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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마저도 감당하기가 힘들어 세자 향에게 섭정토록 함(섭정기간 8년).
1448(세종 30년) / 홍위 8살 나던 해, 세손으로 책봉. 1450. 2(세종 31년 6월) / 세종 54세로 운명. 문종 즉위. 홍위, 세자 책봉. 1452. 5(문종 2년 3월) / 문종 39세로 어린 세자를 부탁한다는 고명을 남기고 운명. 단종 즉위. 1453. 10(단종 1년 6월) / 수양대군, 계유정난 일으켜 김종서 등 고명대신들 참살하고 영의정에 올라 왕권과 신권을 장악. 안평대군 강화도 유배 후 사사. 1454. 1(단종 1년 10월) / 단종,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함(정순왕후 송씨). 1455. 윤6월(단종 3년 5월) / 수양대군이 왕의 측근인 동생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과 궁인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감. 1456년 6월(세조 1년 1월) / 상왕복위사건으로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 출신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 사형당함. 1457. 6(세조 3년) / 단종, 노산군으로 감봉되어 영월로 유배. 1457. 9 / 금성대군,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계획을 세웠으나 관노의 고발로 실패하고 반역죄로 처형당함. 단종 서인으로 강봉. 1457. 10. 24 / 단종, 영월 관풍헌에서 사사. 시신이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본 영월 호장 엄흥도가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곳에서 건져 지금의 장릉 자리에 암장하고 세조의 보복이 두려워 종적을 감춤. 1541(중종 36년) / 영월 군수인 박충원이 단종의 꿈을 꾸고 묘를 수소문하여 찾음. 1681(숙종 7년) / 노산대군으로 추봉. 1698(숙종 24년) / 단종으로 복위되고 능호를 장릉이라 함. |
어린 왕이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경우의 국정운영은?
단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궁중에서 그를 보필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무살 이하의 어린 왕이 즉위하면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당시 궁중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대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왕비도 없었다. 모후인 현덕왕후가 산욕열로 죽었고 문종의 후궁 두 사람뿐이었다.
단종을 양육했던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있었지만 늦게 입궁한데다 후궁인 탓에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단종은 수렴청정조차도 받을 수 없는 처지로 즉위한 것이다.
단종은 할아버지인 세종의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명석했는데, 세손 시절에는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의 지도를 받았고 왕세자로 책봉된 뒤에는 이개와 유성원의 교육을 받으며 왕자로서의 수업을 착실히 닦아 나갔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어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아 했다. 그간 조선의 정치제도를 보면 태종 때 왕이 모두 업무를 장악하는 육조직계제로 정비되었으나, 세종 후반기에 왕이 병약하여 신권 중심의 의정부서사제가 힘을 발휘했다. 어린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데 그쳤다.
인사문제는 황표정사(黃票政事)제도를 썼다. 이는 조정에서 지명된 일부 신하들이 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노란 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단지 그 점 위에 낙점을 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모든 정치 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든 고명대신들인 황보 인, 김종서 등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를 장악했다는 점이다. 그러자 세종의 아들들 즉 왕족세력이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응 등의 왕숙들(단종의 삼촌들)이 서서히 왕권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중 둘째인 수양대군과 셋째인 안평대군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기까지 하는데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이다.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
이들의 추앙은 중종 때 사림세력에 의해 이뤄졌다. 단종복위사건을 주도한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사람에 대해 왕을 위해 충절을 지킨 ‘사육신’으로 추앙했으며, 세조에게 한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킨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을 사육신에 대칭하여 ‘생육신’으로 높여 불렀다.
사육신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박팽년은 충청감사로 있을 때 공문에 ‘신(臣)’이란 단어를 쓰지 않음으로써 세조를 왕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고, 성삼문은 ‘하늘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겐 두 임금이 없다’고 하며 세조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
유응부는 가혹한 고문에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으며 이개, 하위지도 마찬가지였다. 유성원은 일이 발각되자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육신 가운데 남효온은 사건 당시 두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른이 되어 세조의 부도덕한 찬탈 행위를 비난함으로써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조선시대 형벌 제도
조선시대의 형벌 제도는 경국대전에 의거해서 크게 5가지로 나누어 사형(死刑)⋅유형(流刑)⋅도형(徒刑)⋅장형(杖刑)⋅태형(笞刑)으로 구분하고, 죄의 정도에 따라 세분화시켰다.
사형의 경우, 감형(減刑)을 전제로 한 일률(一律), 죽인 뒤에 그 시체를 거리에 내돌리는 효시(梟示), 어느 시기에 가서 목을 졸라 죽이는 교대시(絞待時), 사형이 선고되자마자 목을 졸라 죽이는 교불대시(絞不待時), 어느 시기에 베어 죽이는 참대시(斬待時), 사형이 선고되는 즉시 죽이는 참불대시(斬不待時),독약을 주어 죽게 하는 사약(賜藥), 시체를 여러 도막으로 잘라서 각처에 보내 민중에게 구경시키는 육시(戮屍), 또는 능지(凌遲)가 있었는데, 그 중 참형이 많이 채용되었다.
대체로 정치범에게 적용된 유형(流刑)에도 여러 구분이 있어 장(杖) 100도에 유(流) 2,000리, 장 100도에 유 2,500리, 장 100도에 유 3,000리, 장 100도에 천사(遷徒:移住), 장 100도에 정배(定配), 물한년(勿限年:無期)정배, 장 100도에 원지(遠地)정배, 변원(邊遠)정배, 극변(極邊)정배, 장 100도에 절도(絶島)정배, 감사(減死)정배 등이 있는데, 장 100도란 귀양보내는 데 장 100도를 때려서 보낸다는 것이다.
유형의 경우 보통은 왕족이나 양반 계급에 해당하는 형벌로 유배(流配)라고도 하며, 방법에는 유형생활을 고독하게 치르도록 하는 절도안치(絶島安置),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하여 울타리를 둘러치거나 가시덤불을 쌓는 위리안치(圍籬安置)와 가극안치(加棘安置), 본인의 고향에서만 생활하게 하는 본향안치(本鄕安置) 등이 있었다.
중노동형에 해당되는 도형(徒刑)도 장 60 또는 100도에 1년, 1년 반, 2년, 2년 반, 또는 3년으로 구분하여 전염(煎鹽)⋅초철(炒鐵) 등의 중노동에 종사시키기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그 예가 극히 드물었고,
또한 ‘변원충군(邊遠充軍)’이라 하여 죄인을 변경의 수비군 병졸로 배치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도 도형에 가까운 형벌이었던 것 같다.
장형(杖刑)은 죄인을 대형장(大荊杖)으로 때리는 것으로, 죄에 따라 60, 70, 80, 90, 100도씩 때렸다. 태형(笞刑)은 경범자를 소형장(小荊杖)으로 때리는 것으로, 10, 20, 30, 40, 50도씩 때렸다.
때리는 곤장(棍杖)도 군대에서만 사용하는 치도곤(治盜棍)⋅중곤(重棍)을 비롯해서 장형⋅태형 등에 쓰이던 대⋅중⋅소곤 등 다섯 종류가 있는데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그 치수도 적혀 있다.
청령포(淸泠浦)
영월 시가지에서 서쪽으로 3km쯤 떨어져 있으며,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휘돌아 흘러 둥그런 반도 모양의 지형을 이루었다.
동⋅북⋅서쪽이 깊은 물로 막히고 육지와 이어지는 남쪽은 육륙봉이라는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다. 그 때문에 이곳에 유배되었던 단종(端宗)이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한 바 있다.
솔숲이 울창하고 물이 맑으며 백사장이 곱고 아름다워 영월 8경의 하나로 꼽히는 명소이다.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단종이 이곳에 유배된 것은 1457년(세조 3) 6월로, 그해 여름에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 일대가 침수되자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처소를 옮겼으나 곧 사사되었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살던 집터를 기초로 다시 세워진 두 채의 집과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은 왕이 계시던 곳이므로 뭇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새겨진 세운 금표비(禁標碑, 영조 2년에 세움)가 있으며,
영조 39년(1763)에 어명으로 원주감영에서 세운 비각(端廟在本府時遺址 ; 단종이 여기 계실 때의 옛터)과 단종이 부인 송씨를 그리며 쌓았다는 돌탑의 얘기에 따라 다시 쌓아올린 ‘망향탑’이 유지비각 서쪽 절벽 위에 서 있다.
또한 청령포에는 단종의 유배 생활을 지켜보고 단종의 오열을 들었다는 수령 600여년 된 관음송(觀音松)이 매우 특이한 모습으로 하늘을 우러르고 있음도 볼 수 있다.
관풍헌(觀風軒)과 자규루(子規樓)
영월 시내 한복판에 있는 조선 초기의 동헌터 건물들로 단종의 유배 거처가 되었다가 사사를 당한 곳이기도 하며, 김삿갓(김병연)이 과거시험을 치렀던 곳이기도 하다.
이때 김병연은 홍경래난 때 반란군에 투항했던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줄을 모르고 비난하는 글을 썼다가 심한 자책감에 세상을 떠돌게 된 사연의 동기가 된다.
단종이 이곳에 있을 때 남겼다는 자규시 두 편이 ‘장릉지’에 전하는데, 피를 토하는 듯한 두견새의 울음 소리에 자신을 비유해 읊은 내용이다.이곳은 현재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쓰여지고 있다.
장릉(莊陵)
조선의 몇 안되는 적통의 세자로 태어나 왕위에 올랐다가 비운의 죽임을 당한 단종의 무덤이다.
영월의 진산에 해당하는 발본산 서북 능선이 서남쪽으로 휘어져 내리면서 갈라진 능선의 끝에 자리잡고 있는데 우연인지 필연의 결과인지는 몰라도 조선 최고 명당중의 하나로 꼽힌다.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영월호장이었던 엄흥도가 들쳐업고 뛰다가 사슴이 앉아 쉬다가 놀라 달아난 곳에 암장되었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이곳만은 눈이 녹아 있어 땅을 파기가 수월했다고 하는데, 중종 때 영월부사였던 박충원에 의해 무덤의 위치가 밝혀진 뒤 제를 지내오다 숙종 때 장릉으로 승격된 곳이다.
장릉은 조선조 임금들의 능 가운데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일반 왕릉과는 차이가 난다. 그간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어떤 점이 다른지 살펴보자.
보덕사(報德寺)
신라의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지덕사(旨德寺)라 했다. 그후 1161년(의종 15) 운허(雲虛)와 원경국사(元敬國師)가 극락보전, 4성전(四聖殿)⋅염불당⋅고법당(古法堂)⋅침운루(沈雲樓) 등을 증축했다.
단종 임금이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하자 노릉사(魯陵寺)로 개칭했다. 그후 영조 2년에 장릉수호조포사(莊陵守護造泡寺)의 은전이 베풀어져 태백산 보덕사(報德寺)로 개명하고 장릉의 수호사찰이 되었다.
이곳에는 1517년(중종 12)에 단종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영모전과 단종이 이곳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하여 지었다는 금몽암(禁夢庵:강원문화재자료 25)과 옛 건축양식 그대로의 화장실이 남아 있어 문화재로서의 보존가치가 매우 큰 곳이다.
조선민화 박물관
김삿갓 묘를 찾아가다 보면 왼쪽으로 2000년 7월 29일에 개관한 조선민화박물관이 있어 영월에 새로운 멋을 더해주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진본민화로부터 고가구, 그리고 현대민화 작품까지를 보유하고 있어 보는 즐거움이 많다.
옛날 사람들에게는 아주 쉬운 내용이나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겸비되지 않는다면 그림이 나타내고 있는 상징적 의미와 기원(祈願)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민화(民畵)라 하면 정통회화의 조류를 모방하여 생활공간의 장식을 위해, 또는 민속적인 관습에 따라 제작된 실용화(實用畵)를 말한다.
조선 후기 서민층에 유행하였다 하여, 일명 속화(俗畵)라고도 한다.
따라서 민화는 정통회화에 비해 수준과 시대 차이가 더 심하다. 그림의 특성 또한 과거시험 합격이나 무병장수, 건강, 복, 안녕, 부 등을 기원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그림이 창의적이라기보다는 형식화한 유형에 따라 인습적으로 계승되었다.
그림 속에 나타난 상징적인 의미들을 잘 헤아려 보고 그림을 들여다본다면 훨씬 많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2004년 家苑 어린이.학부모 문화유적답사 안내 프로그램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