편’에서 맹자는 당시 조그만 나라로 약소국에 불과하였던 등나라의 문공에게 왕도정치의 경제적 토대인 井田法과 함께 정신적 근간인 五倫의 법도를 유세할 기회를 갖는다. 다행히 등문공이 맹자의 통치이론을 수용하는 듯했다.
그러나 귀가 얇은 등문공은 백가학파의 하나인 농가(農家)의 異端(이단)과 邪說(사설)까지도 수용하여 직접 농사를 짓겠다고 나섰다. 등문공의 이러한 행태는 위정자로서의 직분을 망각한 것이다. 이에 등나라는 국가 기강과 질서가 어지러워져 혼란스럽게 되었고 결국 나라의 멸망까지 재촉하기에 이르렀다.
맹자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 異端과 邪說이 횡행함을 막기 위해 맹자 자신이 나서서 不得已하게 好辯할 수밖에 없는 심경을 토로한다. 맹자가 경세치용의 정전법과 인륜의 중요성을 구체적으로 특별히 강조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맹자는 등나라에서 왕도정치를 구현해 보려다 좌절되자 제4편인 ‘이루편’에서 위정자 개개인의 역할이 중요함을 다루면서 그 模範像(모범상)을 제시하고 있다. 가령 規矩(규구)가 도형을 그리는데 없어선 안 될 필수적인 도구이듯 과거 聖人이 실천했던 덕목은 規矩처럼 善政을 펴기 위한 국가 통치의 핵심이기에 위정자가 이를 본받아 따르는 것이 왕도정치임을 역설하고 있다.
요순 임금의 덕치와 선정이 그에 해당한다. 나아가 맹자는 “人人이 親其親하며 長其長이면 而天下平하리라”며 인륜질서의 기본원칙을 제시한다. 맹자는 이를 군자가 지녀야 할 ‘存心’이라 표현하였다.
제5편인 ‘만장편’은 제자인 만장의 물음에 맹자가 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인륜의 근본인 孝를 지극히 실현한 순임금을 가장 먼저 거론한다. 이 또한 맹자가 공자의 도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 외 聖王들의 행적을 적시하는 한편 王位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聖人의 반열에 올릴 만한 聖賢의 처신을 거론하였다. 그리고는 공자를 언급하며 이들과 비교하되 공자를 聖人의 時中이자 集大成하신 분으로 추앙하였다. 맹자가 스스로 자신이 공자를 정통적으로 계승하였다고 자임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제6편인 ‘고자편’은 이들 성현을 포함하여 선비의 도리와 군주와의 관계를 거론하였다. 성현과 선비는 그 도가 실현되지 않으면 떠나면 그만인 君子이다. 이에 맹자는 국가의 흥망성쇠는 군주가 이들 성현과 선비를 어떻게 발탁하여 쓰느냐에 달려 있다며 이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문제는 賢臣이야 자신의 군주가 諫함을 들어 주지 않을 경우 떠나면 그만이지만 남은 백성들은 참담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맹자는 군주가 仁政을 펼치는 근거로서 군주 역시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본연의 人性에 호소한다. ‘고자편’은 바로 이 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맹자는 告子와의 논쟁을 통해 性善을 이끌어내고는 위정자 역시 스스로 지닌 본연의 인성을 다하면 仁義禮智를 얻게 됨을 설파하였다. 문제는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로 惡性이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해 맹자는 “哀哉라 人이 有鷄犬이 放則知求之하되 有放心而不知求하나니 學問之道는 無他라 求其放心而已矣니라(오호! 슬프도다! 사람이 닭과 개가 나가면 찾을 줄 아는데 마음을 잃고서는 찾을 줄을 알지 못하나니, 학문의 길은 다른 데에 없느니라.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을 뿐이니라. : 고자 상편).”며 탄식한다.
이어 당대 이름난 여러 부류의 인물들을 만나 그 不仁함을 지적하고는 제자인 악정자를 예로 들며 악정자가 지닌 ‘好善’이야말로 위정자의 주요 덕목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당대의 위정자들은 부국강병으로 얻어진 재화를 민생보다는 자신의 사치스런 생활에 사용하였다.
이에 맹자는 위정자들이 聖王의 道를 따르려 하지 않는데다 “生於憂患而死於安樂(告子 하편)”도 알지 못함을 개탄하며 마침내 “不屑之敎誨(불설지교회 : 가르치지 않는 것도 가르침이다 : 告子 하편)”를 闡明(천명)한다.
마지막으로 종합하여 정리한 내용이 제7편인 ‘진심(盡心)편’이다. 제7편에서 맹자는 ‘盡心’이라는 뜻 그대로 누구에게나 있는 인간 본연의 그 마음을 다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盡心은 知性이고 知性은 知天이므로 存心하여 養性함은 事天이기에 修身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곧 立命이라 했다. 즉 修人事待天命이다. 그러면서 은연중 맹자는 새로운 혁명의 시기가 올 것을 내심 기대했다.
湯武革命이 당대 제후들에 의한 혁명이었다면 위정자들에게 더 이상 기댈 것이 없는 戰國의 상황에서 一亂의 시기가 종식되고 새로운 一治를 이루기 위해서 맹자는 공자의 도맥을 이은 군자들이 일어서기를 바랬다. 그것이 제37장의 끝 문장인 “君子 反經而已矣니 經正則庶民이 興하고 庶民이 興이면 斯無邪慝矣리라(군자는 경도를 돌이킬 뿐이니 경도가 바르다면 뭇 백성이 일어나고 뭇 백성이 일어나면 이에 사특함이 없어지리라).”이다.
그럼에도 더 이상 聖王의 도가 회복되기 어려운 당대의 암담한 현실을 보고 전체를 마무리 짓는 끝 문장에서 맹자는 “然而無有乎爾하니 則亦無有乎爾로다(그런데도 있지 아니하다면 또한 있지 않으리로다)”라고 하면서 절망적 심경을 토로했다.
시대상황에 맞는 창조적 해석 필요
맹자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던 戰國時代에 “진실로 仁에 뜻을 두면 악함이 없다(苟志於仁矣, 無惡也 : 「논어」 이인편).”는 공자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철환주유를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쓰이면 행하고 버려지면 은둔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 - 『논어』 술이편).”는 공자의 말씀처럼 더 이상 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땅으로 돌아와 후세를 위해 도를 전하고자 『맹자』를 집필하였다. 이에 ‘공자왈 맹자왈’로 이어지는 도맥이 분명히 설 수 있었다.
堯임금이 舜임금에게 ‘允執厥中(윤집궐중)’의 한마디를 전했다면, 舜임금은 禹임금에게 세 마디를 더 보태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을 전하였다. 이 도맥은 은나라의 湯과 주나라의 文武, 周公으로 이어졌다. 공자는 이들의 통치철학을 집대성하여 “均 和 安”(논어 계씨편)을 도출했고, 맹자는 공자가 집대성한 학문을 體로 하여 유학사상을 “井田法과 人倫, 仁政과 王道”라는 경세치용의 통치사상으로 발전시켰다. 이 책의 소제목이 ‘논어가 體라면 맹자는 用이다’인 배경이다.
『맹자』가 아니었다면 儒學(敎)는 수많이 명멸해간 이상주의자들의 한갓 관념론적 정치철학·사상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맹자가 등문공에게 경세치용의 井田法을 유세하였기에 ‘仁政’이 실물경제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맹자는 정전법이 아니면 仁政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아울러 백성들의 孝弟忠信도 기대할 수 없음을 명확히 밝혔다.
그렇다면 그동안 儒學, 儒敎가 정전법을 빠트린 채 孝弟忠信의 인륜사상만으로 이루어진 교리인 양 전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차적으로는 秦始皇帝의 焚書坑儒 사건으로 유학의 사상체계가 크게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후 漢나라가 공자의 유학을 국교로 삼되 (功臣들을 위한 지방분권형 봉건제로 인해) 孝弟忠信을 강조하여 이를 신분질서와 기득권유지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유교가 퇴행적으로 변질된 점이 없지 않다.
또한 당시까지 『孟子』가 유학경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여 정전법을 비롯한 맹자의 경세치용의 통치사상이 수용되지 못한 것도 주요 원인이다. 『맹자』가 四書三經의 하나로 분류되어 유학자의 필독서로 정리되기까지는 송나라 朱熹(주희)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물론 이에는 漢代의 趙岐(조기)가 『맹자』 총 7편을 上·下卷으로 나눈 뒤 唐代의 韓愈(한유)가 유학의 도맥을 정리하며 맹자를 ‘最後一人’으로 자리매김한 공로가 있다.
그 뒤 맹자를 둘러싼 공방전이 끊이질 않았는데 南宋(남송)의 余允文(여윤문)이 『尊孟辯(존맹변)』을 지어 貶孟派(폄맹파)의 비난을 조목조목 비판하고(구체적인 내용은 부록의 “貶孟 ‧ 尊孟 ‧ 刪孟 그리고…” 참조), 周頌시를 인용하여 맹자를 “以似以續하여 續古之人이로다(잇고 이어 옛 사람을 이었도다)”고 칭송했다.
여윤문의 『尊孟辯』을 보고 크게 깨달은 朱子는 여기에 주석과 해설을 달았는데 이를 통해 貶孟派들을 완전히 제압하고 마침내 『孟子』를 제자백가서의 하나에서 명실공히 經書의 위치로 승격시켰다. 이후 元代에 와서 맹자는 亞聖으로까지 존숭되었다.
위정자와 지식인에게 던지는 맹자의 외침
그렇다면 『맹자』가 오늘날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욕망과 소비의 자본주의 시대는 어찌 보면 맹자가 살던 전국시대와 흡사한 점이 많다.
아니 오히려 자본주의의 소비욕망과 탐욕적인 경쟁체제로 인해 인간관계는 훨씬 살벌해졌다. 맹자가 주창한 인륜의 법도가 무너졌고 爲民이니 仁政이니 하는 정치 덕목조차 실종된 지 오래이다.
사회의 상층부 기득권 집단(정책입안자, 정책결정권자, 공론주도층, 재원창출자 등)에게는 오직 利끗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목소리만이 가득 차 있다.
경제외교로 대변되는 국가수반의 해외순방과 이익단체의 대표들로 채워지는 국회의원의 비례대표제, 위정자들의 黨利黨略과 離合集散, 살상무기 생산의 ‘방위산업체’ 육성, 기업의 탐욕스런 이익 추구, 약육강식의 살벌한 경쟁체제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위로부터 이끗을 탐하면서 모두가 이끗 찾기에 진력을 다하고 있으니 설령 亞聖인 맹자가 다시 살아나 “何必曰利잇고 亦有仁義而已矣니이다(양혜왕 상편)”라고 외치더라도 맹자는 또다시 현실물정을 모르는 오활한 자로 취급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의 선비들에 해당하는 지식인들은 어떠한가? 『맹자』가 선비를 지칭하여 말한 浩然之氣와 尙志 역시 찾기 어려운 시대이다. 사회문제에 대해 직언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해야 할 오늘날의 지식인 또한 이익집단의 하나로 전락하였기 때문이다.
2천 5백여 년 전의 戰國時代의 지식인들은 부국강병이라는 단일한 목표달성을 향해 百家爭鳴(백가쟁명)이라고 할 정도로 너나없이 처방전을 제시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열정을 갖고 유세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치인이나 지식인 중에서 한반도 통일과 번영이라는 목표와 포부를 품고 열정을 쏟는 자를 찾기 힘들다. 오로지 자신의 이끗만 추구할 뿐이다. 심지어 이끗 다툼에 온 나라가 시끄럽고 날 새는 줄도 모른다.
서구 선진국에 遊學하여 외국의 선진이론을 공부하였다며 그 이론을 국내에 적용하는데 국내 현실에 맞지도 않고 국민 대중들과 언어 소통과 교감조차 이루지 못한다. 부끄럼이 없는데다 반성할 줄은 더욱 모른다.
현학적인 태도로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를 구사하며 국민 대중을 호도하기까지 한다. 여기에 장단을 맞추는 언론은 시시비비를 가릴 능력도 안 되고 가릴 생각도 없는 듯하다. 언론 역시 이미 이익집단의 대열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기득권을 차지한 각각의 집단들이 그 울타리의 보호 속에 각자 자기 몫을 챙기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 문화의 토대인 황하문명을 모른 채 오로지 서구 사상에 도취된 이들이 중구난방으로 내놓는 처방전은 혼돈과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의 급격한 자살률 증가이다. OECD 국가들 가운데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거의 10년째 1위를 차지하고 그것도 평균 3배를 웃도는 수치이다.
오늘의 현실이 맹자가 지적한 “殺人以梃與刃이 有以異乎잇가 以刃與政이 有以異乎잇가(몽둥이나 칼로 사람을 죽이는 짓이 서로 다른가? 칼로 사람을 죽이는 짓이나 정치로 사람을 죽이는 짓이 서로 다른가? - 양혜왕 상편)”라는 탄식에 딱 들어맞고 있는데도 지식인들과 언론은 말이 없다.
또한 오늘의 현실이 빈부격차의 극심함으로 인해 맹자가 말한 “政事를 행함에 짐승을 거느려 사람을 먹게 함을 면치 못하는 것(行政, 不免於率獸而食人 - 양혜왕 상편)”과 다를 바가 없는 현실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위정자는 민생문제에 묵묵부답이다.
艱難辛苦를 무릅쓰고 유학경전을 공부하며 강의하고 글로 펴내는 이유이다.
201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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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孟子 易解』읽기에 앞서
孟子는 중국의 전국(戰國)시대(기원전 403 ~ 221년) 때 추(鄒)나라 출신의 학자인 맹가(孟軻)의 존칭이기도 하며, 그가 쓴 책명이기도 하다. 孟子는 공자의 도맥을 이어 성인(聖人)의 道를 펼치기 위해 철환주유(轍還周遊)하다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집필된 책이다.
추나라는 공자(기원전 551 ~ 479년)가 태어난 노(魯)나라와 지리적으로 가깝다.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와 맹자의 고향인 추성(鄒城)까지는 약 23km에 불과하다. 맹자의 자(字)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라고 한다. 생몰 연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략 공자(기원전 551 ~ 479년)가 돌아가신 후 100여년 후에 태어나 80세 이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기원전 372? ~ 289?).
맹자는 편모슬하(偏母膝下)의 자식 교육과 관련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이나 ‘단기지계(斷機之戒)’로 유명하다. 또한 ‘맹자호변(孟子好辯)’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비유법이 탁월하여 ‘여민동락(與民同樂)’ ‘연목구어(緣木求魚)’ ‘인자무적(仁者無敵)’ ‘불인지심(不忍之心)’ ‘단사호장(簞食壺漿)’ ‘조장(助長)’ ‘농단(龍斷)’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 ‘사대(事大)’ ‘부득이(不得已)’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너는 너, 나는 나(爾爲爾我爲我)’ ‘선각자(先覺者)’ ‘선지자(先知者)’ ‘집대성(集大成)’ ‘시조리종조리(始條理終條理)’ ‘호연지기(浩然之氣)’ ‘측은지심(惻隱之心)’ ‘자포자기(自暴自棄)’ ‘대장부(大丈夫)’ ‘사숙(私淑)’ ‘급선무(急先務)’ ‘사이비(似而非)’ ‘회계(會計)’ ‘야기(夜氣)’ ‘조심(操心)’ ‘전심(專心)’ ‘방심(放心)’ ‘진심(盡心)’ 등등 2천여 년이 지나도록 지금까지 회자되는 단어들도 많다.
맹자는 젊었을 때 노(魯)나라로 유학하여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이름은 孔伋, 중용 저술)의 문하생에게 유학을 배웠다고 전해지는데, 시(詩) 서(書) 역(易)에 달통했다고 한다. 맹자가 시경과 서경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고, 중용과 대학과 주역을 토대로 성선설(性善說)과 사단설(四端說) 등 유학의 핵심 이론을 정립한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맹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170여개의 제후국이 난립했던 춘추시대(BC770 ~ 403년)를 지나 칠웅(七雄)이라는 7국의 패자(覇者)가 천하 통일을 목표로 각축전을 벌이던 시대였다. 오로지 부국강병을 통해 약육강식만이 횡행하던 난세의 시대였다.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한 시대적 배경이기도 하다.
맹자에는 당시 위정자들의 폭정(暴政)과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과 참상(慘狀) 뿐만 아니라 諸子百家들의 편벽된 논리가 세상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가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그만큼 위정자와 제자백가들을 공격하는 맹자의 논조는 신랄하고 공격적이었다.
이를테면 제선왕(齊宣王)에게는 인척의 신하가 거듭 간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군주의 자리를 바꾼다(易位)고 했고, 높은 신분임을 은근히 자랑하며 가르침을 청하는 조교(曹交)에 대해서는 ‘그대 나라에 돌아가 구하면 남은 스승이 있을 것이라.’고 했으며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이론에 대해서는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 것으로 이는 금수(禽獸)라.’고 비판했다.
송나라 때의 정자(程子)는 맹자의 이러한 논조에 대해 천재적 재능[英氣]이되 모(圭角)가 난다고 하였다. 또한 공자를 따뜻하고 윤택한 옥(玉)에 비유한다면, 맹자는 얼음이나 수정과 같다고 했다.
맹자는 당시 세태를 패도(霸道)로 규정하고 이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유가의 핵심 사상인 ‘仁義’를 역설하고 왕도(王道)정치를 주창하고 나섰다. 이러다보니 눈앞에 당장 성과가 드러나는 부국강병만을 추구하던 제후들은 맹자를 세상물정에 어두운 ‘오활(迂闊)’한 존재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차별한 약육강식의 난세와 혼란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그 반작용으로 덕치(德治)와 인륜질서를 통해 흐트러진 민심을 추스르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양혜왕 제선왕 등문공 등의 제후들은 달변가이자 웅변가로서 유가의 대표 주자였던 맹자에 대해 ‘겸손히 예를 갖추고 막대한 재물을 갖춰(卑禮厚幣)’ 앞 다투어 초빙하였다.
맹자는 이들의 마음을 단서로 하여 仁義의 정치를 실현하려고 했으나 그들의 초빙은 한갓 위세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기과시였음에 불과하였다. 맹자는 이들을 ‘힘으로써 인을 빌리는 패자(以力假仁者霸)’로 규정하고, 공자가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내 무리인 제자들이 뜻만 높고 단순하여 훤하게 문장을 이뤘으되 마름질할 줄을 알지 못하도다(歸與歸與인저 吾黨之小子 狂簡하여 斐然成章이오 不知所以裁之로다).”고 하시면서 고향 땅으로 돌아갔듯이 맹자 또한 말년에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겠노라’ 하면서 君子三樂의 도를 찾아 고향 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각 나라를 다니면서 제후들을 비롯한 위정자들과 제자백가들과 제자들과 문답한 내용들을 만장(萬章) 공손추(公孫丑) 등의 제자와 함께 정리하여 孟子 7편을 엮었다. 孟子는 양혜왕(梁惠王)편, 공손추(公孫丑)편, 등문공(滕文公)편, 이루(離婁)편, 만장(萬章)편, 고자(告子)편, 진심(盡心)편 등 총7편인데, 각 편마다 상하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다. 이 분류는 후한시대의 조기(趙岐)에 의해 이루어졌다(자세한 내용은 뒤의 ‘趙岐題辭’ 참고).
孟子에는 공자가 편찬한 시(詩) 서(書) 역(易)과 증자(曾子)의 대학, 자사(子思)의 중용의 내용이 녹아들어 있는데다 맹자 스스로도 자신이 공자의 도맥을 이었다고 자처하고 있어 명실 공히 孟子는 공자의 유학 사상을 정통적으로 이은 경전이 되었다.
물론 孟子가 유학의 四書로 편입되는 데에는 宋代 程朱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고(이와 관련해서는 後記에 별도로 정리하였다), 이로 인해 유학을 ‘孔孟사상’이라 칭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논어와 맹자가 다 같이 문답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논어가 단문으로 이뤄진 반면에 맹자는 장문의 서술형 문장이다. 인륜질서를 논함에 논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교훈으로 삼아 새겨야할 경구(警句) 중심이라면, 맹자는 명쾌한 비유와 날카로운 독설이 담긴 서술문장이면서 후대 유학의 분화와 발전을 가져오는 철학적 기초를 제공해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논하는 측면에서도 논어는 점잖고 완곡한 표현인데 반해 맹자는 공세적인 표현으로 웅변(雄辯)적인 내용이 많다.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이를 잘 나타내는 단어이다. 예로부터 맹자를 공부하면 표현력이 좋아지고 발표를 잘하게 된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맹자 일곱 편을 읽은 사람과는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편집 방식과 관련하여 밝혀둘 점은, 논어 易解는 한문 문장 공부를 위해 주자(朱子)의 집주(集註) 원문을 그대로 실었으나, 맹자 易解에서는 맹자 본문과 해석 자체만으로 한문공부와 더불어 내용이 충실히 전달된다고 보고 주자를 비롯한 학자들의 주석은 싣지 않았다. 대신에 넓고 깊게 공부할 수 있도록 조기(趙岐)와 송대(宋代) 학자들의 주석뿐만 아니라 여러 원전(原典)의 문헌까지 살펴서 이를 토대로 가원(家苑)의 독자적인 해설을 두었다.
다만 조기(趙崎)의 서문인 ‘맹자제사(孟子題辭)’와 주자의 ‘맹자집주서설(孟子集註序說)’이 맹자와 관련한 일생과 시대적 사상적 배경을 잘 요약하고 있기에 원문과 해석을 본문 앞에 그대로 실었다. 後記에서는 맹자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방식인 皇帝 권력에 의해 어떻게 대접받았는지를 살피면서 맹자가 오늘날 우리에게 갖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아울러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세력분포를 나타내는 지도(地圖)와 맹자에 언급된 나라들의 군주세계표(君主世系表) 등을 넣었다. 이 책은 최소한 家苑의 천자문역해와 논어역해를 공부하고 난 뒤에 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려는 이들을 위한 해설서로 만들었으므로 사서삼경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경전을 두루 아우르면서 한문혼용을 하였음을 미리 밝혀둔다.
맹자는 무도(無道)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패권정치(覇權政治)를 종식시키고 위민(爲民)의 왕도정치(王道政治) 실현을 위해 인성(人性)의 선(善)함과 양지(養志)를 주장하면서 철환주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맹자의 의지가 집약된 문구가 진심(盡心)하편 제37장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문장을 인용하여 맹자의 뜻을 새기며 공자와 맹자가 실현하고자 했던 세상을 생각해본다.
君子反經而已矣 經正則庶民興 庶民興 斯無邪慝矣 (군자는 경도를 돌이킬 뿐이니 경도가 바르다면 뭇 백성이 일어나고, 뭇 백성이 일어나면 이에 사특함이 없으리라.)
201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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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맹자역해 한권 주문했습니다.강의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논어는 한 문장을 읽어도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리는데, 맹자는 논어보다는 이해가 쉽게 됩니다.
그러나 그 문장의 깊은 뜻과 전후배경이나 경과를 유추해가려면 단기간에는 힘이 들것 같더군요.
논어와 더불어 맹자해설서도 필독서가 되겠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행운을,
논,맹의 체용해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