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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4장 5-7절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지난 시간 우리는 마귀의 첫 번째 시험에 대해 살폈습니다.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주리신 예수님께 나아와 하는 말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아주 무시하는 것 같아 보이는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마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능히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성을 입으심으로 금식하여 매우 주린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로서는 마땅히 먹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의 경우 그것을 노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성을 입으셨지만 인성의 의지를 따라 무조건적으로 해결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귀의 시험 앞에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즉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우선이요, 내 욕구와 의지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우선이요, 참된 생명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두 번째로 마귀가 시험을 하는 내용입니다. 5절과 6절을 보시면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여기도 보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첫 번째 시험과는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의 경우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로 떡을 만들라” 즉 네 능력을 보이라는 식으로 시험을 했다면,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고 말합니다. 뛰어내린다면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 보호하실 것이다. 즉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 보호하시지 않겠느냐? 그러니 뛰어 내려 보아라.”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관련하여 시험을 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답변하신 것이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두 번째 시험의 경우 말씀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도 분명 연관이 있는 시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마귀가 이런 시험을 할 때 무엇을 가지고 시험을 하느냐 하면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시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 ‘기록되었으되’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첫 번째 시험을 통해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성격과 관련해 말씀으로 이기셨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4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에 대해 ‘기록되었으되’라는 말로서 그 시험을 물리치셨던 것이고, 또한 예수님의 답변인 신명기 8장 3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살필 수 있었습니다. 인생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리고 이것은 두 번째 시험과 세 번째 시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7절도 보면 ‘또 기록되었으되’라는 것으로 그 시험을 물리치셨고, 또 다음 주에 보게 될 세 번째 시험도 10절에 나타난 것처럼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신성으로 보자면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친히 말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성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특별히 마귀로부터 시험을 당하실 때 친히 말씀하신 그 말씀을 따라 다 물리쳤던 겁니다. 능력으로 하자면 굳이 말씀으로서 이기실 필요도 없으십니다. 그러나 택자의 대표로서 무엇으로만 마귀를 물리치셨는가? 오직 말씀으로서만 그 모든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무엇으로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느냐? 말씀으로서 모든 시험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즉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와 시험의 내용 앞에 다른 것을 가지고 나갈 필요가 없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면 족하고,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아니 어떤 문제와 시험만이 아니라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 이 말씀이요, 칼빈의 사고를 따라 말하자면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하는 모든 영역이 성경으로부터, 성경 안에서, 성경과 함께, 성경을 통해서, 성경을 향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종교개혁 시대의 모토 중 하나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성경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권위 있는 말씀이며,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으로서 오직 성경을 말했습니다. 중세 교회의 전통 그리고 교회 회의, 교황의 도전에 맞서 성경을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최종 권위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권위를 무너뜨리는 내용으로서 성경의 불충분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굳이 말로서 성경의 불충분성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말로는 성경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충분하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부정이나 하듯이 교회 안에 성경과 상관없는 것들을 채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를 좀 더 효과적으로 세우기 위해 어떤 전략과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경영학이 들어오고, 사람의 마음을 좀 더 잘 헤아려 주기 위해 심리학과 상담학과 같은 것들이 도입되고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직통계시를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도라는 명목 아래 말씀을 대신하여 간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감히 말씀드리지만 이런 사람들이 혹 ‘오직 성경’을 말할지라도 개혁자들이 말한 ‘오직 성경’,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고 고백하는 ‘오직 성경’과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모범은 기록된 성경으로서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말씀만으로 충분한 것처럼 그렇게 모든 시험 가운데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디모데후서 말씀으로 하자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딤후3:16).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성경 외에 다른 것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적 말씀만으로 족한 것입니다(딤후3:17). 뿐만 아니라 우리의 거듭남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 즉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벧전1:23).
때문에 새로운 사람이 처음에 교회 들어오면 말씀이 안 들려질 것 같아서, 좀 더 친숙하게 하기 위하여 간증을 하는지 몰라도, 이미 그것부터가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특히 택자들을 부르시는 그 구원의 역사는 반드시 말씀과 함께 일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보다 더더욱 사실이 바로 말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에 보면 이 성경을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말했던 겁니다(벧후1:19). 그리고 그때 무엇과 비교를 하느냐? 베드로 자신의 경험과 비교하면서 이 말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변형되시는 것을 목격하면서 마치 천국에라도 온 것처럼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했지만, 그리고 그런 경험이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그런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그런 경험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뭐냐? 바로 성경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슬픔과 고통의 일, 혹은 어려운 일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시편의 기록으로 하자면 70년 내지 80년을 살지만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하는 날이 실제로 많은 것입니다(시90:10). 그러나 그때도 우리는 어디로 달려가야 하느냐? 말씀입니다.
물론 사람들과의 대화,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오는 위로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성도는 말씀을 먹고 마시는 자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떡에 있지 않듯이 우리의 모든 위로도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혹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그때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한 위로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다윗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을 불러 아뢰었지, 사람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졌지만, 그때도 여전히 무엇을 바라보았는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역사를 이끄심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을 기초로 삼지 않고 또 말씀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말씀 외에 다른 것에 우리의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결코 합당치 않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은총이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만 고집하게 하옵소서. 말씀만 붙들게 하옵소서.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만 살게 하옵소서.” 그리고 말씀 아닌 다른 것으로 나아가는 모든 습관을 버리셔야 합니다. 모든 시험 가운데 예수님께서 ‘기록되었으되’라는 말로 사탄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하다는 의식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을 통해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답게 이해해야지, 그 말씀을 오용하거나 악용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귀의 경우 분명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자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때도 여전히 말씀으로서 마귀를 대응하시는데, ‘또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시면서 대응하십니다. 즉 마귀의 말씀 인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믿음에 대한 시험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믿음과 상관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한다는 데 있다고 알리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잘못 이용하는 사탄의 책략을 엿볼 수 있으니, 그것은 생명을 바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빵을 바꿔 독약으로 만들려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조금 전에도 심리학, 상담 그리고 직통계시나 간증과 관련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상담을 전공하신 분들 가운데서는 보면 성경을 마치 상담식으로 푸는 분들이 계십니다. 심리학을 전공하시면 심리학적으로 풀고, 또 직통계시나 간증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하면 성경 앞에서 그 경험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보다는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성경을 푸는 열쇠로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 뭐냐?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답게 푸는 것이 아닙니다. 오용하는 것이요, 악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QT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자는 취지는 매우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우리의 양식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한다고 할 때 성경을 정당하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분수에 맞게(롬12:6) 그 말씀을 해석하기보다는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해서 자꾸 우리는 우리 상황과 환경에 맞춰 성경을 보고자 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른 교리의 내용조차 모른다면 그 해석이 어떠하겠습니까? 칼빈의 경우 기독교강요 초판 헌사에서 로마서 12장 6절에 있는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라는 것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모든 영광 돌릴 기회를 제거하여 그분 홀로 영광스럽게 부각되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영화로워하는 것”이 믿음에 잘 부합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정신으로서 해석이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목사들조차 바른 교리와 상관없이 말씀이 해석되고 있는 교회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일차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전제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죄란 철저히 자기를 향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인간론 중심으로 있지, 하나님 중심으로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질이 이미 알미니안적입니다. 성경을 보는 데 있어 다 그렇게 봅니다. 내 경험, 내 환경, 그리고 이 시대의 문화와 같은 것들이 뒤섞여 하나님의 순순한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들로 있다는 겁니다. 이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교리를 세워가도록 애쓰셔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리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란 다른 뜻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 그 내용을 교육을 위해서 어떤 순서나 혹은 주제별로 정리를 한 것입니다. “성경은 성경이고, 교리는 교리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정리한 것이 교리인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을 통하여 가르치는 바는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는 교리, 인간의 자유의지를 높이는 교리 이런 식으로 이런 교리, 저런 교리가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 분이 아니라, 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교리 역시 다양한 것이 아니라 한 교리입니다. 바로 이것을 세워가도록 애쓰셔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서 서론에 보면 우르시누스라는 개혁자가 성경을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 것이 있습니다. “신학을 가르치고 공부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말하는 내용인데, 첫째가 요리문답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의 주된 교의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며 단순하게 해명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둘째 방법이 일반적이며 좀 더 난해한 성격을 띠는 주제들,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예배 시간에 고백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같은 그런 주제들을 정리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방법이 뭐냐? 성경 본문을 조심스럽게 부지런히 읽는 것으로서 말합니다.
얼핏 보면 성경이 무시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의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르시누스에게는 성경을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한 준비로서 성경 해석의 산물인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서들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하거나 악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순순한 가르침 아래 있기 위해서 이런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개혁교회들은 이런 요리문답 교육이나 신앙고백의 내용을 살피도록 했던 것입니다.
더불어 사도행전 17장 11절 말씀이 우리의 자세로 있어야 합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러니까 공적인 가르침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가벼이 받아서는 안 됩니다. 다 아니까 대충 들어도 된다는 식으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적 가르침 아래 있어야 하고, 또 그런 가르침에 대하여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되고, 그것이 과연 그러한지를 분별도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성경을 말한다고 해서 다 성경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말한다고 해서 다 바른 해석으로서 말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용할 수 있고, 악용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했듯 성경을 가지고도 믿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과 상관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믿음인 것처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매우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럼 마귀가 인용하고 있는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시편 91편 11절과 12절입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그런데 시편 91편 전체적인 내용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안전을 보살펴주시며 결코 그들을 위험한 지경에 빠뜨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으면서 모든 위험을 통과해 나가도록 권면을 하는 내용인 겁니다. 그래서 1절 이하 3절을 보시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시91:1-3) 사냥꾼의 올무가 없고 전염병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지만 그러한 것에서 건지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전염병에 전혀 걸리지 않는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는 위협하는 자들이 아예 없다.” 이런 내용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아무런 해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 보면 고난을 받으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일반적인 질병도 만나고, 또 억울한 일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만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이런 저런 모양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는 것도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91편에 의하면 하나님은 분명 자기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살펴 주시는 분으로서 소개를 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문자적인 것을 너무 그대로 받아서 실수하게 되는 경우들인데, 성경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문자 그대로 받아야 할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후서에서는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벧후1:20). 또한 성경의 말씀 가운데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하면서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렀다고 주의를 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벧후3:16). 여기에 공적 가르침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나아가 앞서 ‘오직 성경’이라는 말을 했지만,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만 말한 것이 아니라, ‘전 성경’(Tota Scriptura)으로부터라는 말도 함께 사용했습니다. 이 한 말씀이 지금 전 성경으로부터 충돌되지 않는 말씀으로 있는가? 이 한 말씀이 전 성경의 이해 속에서 자리할 수 있는 그런 말씀인가?
오늘 본문에서 마귀가 인용한 말씀은 이런 점에서 ‘오직 성경’은 되었을지 몰라도 ‘전 성경’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신다고 하니까 그 백성의 머리인 너도 뛰어 내려 보아라. 그러면 천사들을 통하여 내 발이 땅에 부딪히지도 않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말씀 자체는 이런 내용이 분명 있을지라도 터무니없이 무모한 일에까지 확대하는 것은 결코 전 성경으로부터 지지 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우리의 길을 갈 것을 명령하시고, 그 다음에 천사가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리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나 사탄은 천사의 보호를 먼저 내밀고 다음에 그리스도로 하여금 위험천만한 일을 저지르게끔 강권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고 하니까 위험한 일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게 아니란 겁니다. 시편 91편 13절에는 어떤 말씀도 있느냐?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그래서 사자와 독사에게 접근해서 밟는다면 그것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한 것이 아니라, 오용하고 악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적용적인 면에서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자면 연말연시 말씀 뽑기를 하는 교회들이 있는데, 다 미신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뽑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 또 뽑은 말씀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외적으로 보이는 그 말씀만 좋아하는 자체가 마귀의 시험 가운데 다 넘어지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그런 말씀 가운데 저주가 선포되는 말씀이 있느냐? 하나도 없습니다. 다 복된 말씀과 관련해서 있을 뿐입니다. 말씀을 얼마나 가감하는지 모릅니다. 다 자기 좋은 쪽으로만 그 말씀을 사용할 뿐이지, 진정한 의미와 내용 그리고 믿음에 분수에 합당한 해석으로는 나아가고자 하지 않는 모습이 한국교회의 모습인 겁니다. 다 어디에 넘어가 있느냐? 마귀의 이 두 번째 시험에서 다 넘어가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귀의 시험 앞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또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은 마귀가 인용한 말씀의 이해가 틀렸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신명기 6장 16절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신명기 6장 16절 말씀을 그대로 읽어드리면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혹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에 대한 물음은 시험의 성격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못 믿는 태도가 아닌가? 그러나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못 믿는 태도라기보다는 인간의 한계를 알기에 바른 말씀에 머물기 위한 방편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앞에 인간이란 존재가 순수하게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교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본문을 설교하지만, 다른 교리로서 펼쳐질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죄악 된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그런 죄는 끊임없이 자기를 향하도록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묻는 것은 결코 불신앙적인 면과는 다른 것입니다.
반면 지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이 부분을 좀 더 확인하기 위해 맛사 시험과 관련된 출애굽기 17장을 보겠습니다. 1절 이하 7절 내용인데, 7절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내용인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서 떠나 노정대로 르비딤에서 장막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곳에 물이 없습니다(1).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원망 불평을 늘어놓게 됩니다. 특히 2절에 보면 겉으로는 모세와 다툰 것으로 표현이 되고 있지만, 정작 모세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2)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와만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이 지금 여호와를 시험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출애굽기 15장만해도 쓴 물을 단 물로 바꾼 역사가 있었습니다. 또한 16장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원망 불평을 쏟아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 7절인데,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하면서 왜 그렇게 지었는가?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기 때문이요, 또한 여호와를 시험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7절 후반부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그러니까 물이 없어 원망 불평하지만, 그 일은 곧 무엇과 같은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 상황에 적용해서 이해하자면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셨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떠나신 적이 있는가? 성경은 단 한번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아니 떠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을 수는 있지만, 결코 떠나지 않으며 떠날 수 없다고 알리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못 알아들으면 인성을 입고 친히 임마누엘로 계시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확인까지 하도록 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처한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렇지 않다”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불신앙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이 땅에서 아무런 해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없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고난이 있다고 말합니다. 고난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말씀까지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인생길 자체가 광야인 것입니다. 아니 광야가 아닌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러면 거긴 천국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신앙의 싸움을 싸워야 하는 지상의 삶입니다. 전투하는 교회요, 승리의 교회가 아닌 겁니다.
그런데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우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생각하더란 것입니다. 물은 있는데 쓴 물이면 마실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원망. 광야로 나갔는데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 없다고 원망. 그래서 쓴 물을 단 물로, 또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다면 이제는 좀 달라졌을 법도 한데 여전히 변함없는 그 모습을 보이고 있더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모든 역사는 역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인 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믿음의 시련을 통해 인내를 만들어 내시고, 또한 그런 인내를 온전히 이룸으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는 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약1:4). 그런데 그 목적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역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꼴이 되는 마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은 믿을 수 없는 분이라고 하면서 불신앙을 나타내는 겁니다.
구약의 맨 마지막에 있는 말리기 말씀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라기 1장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다고 하니까, 저들의 반응이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는데,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것과 같습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고 따지고 있는 내용인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왜 이렇게 따지고 있는가? 대부분의 인생이 하나님 사랑에 대한 확인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세상의 것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가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출애굽기 말씀으로 하자면 물이 있는가? 떡이 있는가? 즉 많은 부분이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와 결부되어서 그 사랑을 확인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원망 불평인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어떻게’라고 물으면 그 방법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방법으로서 말씀하지 않고 얼핏 들으면 동문서답처럼 보이는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어디에서 인용이 되느냐 하면 로마서 9장에서 인용이 됩니다. 바로 예정론의 내용이 펼쳐지는 곳에서 말라기의 이 말씀을 인용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이 땅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편에서 볼 때 좀 직접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영혼의 문제로서 판단해야지, 육체적인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전인이 구원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몸을 죽이는 것으로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누구를 두려워하라고 하는가?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의 역사가 언제부터 계획된 것이냐? 영원 전부터 계획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다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는 택하시고, 누구를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런데 너희가 바로 내가 택한 나의 백성이라고 알리고 있는 것이 말라기서의 답변인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내가 너희를 영원 전부터 택했다.” 이것이 답변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예정론의 내용은 실제로 어떤 역사까지 맞물려 있느냐? 사랑해서 택했기 때문에 바로 택자를 위해 누구까지 보내셨느냐?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 땅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이 땅에 보내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죽기까지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아들까지 줬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못 줄 것이 없다는 겁니다.
다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준다고 할 때 성경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지, 세상의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근원적인 내용으로 올라가자면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도록 하는 것이지, 그것 아닌 다른 것으로 만족하게 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랑으로서 확인하고자 하는 의식주 문제에 대해 전도서는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전도서 2장 25절과 26절입니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먹고 즐기는 모든 것을 누가 주시는가? 하나님이 주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모아 쌓게 하시는 일들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부분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의식주도 분명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선물이요, 그런 일시적인 선물도 헛되다고 말하는 선물이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 말씀은 어떻습니까?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일시적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천국은 죄를 상상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죄가 아예 없습니다. 완전 성화의 자리요, 영화를 얻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기록하고 있느냐? 많은 부분 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이 그대로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뭐냐? 일시적이지만 그것은 헛된 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딤후3:16).
그럼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것이 말씀으로 끝인가? 아닙니다. 그 말씀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이 천국에 대해서는 일시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천국도 피조세계이기 때문에 시작은 분명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처럼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한 곳입니다.
정리하자면 창조에 속한 선물들이 있는데 의식주는 일시적이면서도 헛된 선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 말씀은 일시적이지만 헛되지 않은 선물입니다. 나아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 불리는 천국은 영원한 선물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영원한 선물인 천국으로 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다. 즉 하나님은 창조에 속한 선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창조에 속하지 않은 선물을 주고자 하시는데, 그것이 뭐냐? 바로 하나님 자신인 겁니다. 하나님 자신만이 창조에 속하지 않았으면, 바로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고자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던 겁니다(히9:11-12 참조).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을 그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느냐 하면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것으로, 하나님께서 헛되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확인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가? 마귀의 시험 내용과 같습니다. “이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 보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반드시 지켜 주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가 헛되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는 결코 그 사랑을 확인하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사랑의 핵심으로서 예정론을 말씀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실 뿐입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지 다 뭐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으로 산다고 할 때 말씀을 오용하거나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특히 의식주 문제로 “하나님이 과연 나를 사랑하시는가?” 이렇게 묻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말씀을 통해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잘못해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아닙니다. 욥의 세 친구는 잘못이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그렇게만 설명되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2-3) 하나님의 역사를 알지도 못한 채 이런 말, 저런 말 한 것에 대해 회개하는 심령으로서 이렇게 말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이것이 욥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시험의 목적이 여기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확신하도록 하는 것!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이 땅에서의 고난은 고난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영광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럼 고난만 있느냐?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습니다. 심을 때가 있으면 심을 것을 뽑을 때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성도의 마지막은 결코 고난이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때문에 성경의 이런 교훈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신가?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맞는가? 신앙의 초보라면, 신앙을 막 시작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오래 되었는데도 여전히 이런 것이라면 부끄러운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선하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혹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유기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폐해질 수 있는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의 현실이 되시길 바랍니다. 비록 우리 앞에 놓이게 될 모든 일을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떠나지 않으시며 놓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지켜 보호하십니다. 때로는 어렵고 힘들고 지치고 낙심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한 길이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떠나도록 만드는 자리는 아니라는 겁니다. 때문에 불평의 자리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역경 속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할 줄 아셔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여러분에게 정당하게 있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평, 불만을 토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속성에 합당한 것으로 무장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시험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