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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모습을 한 여인이 지붕 위에 덩그러니 혼자 외롭게 앉아 있습니다. 눈은 아무 것도 볼 수 없도록 수건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지붕 위의 하늘에는 해도 달도 보이지 않습니다. 수없이 많은 별들 가운데 오직 하나만 떠서 여인의 등 뒤에서 비춰주고 있습니다. 여인의 가슴에 안겨 있는 비파의 일곱 줄 가운데 여섯 줄은 끊어져 있습니다. 수건으로 가려진 눈, 유일하게 빛나고 있는 별 하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비파 줄은 절망을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화가George F. Watts가 이 그림에 붙여놓은 제목은 “소망”입니다.
여인이 절망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유일하게 남은 한 줄로 비파를 연주하며 여전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감동과 함께 소망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은 절망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비로소 절망이 될 수 있습니다. 절망이라고 할지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절망이 될 수 없습니다. 소망을 놓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단코 절망이 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눈이 완전히 가려진 것 같은 암담한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햇빛도 없고, 달빛도 없이 온통 어두움 뿐 상황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상황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고해라고 불리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얼마든지,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절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하늘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저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절망이라고 불러야할 것 같은 상황을 통해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미처 깨닫지 못한, 그렇지만 저와 여러분을 위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Samuel는 최후의 사사였습니다. 동시에 탁월한 선지자였습니다. 제사장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누구보다 잘 감당했습니다. 자식 교육에는 실패했습니다. 백성들은 실망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부패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왕을 구했습니다. 하나님 대신 인간 왕이 자신들을 다스려주기를 구했습니다. 이방인의 통치 체계를 구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부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왕이 세워졌을 때 그들이 감당해야할 의무가 무엇인지 자세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젊은 남녀의 징집, 곡물과 가축의 징세와 징용, 왕의 폭정으로 인한 고통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아무리 부르짖어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겠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세속적인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제까지 섬겨왔던 당신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왕을 구하는 성민 이스라엘을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왕정을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또 왕정을 허락하시는 자체가 무서운 형벌이라는 의미입니다. 장차 등장하게 될 폭군을 통해서 이제까지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왕들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불신앙으로부터 비롯된 이기적인 욕심은 결국 자기 스스로를 견디기 힘든 고난의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넣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이를 알 리 없었습니다. 단호했습니다. 자신들의 불신앙적인 요구를 반성하거나 철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더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모실 수 있는 왕이 있어야겠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나의 왕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바로 나의 왕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에 죄 외에는 다른 어떤 모양의 선善도 내놓을 수 없는 자신들을 위한 삶을 살고 싶어 안달이 났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아내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아니 저와 여러분이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가치관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한 사람Saul이 등장합니다. 그가 가진 이름의 뜻은 “구하여 얻은 자”입니다. 놀랍게도 선지자의 이름에 담긴 뜻과 같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의 뜻 역시 “구하여 얻은 자 또는 하나님께 드려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하는 대상이 다릅니다.
그는 백성들이 스스로 구하여 성민 이스라엘 역사 속에 첫 번째 왕으로 등장했다면, 선지자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얻었지만 다시 드려진 아들이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풍채風采는 대단히 뛰어났습니다. 성민 이스라엘 가운데 그보다 뛰어난 풍채를 가진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키는 모든 백성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습니다. 자신들을 다스려 줄 강력한 통치력을 갖춘 탁월한 왕을 찾고 있었던 성민 이스라엘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기에는 충분히 수려秀麗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오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종과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있을만한 여러 지역을 두루 다녀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종은 아버지가 자신들의 안부를 걱정할 수도 있으니 이제 그만 찾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습니다. 다만 돌아가는 길에 선지자를 찾아가서 암나귀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선지자에게 묻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물을 드려야 하는데 자신에게는 한 푼도 없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종은 마침 자신에게 얼마간의 돈이 있으니 그것은 염려하지 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즉시 “네 말이 옳다, 가자!”라고 외쳤습니다.
선지자가 있다는 성읍으로 올라갔습니다. 도중에, 물을 긷기 위해서 나오고 있었던 소녀들의 무리를 만났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소녀들은 선지자가 백성들과 함께 먹기 위하여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서둘러서 쫓아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자신들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는 소녀들의 말을 듣고 서둘러서 쫓아갔습니다.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마주 나오고 있던 선지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선지자를 만날 계획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버지 명령에 순종하여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는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무수히 많은 지역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헤맬 때도 있었습니다. 종이 권면하기 전까지는 선지자를 만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소녀들로부터 재촉을 받았습니다. 즉시 서둘렀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되는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만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만남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어버리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암나귀를 찾아오라고 명령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종이 선지자를 만나자고 제안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소녀들을 만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소녀들의 재촉에 마음을 열고 서둘러 쫓아가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선지자를 만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치밀하게 진행하셨습니다. 완벽하게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들은 계획하지 않았었던 만남, 그야말로 놀라운 만남,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기까지 하나님 없이 이루어진 일은 한 가지도 없었습니다. 오늘 만나고 있는 저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전혀 다른 환경과 상황 속에서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채 살고 있었던 저와 여러분이 만날 수밖에 없도록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치밀하게 역사하셨습니다. 때가 이르자 마침내 만나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완벽하게 이루기 위하여 여전히 열정을 불태우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한 당신의 거룩하고, 위대하며, 마침내 보게 되는 날 환호성을 지르며 당신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계획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기까지는 지극히 짧은 순간도 결코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b)라는 선지자의 외침은 한 치의 오류도 없는 완벽한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저와 여러분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과정입니다. 삶이 아무리 힘겨울지라도 하나님을 붙잡은 믿음의 손을 절대로 놓지 말아야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고해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만나는 환경, 사건, 사람들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며 거룩한 계획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때까지 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떠난 것도 모자라서 대적하는 원수들이 쌓아올린 화려한 도시들을 철저히 허물어뜨리십니다. 돌무더기로 만들어버리십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누구도 감히 도전할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난공불락이었던 요새들도 터만 덩그러니 남겨놓으십니다. 영원히 재건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심판하십니다. 반면, 포악한 원수들로부터 경제적, 사회적, 계층적 압제를 당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열악한 현실 속에서도 오로지 당신 한 분만을 바라보며 끝까지 믿음을 내려놓지 않았던 경건한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보장이 되어 주십니다.
언제든지 안전하게 숨어들 수 있는 강력한 요새가 되어 주십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 곧 고해와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수시로 만나게 되는 무수히 많은 문제들로부터 지키시는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마치 하늘이라도 뚫린 것처럼 퍼붓듯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할 수 있는 곳이 되어 주십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게 만드는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한때, 승리에 도취하여 부르던 원수들의 환호와 노래를 완전히 끊어버리십니다. 사실, 원수들은 습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거칠고 메마른 땅에 작열灼熱하는 강력한 폭양曝陽과 같습니다.
그들의 몫은 연전연승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지극히 무기력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주변 국가들을 두려움 속에 몰아넣었던 위력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진멸殄滅됩니다.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과 열방들 가운데서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을 거룩하게 구별된 시온으로 불러 모으십니다. 온갖 기름진 것들과 오래된 포도주 곧 더할 나위 없이 살진 고기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숙성된 포도주를 곁들인 잔치를 베풀어주십니다.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주십니다.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 곧 하나님 나라를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는 사도의 증거대로, 저와 여러분이 이제까지 당해왔고 오늘 역시 당하고 있는 힘겨운 고난들이 아예 생각조차도 나지 않을 만큼의 거룩한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받을 수밖에 없었던 조롱과 멸시와 경멸과 수치가 눈 녹듯 사라져버리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당신에 대한 온전한 지식, 완벽한 지식, 충만한 지식을 갖출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오랫동안 가로막고 있었던 모든 장애물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완벽하게 다 사라진 상태에서 마치 얼굴과 얼굴을 서로 대면對面하여 보는 것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a)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문자 그대로 이뤄지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 안에 충만하게 거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다시는 둘로 갈라놓을 수 없는 완벽한 하나가 되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무엇보다 처음 사람의 타락 이후 인생을 완벽하게 지배하며 영적으로는 물론 육체적으로나 환경적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절대 절망 속으로 몰아붙였던 근본적이면서도 최후의 적이었던 죽음을 완전히 삼켜 버리십니다. 더 이상은 지극히 작은 도발조차도 하지 못하도록 영원히 삼켜버리십니다.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었던 이별과 아픔과 슬픔과 눈물과 절망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십니다. 영원히 지워버리십니다. 당신과의 교제가 완벽하게 회복된 결과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부르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이후로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보라! 이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 우리가 믿는 여호와이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자.”(사25:9)라는 고백이 저절로 쏟아질 수밖에 없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이 살아내고 있는,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인생의 궁극적인 결론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에게 허락해주신 놀라운 약속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을 위해서 창세전에 이미 작정하신 놀라운 계획입니다.
이보다 더 복된 소식은 없습니다. 사도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라고 외쳤습니다.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과 치가 떨리는 조건과 생각만 해도 넌더리가 나는 사람이 아니라 아들을 희생 제물로 내놓기까지 당신 백성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외쳤습니다. 허락하신 환경과 조건과 사람을 통해 창세전부터 작정하신 당신의 선한 계획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께 원망이나 불평을 늘어놓지 말고 믿음으로 반응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목이 아플 정도로 설명해줘도 절대로 깨달아 알 수 없는 놀라운 평안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특히 그는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라고 고백했습니다.
다른 번역AMP은 이를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손수 만드신 작품(그분의 솜씨)이며,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길을 따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예정하신 (사전에 계획하신) 선한 일을 하고, 그 안에서 (그분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좋은 삶을 살며) 행하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재창조된 (거듭난) 자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직접 디자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印치셨습니다. 증명證明하셨습니다.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책임지고 지켜주십니다. 보호해주십니다. 절대로 실패할 수 없습니다. 실패하기에는 너무나 탁월한 존재입니다.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아내고 있는 삶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과 진실로 행하셨음이라.”(사25:1)라는 선지자의 외침대로, 하나님의 계획은 저와 여러분의 사고가 미칠 수 없는 옛적 곧 영원 전에 이미 끝났습니다.
성실과 진실 곧 완전한 성실을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쏟아 부으십니다. 이뤄주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시간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흘러갑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의 끝은 반드시 선으로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주어져 있는 상황은 좋든 나쁘든 그 선을 위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밑거름입니다. 금상첨화의 자양분입니다. 좋아도 좋고, 나빠도 좋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많은 사건 사고들이 벌어져도, 죽을 만큼 힘든 고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져도 저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탁월한 섭리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 능력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저와 여러분을 위한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관심 없어도, 하나님은 지대한 관심을 쏟아 부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쉬는 시간에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당장에 처해 있는 형편과 사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탁월한 작품입니다.
비록 당장 보기에는 초라하게, 구차하게, 하찮게 보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져 있는 저와 여러분은 결국 탁월한 작품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후,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하나같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일들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 하나까지도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은 저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하나님과 함께 이뤄가는 거룩한 여정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다면, 중간에 방향을 바꿔도 괜찮습니다.
가던 길을 아예 되돌아와도 괜찮습니다. 심혈을 기울여서 추진하고 있었던 일을 아주 포기해도 괜찮습니다. 당장 내놓을 만한 열매하나 제대로 맺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괜찮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역사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 백성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출중했던 사울은 하루가 다르게 쇠퇴했습니다. 출전하는 전쟁마다 패했습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였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삼상18:7b)는 여인들의 외침대로, 언제나 다윗의 들러리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화려했었던 등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반면, 다윗은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미약하게 시작했습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들이 끊임없이 반복되었습니다. 원수들은 쉬지 않고 달려들었습니다.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며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습니다. 둘로 나뉘어져 있었던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를 통일한 명실상부한 왕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이후 무려 천 년 동안이나 미뤄지고 있었던 가나안 완전정복이라는 위대한 역사까지 완성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대한 패자覇者로 우뚝 섰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극명하게 다른 인생을 살게 된 원인은 하나였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스스로 성민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 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한 왕으로 섬겼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왕은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그John Flavel는 “하나님의 역사들을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환난 날에 먹고 사는 양식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저를 위해서) 하신 일들을 제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옛날 당신이 베풀어주신 기적들을 회상하고 주의 행적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장하신 일들을 깊이 새기겠습니다.”(시77:11-12)라고 고백했습니다.
시인은 또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깊은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벌건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91:1-6)라고 노래했습니다.
호흡이 주어지는 모든 순간 하나님 한 분만 온전히 믿고 의지하며 신뢰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묵상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위한 당신의 계획을 완벽하게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복된 삶, 하루가 다르게 하나님의 탁월한 작품으로 성숙해지는 복된 삶, 무엇보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을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