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야간 학습을 마치고 교실을 나서는데 안개가 자욱하다. 읍내길을 걸으며 걱정이 밀려온다. 오늘 같은 날 그곳을 어떻게 지나가지? 새 도로를 내기 위해 마을 공동묘지를 파헤치는 장면을 친구들과 함께 멀찍이서 지켜봤었다. 그 곳은 끔찍한 교통사고가 난 현장이기도 했다. 그 전에 여고 뒷골목도 지나야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모퉁이 집 넓은 뒷마당에 널판을 쌓아 놓아서 무서운곳이 새롭게 등장했다.
한 번은 어머니께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 집 뒷마당에 널판을 쌓아 놓았잖아. 거기 지날때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어머니는 뭘 그걸 가지고 무서워해! 하셨다. 하지만 그곳이 가까워질수록 심장 뛰는 소리가 빨라지는 듯했다. 골목길에 접어들려는데 짙은 안갯속에 검은 물체가 서 있다! 귀신일까? 사람일까? 머리끝이 쭈뼛쭈뼛 서는 그때 안갯속에서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섭이냐?" "아버지?"
두려움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창피함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 것을 숨기기라도 하듯 짜증 내는 말투로
"왜 여기 계세요?" "그냥. 너 올 때가 된 것 같아서...."
아버지도 나도 말없이 걸었고 짙은 안개는 집까지 따라왔다. 어머니는 내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고 아버지에게 말했고 아버지는 그 늦은 시간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신 것이다. 그 후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전보다는 무서움이 훨씬 덜 했다.
순례를 다녀왔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야 했고. 이상 기후로 현지에 불볕더위가 들이닥쳐 심근경색을 겪은 나로서는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첫 방문지는 성모님 발현 성지였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계단으로 이어진 정상에 올라 발현 성모상을 마주했다. 가이드가 옆 벽면의 글귀를 가리키며 또박또박 읽어준다.
걱정마라. 엄마 여기 있다!
다시 바라본 성모님은 자애로운 눈길로 나를 반겼다.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자녀들을 위로하는 한 구절 말씀을 마음에 새기니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긴호흡이 느껴졌다. 나그네의 고단한 마음이 쉴 자리를 찾았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깊이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저마다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내 안의 두려움을 보듯 타인의 마음속 두려움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해본다. 나와 타인의 두려움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속에 빠져들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하셨듯 오늘 만나는 형제에게 손을 내밀어 보자. 신뢰와 존중. 용기와 희망의 말을 전해보자. 서로에게 평화를 안겨주는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