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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 21.6.6(환경주일)
오직 노아만을 남기셨다
창세기 7:17~24
설교 김경희목사
(목포산돌교회)
최초의 심판
인류최초의 심판은 홍수심판입니다. 창세기 6~7장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6장은 심판의 이유를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땅 위에 사람이 늘어났고,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사람의 딸들을 마음에 드는대로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모든’(콜)을 빼버렸네요. 성경은 매우 점잖게 이 일을 기술하였지만, 창세기 6장 2절 한 절만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인 인간의 악행과 악한 생각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강자와 약자의 대조를 보여줍니다. 강자에 의해 ‘모조리’ 또 ‘함부로’ 유린당하는 약자의 모습입니다. 서로 파트너로 정하여준 남자와 여자가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로 전락한 것, 그러고도 그 욕망을 멈추지 못하는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죄악을 저지른 사람에 국한되지 않고,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6:7) 포함합니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다른 생명들까지도 연약한 것들까지도 재앙을 피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6장 12~13절에서 심판의 까닭을 다시 한번 말합니다.
“하나님이 땅을 보시니, 썩어 있었다. 살과 피를 지니고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창세기 6:12~13)
그러나 한 사람, 노아를 부르시고 그에게 방주 만들기를 명하십니다. 그 방주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방주(方舟)’라는 말은 사각형의 배라는 뜻이고 '사각형'이 상징하는 바는 바로 '땅'입니다. 아기 모세를 담아 강에 띄웠던 상자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징표로 주신 법궤 역시 이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테바’라고 합니다. 즉 노아의 방주 자체가 구원의 상징이며, 구원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을 함께 행하십니다.
홍수의 심판은 40주야 동안 비가 내리고, 40주야 동안 물이 땅 위를 덮었다가, 배가 정박한 후 40일 동안 물이 마르는 동안 계속됩니다. 그렇게 물은 150일 동안 땅을 뒤덮습니다. 150일 동안, 죄악의 인간과 선택받은 사람이 구분됩니다. 땅 위의 모든 생물들은 죽고, 죄악을 씻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과 세상이 열리며, 인류와 피조물은 더 높은 단계로 들어갑니다. 방주의 문의 열렸을 때 구원받은 사람들과 모든 짐승, 모든 길짐승, 모든 새,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들이 방주 바깥으로 나옵니다. 방주의 문은 세상으로 향해 열린 문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불의 심판
성경은 인류를 향한 두 번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의 심판과 불의 심판입니다. 불의 심판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 내린 심판입니다. 물로 심판하신 후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9:15)는 언약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인류는 다시 한번 멸망을 피해가지 못합니다. 소돔은 아브라함의 사람들과 조카 롯의 사람들이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롯에게 선택권을 주어 차지하게 한 땅입니다. 롯의 눈에 소돔과 고모라는 마치 에덴동산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악이 하늘을 찌를듯 타락한 땅이었는데 말입니다.
“롯이 멀리 바라보니,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한 것이 마치 주님의 동산과도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다. 아직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창세기 13:10)
그는 눈에 보이는 욕망을 따라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고, 그 도시의 풍습에 맞추어 살아가게 됩니다. 훗날 멸망에 이르렀을 때 롯이 손님들을 해하려 들이닥친 마을의 젊고 늙은 남자들의 요구 앞에 자기 딸들을 희생양으로 내놓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그 때까지 그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롯 역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시나브로 젖어들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19장). 롯이 소돔을 택할 때 이미 소돔은 악한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창세기 13:13입니다.
“소돔 사람들은 악하였으며, 주님을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있었다.”(창세기 13:13)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소나기처럼 퍼붓는 심판을 내리십니다. 이 심판으로 두 성과 성 안의 모든 사람과 넓은 들과 땅에 심은 채소를 다 멸하십니다.(19:24~25) 인간의 죄로 인하여 땅과 그 땅 위에 살아가는 뭇생명들까지도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물의 심판
물은 모든 생명이 나온 근원입니다. 또한 생명 가진 것들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물이 성서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구절은 창세기 1:2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고 말입니다. 이 때 영, ‘루악흐’는 바람, 기운의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데 공동번역은 이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운, 루악흐가 진동하니 물도 함께 움직입니다. 물은 빛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물질이었습니다. 마른 땅에 물이 더해져야 거기서 생명이 나옵니다. 사람도 마른 흙으로 빚지 못합니다. 물이 더하여져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이 많아집니다. 또 크게 넘치고 불어납니다. 너무 많이(메오드), 너무 너무 많이(메오드 메오드) 불어납니다. 오늘 본문 7:17~19은 물이 불어나는 것을 점층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명과 풍요의 원천인 물이 불어나고 불어나니 오히려 생명들을 삼켜버립니다.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 몸에 물은 부족해도 병이 나고, 너무 많아도 병이 듭니다. 이 물이 많아졌다, 넘쳤다, 불어났다는 표현은 땅 위에 사람이 늘어났다는 구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사람은 땅으로부터 온 존재입니다. 아담은 아다마에서 온 명사입니다. 그런데 그 아담이 아다마를 뒤덮고, 높이 높이 올라갔을 때 땅은 그 사람과 같이 멸망의 길로 갑니다.
홍수-‘그 물’(함마임)은 땅보다 높아지더니 산보다 높아졌습니다. 물은 모든 창조세계 위에서 위세를 떨칩니다. 태초의 그 날처럼 말입니다. 오직 그 물 위에 하나님의 영만이 운행하셨던 그 때로 돌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인들에게는 재앙이나, 하나님의 눈에는 창조의 원상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홍수나 바다는 가나안 신화에서는 종종 신격화되어 나타나지만 창세기는 물을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도구로 그립니다. 물의 심판,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은 물이 아니라 죄로 가득했을 때 그 때 이미 멸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온실효과
미국 폭스뉴스가 최근 ‘다섯 가지 지구 멸망 시나리오’를 보도했다고 합니다. 공식자료를 찾는데 없는 걸 보니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첫째, 소행성 충돌(공룡멸종 원인), 둘째 거대한 화산폭발, 셋째 핵전쟁, 넷째 블랙홀, 다섯째 태양팽창입니다. 첫째, 넷째, 다섯째 시나리오는 모두 우주로부터 오는 멸망입니다. 화산폭발 역시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 단 하나 ‘핵전쟁’만이 인간의 손가락에 달린 시나리오겠습니다. 그런데 2012년에 미국 디스커버리 뉴스 역시 지구 멸망 시나리오를 내놨는데, 첫째 소행성 충돌, 둘째 제2의 흑사병(그러고보니 8년 전에 이미 예견되었네요), 셋째 핵전쟁, 넷째 화산폭발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가장 시급하게 다가오고 있는 지구멸망의 징조는 위의 예측들이 아닌 바로 기후위기에 있습니다. 올해가 지난 2015년의 파리기후협정이 발효되는 첫 해이기 때문에, 또 지난 주에 열린 ‘P4G 정상회의’*로 인해 조금이나마 기후위기에 대한 정보를 더 알게 되셨을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환경을 위해 일회용품 안쓰기, 분리수거하기, 재활용하기, 전기코드 뽑기 등으로 생활화된 실천도 제법 되고 말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과학자, 기후학자, 미래학자, 그리고 행동가들의 경고는 마치 예언자들의 포효 같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아니면 내일은 없다. 기후위기, 지금 말하고, 당장 행동하라.”(기후비상행동)
기후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지구온난화입니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인 이산화탄소로 인한 온실효과 때문인데요. 여러분, 온실효과는 우리에게 해로운 것일까요? 이로운 것일까요?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온실효과는 당장 비닐하우스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도 비닐하우스 안에서 야채가 자라고 여름과일도 자라지요. 적당한 온도가 유지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지구도 그렇습니다. 지구 위의 온갖 생명체들, 땅 위의 식물들, 동물들, 사람들까지도 적정한 수준(15℃)의 온실효과가 지켜지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온실가스가 없다면, 지구 적외선 에너지가 모두 우주 밖으로 빠져나가고 지구 지상 온도는 영하 18℃가 되어 어떤 생명도 살 수 없게 됩니다.
2℃의 재앙
2015년 열린 파리기후협약에는 195개국 대표가 참석하여 만장일치로 2050년까지 지구온도 상승을 2℃에서 멈추게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기후재난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아 1.5℃ 이상 상승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결론에 특별보고서를 채택했습니다. 그런데 산업화 이후 지금까지 지구온도는 이미 1℃ 상승했고, 남은 한계치는 겨우 0.5℃인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이것을 목표로 2030년, 그러니까 앞으로 10년 안에 탄소배출량을 50%로 줄이고, 2050년에는 탄소배출량을 0로 만드는 ‘탄소중립 2050’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각자에게 요구되는 것 역시 당장 탄소배출량을 50%로 줄이는 것입니다.
[지구온도 1.5도 상승과 2도 상승 비교]
1.5℃와 2℃, 단 0.5℃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생태계의 존폐를 가를만큼의 차이입니다. 북극해 해빙이 여름에 모두 녹아 없어질 확률이 1.5℃에서는 100년에 한번이어서 복원이 가능하지만, 2℃에서는 10년에 한번, 복원불가 상태가 됩니다. 어업 수확량도 1.5℃에서는 150만톤이 줄지만, 2℃에서는 300만톤 넘게 줄어듭니다. 1.5℃에서는 전세계 산호의 70~90%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되지만, 2℃에서는 99% 이상, 그러니까 거의 멸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2030, 2050의 목표를 위해 실천하고 노력한다면 최악이어도 2℃ 상승 이상은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던 대로 산다면, 노아의 홍수 때처럼 기후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함께하지 않는다면, 지구는 2100년에 4℃이상 기온이 상승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4℃이상 상승했을 때의 비극까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단 2℃만 상승해도 빙상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4억명 이상의 사람이 물 부족을 겪습니다. 적도지방의 주요 도시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하고, 북위도 지역조차 여름마다 폭염으로 수천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인도에서는 극심한 폭염이 32배 더 자주 발생하고, 매 폭염이 지금보다 5배 더 오래 지속됩니다. 이런 상황인데 우리나라라고 예외가 될 수 있을까요?
기후위기ing
철부지, 철없는 사람을 일컫는 표현이죠. 어린 사람, 어리석은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참 지혜로왔습니다. 각 계절은 그 계절대로 충실해야만 한다는 것을 안 것이죠. 철이 없어서 겨울에 따뜻하면 좋아하고 여름에 시원하면 좋아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 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따뜻한 겨울, 유난히 긴 장마, 수개월 동안 꺼지지 않는 산불, 수천 명씩 희생되는 쓰나미, 폭우, 폭염, 폭설... 이미 해마다 반복되는 기후위기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기후위기의 징조가 아닙니다. 이미 기후위기가 시작되었고, 이미 그것이 진행되고 있고, 우리는 그 위기 한복판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과 23절은 당시 땅 위의 모든 생물들의 멸종을 보도합니다. 그런데 21절은 그 순서를 짐승들을 거쳐 사람으로 기록한 반면, 23절은 사람에서 비롯하여 짐승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잘못하였으면 사람만 심판하면 될 것인데 어찌 세상 모든 생물들을 멸하셨을까? 궁금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구가 경험한 다섯 번의 대멸종의 흔적이 창세기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세계는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기후위기 때문에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작은 생물들의 멸종은, 언젠가 먹이사슬을 무너뜨리게 되고, 마침내 인간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기후위기는 두려움을 넘어 공포로 다가옵니다. 여러분,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재앙이라는 표현까지도 사용하는데, 기후재앙이 닥친다고 하면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100년만에 찾아온다는 무더위, 폭염 같은 것이겠죠. 아, 이 여름은 얼마나 더울까, 이 겨울은 또 얼마나 추울까, 비는 또 얼마나 내릴까, 태풍은 얼마나 많은 농작물들을 해칠까, 이런 정도의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기후재앙이 다만 날씨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심각성과 공포가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곧바로 식량위기로 연결됩니다. 가뭄은 물론이고 해수면이 높아져 곡식이 자랄 수 있는 토지가 줄어든다면요?
지난 2011년 100만명이 넘는 시리아 난민사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현재는 그 숫자가 더 늘어 400만명이라고 하는군요. 우리가 아는 바로는 단지 내전을 피해 난민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리아내전의 원인이 바로 러시아로부터의 밀 수입 중단에 있었던 것입니다. 러시아에 불어닥친 사상초유의 가뭄 때문이었죠. 즉 기후위기는 단지 날씨의 덥고 추움의 문제가 아니라, 식량위기로 전쟁으로 그리고 거주지를 떠나 발생하는 난민사태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기후위기는 서로 하나로 연결된 생태계를 위험에 빠뜨리고, 또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각 나라를 갈등에 휩싸이게 만듭니다. 우리는 기후위기 자체가 아니라 그로부터 파생되는 이후의 문제들 때문에 어쩌면 더 큰 위험 앞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시고 ‘혼자 있는 것이 악하다’(창2:18) 하셨습니다. 혼자(바드, 나누어져서, 분리돼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뜻하는 ‘아담’은 흙, 땅 ‘아다마’에서 나왔습니다. 우리의 근본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땅, 생명들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할 때, 지구는 착취와 지배와 탐욕의 대상이 되겠지요. 모래를 골재로 보고, 나무를 목재로, 바위를 석재로, 동물을 고기로, 식물을 약재와 먹거리로만 보게 되겠지요. 그 결과, 단 1℃만 지구 기온이 올라가도 다함께 멸망하는 공포 앞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오직 노아(아크 노아)
하나님께서 물로써 세상을, 엄밀히 말해서 사람을 심판하고자 하실 때 단 한 사람을 남겨두셨습니다. 노아입니다. 노아의 이름 뜻은 ‘멈춤’입니다. 이것이 죄악으로 관영하였던 세상을 향해 던지신 마지막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STOP!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탄소를 기적처럼 감축해 줄 기술이 아닙니다. ‘녹색’의 흉내를 내는 또다른 개발과 성장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 과잉의 삶을 멈추는 것입니다.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쓰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배출한 이산화탄소의 양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결단과 행동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실천들보다 더 많은 실천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옥한 땅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히브리들을 탈출시키실 때, 그들에게 약속한 땅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나안은 척박한 산지가 대부분인 땅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금껏 먹는 것 걱정없이 살던(출16:13) 이집트 땅이 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아브라함이 떠나온 우르 땅이 더 비옥한 땅입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인류 4대 문명발상지인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롯이 선택한 소돔과 고모라 같은 풍요와 비옥의 땅이 아닙니다. 신명기 26:11~15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축복문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레위 사람과, 당신들 가운데서 사는 외국 사람과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과 당신들의 집안에 주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십시오. … 레위 사람과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이 당신들이 사는 성 안에서 마음껏 먹게 하십시오.”(신명기 26:11~12)
하나님이 약속하신 참된 풍요와 생명의 땅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약자를 살피며 그들이 배고프지 않게 하는 땅인 것입니다. 땅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땅에서 사는 사람이 본질인 것입니다. 점점 더 심각해지는 기후위기는 더 많은 기후난민, 기후약자, 생태적 약자들을 만들어 냅니다. 1.5℃ 기온상승을 지킨다고 해도 1억명의 기후난민이 발생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라 예측합니다. 1.5℃를 지키지 못하고 2℃까지만 올라가도 우리나라 6% 땅이 침수된다고 합니다. 김해가 없어지고 인천공항이 잠기고 부산이 반도가 된다고 합니다. 태풍피해는 물론이요, 이미 있는 토지마저도, 우리의 주거지마저도 물에 잠기게 되는 것이죠. 불과 30년 후의 이야기입니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와 그의 가족만을 이 세상에 남기셨습니다. 오늘 교회는 세상을 위해 구원의 배를 만드는 노아일 수 있을까요? 창세기는 ‘노아와 노아의 가족은 구원하였다’라고 기록하지 않고, ‘남겼다’(샤아르, 니팔형 '남겨졌다')고 기록합니다. 남겨진 이유는 그를 구원자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만든 사각형의 배, 방주는 성서가 사용하는 ‘구원’의 메타포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자기 정체성이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를 노아와 노아의 가족만을 구원했다고 해석하게 되면, 하나님이 교회만을 구원하신다고 해석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노아를 하나님의 구원의 일에 사용하셨다고 해석하면,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어떤 위치에 있게 되는지가 명확해집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이지, 교회만이 구원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기후위기 위에 떠 있는 방주로서 교회
기후위기로 우리에게 닥쳐올 대재앙은 단지 다시 한 번의 물의 심판이 아닙니다. 물과 불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초한 결과입니다. 바로 우리 손에, 한 손에는 불이 한 손에는 그 불을 끄는 물이 들려 있습니다. 교회는 멸망 앞에 놓인 지구를 구해낼 수 있을까요? 이 시대의 방주로서 150일의 기나긴 홍수를 이겨낼 수 있을까요? 여기서 ‘150일’은 탄소배출량을 50% 감축해야 하는 향후 10년, 그리고 탄소배출 0에 마침내 도달할 2050년까지 단 30년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마른 땅이 아닌 출렁이는 물 위의 시간을 견디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교회들이 방주를 짓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녹색교회 운동입니다. 햇빛발전소를 도입한 지평교회, 새활용공방을 운영하는 백석교회, 도시농촌 직거래운동을 통해 생명밥상운동을 하고 있는 광주동명교회, 몽골 숲에 나무를 심는 청파교회, 제로 웨이스트 샵을 운영하는 청주 다리놓는교회 등 그밖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전하겠다는 결단으로 녹색교회 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좀더 적극적으로 함께 해나가야 할 운동이자, 사명일 것입니다.
['생명의 길, 초록발자국' 탄소중립 캠페인 포스터-기독교환경운동연대]
오늘 여러분에게 ‘생명의 길, 초록발자국’이라는 한국교회 탄소중립 캠페인 포스터를 한 장씩 드렸습니다. 기후미식, 슬로우패션, 미니멀라이프, 녹색교통, 그린에너지, 녹색서재, 그리고 생명경제의 일곱가지 실천으로 창조세계 회복운동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의 악을 심판하실 때, ‘오직 노아 하나만을 남겨놓으셨다’는 것은 노아만을 구원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 한 사람으로 새희망을 품고 새역사의 문을 여셨다는 뜻입니다. 노아가 홍수가 끝났을 때 열고 나온 방주의 문은 새세상을 향한 문이었습니다(창8:19). 오늘 우리가 그 한 사람 ‘노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방주'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남기셔서 하고자 하시는 일에 우리를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실천 하나가 보잘것없어 보이는 기어다니는 작은 생명들로부터 들짐승과 집짐승, 하늘의 새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자신까지 구원할 것입니다.
*P4G: partnering for Green Growth and Global Goals 2030, 12개국 대륙별 중견국가 참여.
참고자료
이영재, 『토라서론』(성경과 설교 연구원, 2015)
김창주, 『창세기마루』(경건과 신학연구소, 2017)
이영재 외, 『일점일획 말씀묵상 1』(도서출판Ibp, 2017)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김재경 옮김, 『2050 거주불능 지구』(추수밭, 2019)
알렉산드라 하만 외, 김소정 역, 『위대한 전환-지구 온도 2도를 지키기 위해』(푸른지식, 2016)
이진형, 『그린 엑소더스』(삼원사, 2020)
타일러 라쉬, 『두 번째 지구는 없다』(RHK, 2020)
조천호, “기후위기 남은 시간 7년... 인간의 능력을 믿는다”(경향신문, 2021.4.18.자)
조천호, “공기 중 0.04%뿐인 온실가스, 지구 급소를 때린다”(경향신문, 2019.2.14.자)
김재민, “지구온도 산업화 이전보다 1.5℃ 이내로 유지해야 기후재난 줄여”(팜인사이트, 21.4.28)
유투브 영상, “한국교회 탄소중립 캠페인 ‘생명의 길, 초록발자국’”([기독교환경운동연대])
유투브 강의, 조천호, “기후 위기, 재앙은 시작됐다”([최강1교시])
_________, 조천호, “기후 위기, 거대한 가속에서 담대한 전환으로”([교보인문학석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