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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네 가지 마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① 길가와 같은 마음입니다. 길가 밭의 특징은, 씨앗이 떨어지지만 토질이 단단하게 굳어 있어 싹이 나고 움이 트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 길가 밭은 온갖 죄로 인해 마음이 굳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마음 밭에는 복음이 수용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씨앗이 땅에 떨어지기는 하지만, 마침내 새가 먹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② 돌짝 밭 같은 마음입니다. 이 돌짝 밭은 바위 덩어리 위에 흙이 얇게 덮여 있어서, 얼핏보기에는 마치 옥토와 같이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밭입니다. 이 돌짝 밭에 씨가 떨어지면 처음에는 싹이 트고 자라지만 단단한 바위 덩어리 때문에 이내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태양이 뜨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죽고 맙니다. 이 돌짝 밭의 문제는 그 밑에 바위 덩어리가 있어 뿌리를 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직까지도 자기 육신의 생각과 욕구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그 생각을 쳐서 복종시키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깊이 있는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③ 가시 밭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 가시떨기 밭의 토양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이 밭은 부드럽고 질이 좋은 땅이지만, 문제는 씨앗이 가시떨기의 틈바구니 안에서 자라게 됨으로 기운이 막혀 힘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즉, 나약한 곡식이 되어 정상적인 성장을 못하고, 마침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에서 견디는 것은 여간 벅찬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다가오면 여지없이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④ 옥토와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좋은 땅은 앞에서 말씀드린 세 종류의 밭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비옥한 땅을 말합니다. 이렇게 구별하는 기준은 열매에 있습니다. 옥토에서만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을 지닌 사람은 복음을 듣고 잘 수용하여 마침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받을 때에 우리의 신앙은 바로 이 열매를 통해서 결정이 될 것입니다.
이들은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것이 쉬운 것이든, 아니면 어려운 것이든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기쁨으로 끊임없이 순종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는 생명력 있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직분에 맞는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믿음의 본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마음은 밭은 어떤 밭입니까? 옥토와 같은 마음을 밭을 가진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와 같은 마음 밭을 소유한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듣는 회중에게 "당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외쳤습니다.
베드로의 말에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무법자는 바리새인들과 빌라도의 무리를 의미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은 바로 바리새인들과 빌라도의 무리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설교를 듣는 회중에게 그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바로 당신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회중은 누구입니까? 행2:5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경건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일명 "디아스포라"로 불리 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다가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곧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와서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순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이상한 소리가 나서 제자들에게 몰려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각각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 말로 제자들이 외치는 하나님의 큰 일들에 대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본토의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아마도 그 현장에 없었을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외국에 나가 살다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하여 일부러 고국을 찾아온 경건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저 같으면 "뭐, 이런 사람이 있느냐?"고 따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만큼 베드로의 말은 충분히 반발을 살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닌 밤에 홍두깨"식으로 그야말로 졸지에 살인자로 몰렸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베드로의 설교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37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찔렸다는 동사 카타누소(katanusso)는 본래 말발굽에 의해 땅이 움푹 파인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마른땅이 말발굽에 의해 패일 정도라면 땅을 짓밟는 말의 힘이 얼마나 가공스럽겠습니까? 베드로의 설교는 그들에게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경건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에 살면서도 절기를 지키기 위해 고국을 찾은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열려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겸손한 마음으로, 열린 마음으로, 외경심을 가지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제자들을 가리켜 술 취했다고 비웃고 조롱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에 동조한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너희들이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마음에 엄청난 찔림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의 양심이 살아있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 앞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대로 지나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다보면 그들의 양심은 진리의 지적에도 무감각한, 죽은 양심이 되고 맙니다. 한 인간의 양심이 언제나 변함없이 싱싱하게 살아 있느냐, 혹은 시체처럼 죽어 썩어져가고 있느냐 하는 것은 결단코 남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탓이요, 자신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본문 속의 사람들은 마른땅이 말굽에 패여 분명한 자국이 남듯이, 베드로의 설교에 의해 그들의 양심이 찔림을 받았을 때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양심의 아픔이 가시기 전에 지체없이 베드로 일행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양심에 가책을 받을 때 그냥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성령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 그냥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성령께서 마음에 소원을 주시는 대도 모르는 척 그냥 지나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령께서 회개하기를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음성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에 의해 찔림을 받은 사람들의 절박한 질문에 대해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38절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의 대답은 우리를 당황케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오늘날 저를 비롯해서 많은 설교자들이 불신자들에게 쉽게 저지르는 실수가 있습니다. ①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엇을 해야 되는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뒤에서 설명하겠습니다.
② 또한 "우리가 믿음을 갖는 그 순간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믿음 만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에 따른 순종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수레의 양 바퀴와 같아서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야고보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2:24)"고 말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갈5:6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했을 뿐 아니라 빌2:12에서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있는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이 삶이 없는 성도들과 불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값싼 은혜를 남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무엇이든지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에 따른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생명체는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물고기들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구원받은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③ 또 설교자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불신자들의 기도가 결코 저들을 구원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기도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에게만 부여된 특권이며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벧전3:12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 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너무도 쉽게 구원을 말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기 만하면 된다고, 기도하면 된다고 말해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이,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외치는 백성들을 향한 베드로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다시 38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말은 베드로의 첫 번 째 설교의 결론입니다. 양심에 찔림을 받고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과 동행하는 방법, 다시 말해 성령세례를 거쳐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과 동행하지 않고서는 양심의 가책 없는 삶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베드로가 제시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①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는 동사 메타노에오(metanoeo)는 길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가던 길에서 돌아서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손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철저하게 행동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마21:28-31a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습니다. 그 둘째 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뉘우치고, 회개하고 갔습니다. 그가 가게 된 이유는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죄에 대한 후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마음의 변화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먼저 회개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을 말하기 전에 회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도 그냥 죄를 뉘우치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을 정도의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삶의 내용을 바꿀 수 있는 철저한 마음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란 우리들 신앙의 전제입니다. 회개 없는 믿음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회개는 후회가 아닙니다. 반성도 아닙니다. 회개는 벌이 무서워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회개는 하나님 사랑의 한가운데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동하여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죄만 짓고, 하나님은 은혜만 내리신다." 얼마나 적절한 말입니까?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 말을 저는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100가지 죄를 준비하고 하나씩 죄의 카드를 내밀면, 하나님은 101가지 은혜를 준비하시고 우리가 죄의 카드를 내밀 때마다 은혜의 카드를 내미십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며 마침내 뒤집어지는 것이 참 회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 안에서 완전히 바뀐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까지 추구하던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물질을 추구하던 삶을 버리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을 위하여 살아가던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육신적인 생각을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원문을 보다 정확하게 해석하면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가 세례를 언급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본질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세례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 또 갈3:27절은 다음과 같이 세례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례의 본질은 연합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추구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죽음을 향해 치닫던 길에서 돌아서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 머지 않아 한줌의 재에 불과할 것들을 내려두고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너무도 약한 제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한 제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연합보다도 현재 육신의 정욕을 버리지 못한 제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이 말 역시 철저하게 행동과 관련된 말입니다.
그런데 원문을 살펴보면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너희가 회개하라"고 말할 때 베드로는 2인칭 복수에 대한 명령형으로 말했습니다. 반드시 회개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곧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할 때, 그는 3인칭 단수에 대한 명령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너희들 한 명 한 명이 각각 세례를 받으라, 또는 너희 각자는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세례를 받게 하라"는 말이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한날 한시에 한 장소에서 모두 회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같은 날, 같은 교회에 등록하고, 같이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의 추구는 각 개인의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시작은 집합적일 수 있지만, 신앙의 질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학생들이 입학식은 단체로 함께 하지만, 졸업식 때에 학생들의 수준은 각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천차만별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한 마디로 본문은 신앙에 관한 한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로서만 혹은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회개의 삶과 세례의 삶을 실천해 갈 때, 언제나 성령님께서 동행해주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철저한 회개와 아울러 세례, 곧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39절입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회개함으로 끊임없이 주님과의 연합된 삶을 추구하는 자라면, 그가 누구든 상관없이 성령께서 함께 동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회개와 세례의 삶을 추구하려 하지 않을 때, 그가 누구이든 구별 없이 성령 충만한 삶은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목사라고 항상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성도라고 성령 충만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누구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회개와 세례의 삶을 살아가는 누구든지 충만케 임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40절입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여기에서 "패역하다"는 말은 "곧다"의 반대어로서 "비뚤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비뚤어져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심성도, 생각도, 행동도, 삶도, 온통 진리에서 벗어나 비뚤어져 가고만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와 세례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 패역한 세상 속에서 구원의 삶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와 동행해 주시기에 비뚤어졌던 삶도 오히려 곧게 바로 세워질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역시 뒤집어 말하면,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추구하지 아니할 때 이 패역한 세상에서 결코 구원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의미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과는 성령께서 동행하시지 않기에 그의 삶은 계속 비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후5:18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주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조건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바로 이것이 조건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주시는 것은 주님의 책임이지만, 그러나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책임인 것입니다.
갈5:16절은 또 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리라" 우리는 모두 육체의 욕심, 욕망의 노예가 되었던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뒷맛은 언제나 쓰디쓴 소태와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욕망이란 마치 물거품처럼 허망한 것임을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허망한 줄 알면서도 욕망에 더욱 심취하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실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욕심으로부터 자유하기 원한다면 먼저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좇는 자들의 심령을 진리의 빛으로 밝혀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의 책임이지만,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먼저 성령을 좇는 것 역시 인간의 책임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원칙인 것입니다. 회개와 세례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탓이 아닙니다. 양심의 소리에 무디어진 분이 있다면, 그것은 남의 잘못이 아닙니다. 허망한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 망령된 행실을 좇느라 황금 같은 인생을 탕진하는 분이 있다면, 그 역시 타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전적으로 그런 삶을 추구해 온 자기 탓이요, 자기 잘못이요, 자신의 책임입니다.
반대로 여러분 주위에 정말 향기로운 진리의 꽃을 피워 가는 분이 있다면, 그런 분의 삶을 과소평가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오. 그 아름다운 진리의 꽃은, 그 동안 그분이 추구해 온 삶의 결과입니다. 모든 인간의 삶이란 자신이 추구해 온 것의 결과를 형상화하는 텃밭입니다.
허망한 것을 추구한 자의 삶 속에 영원한 것은 꽃 피지 않으며, 영원을 좇은 자의 인생 텃밭에 허망한 것 또한 결실되지 않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야말로, 내가 그 동안 추구해온 내 삶의 결과라는 것보다 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더 엄중한 하나님의 평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1. 우리의 마음 밭은 어떤 밭입니까?
2. 참된 회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3.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4. 비뚤어진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5.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떠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회개와 세례의 삶을 통하여 의미 있는, 가치 있는, 성령과 동행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