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인간, 이융 연산 1
조선 왕조에 상상하기 힘든 돌연변이 왕이 있었다.
문제적 인간 이융 연산이다. 조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왕으로 손 꼽힌다. 연산의 12년 재위기간동안 그가 한 일을 보면 최악의 왕으로 뽑힐 만큼 최악의 행동과 정책들을 행했고 충분한 자격이 있다.
연산의 시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보기드물게 평화로운 시대였다. 큰 전쟁도 없었고 대기근이나 전염병도 없었다. 연산군이 조금만 왕노릇을 제대로 했다면 태평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 시대였다.
연산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드라마, 소설의 단골 소재로서 우리나라 국민이면 대부분 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돌연변이 같은 왕 연산이 왜 그렇게 되었는 가에 대해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과는 다른 시각에서 연산 이야기를 살펴 보고자 한다.
우선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왕조 생리에 대해서 알아야 이해가 쉬울 것이다.
중국의 황제나 일본의 천황 그리고 조선의 국왕을 비교해보면 중국 황제는 신하들에게 무조건적인 숭배와 충성의 대상이었으나 조선의 국왕은 무조건적인 숭배나 충성의 대상이 아니었다. 일본의 천황은 그저 명목적인 이름만 가지고 있는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조선은 왕조국가로서 일본의 천황처럼 허수아비는 아니었고 중국의 황제처럼 절대권은 이론으로만 존재했고 실제로는 없었다.
조선국왕은 신하들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즉 조선 국왕은 당쟁을 왕권 강화에 이용해야 할 만큼 전지전능한 권력자가 아니었다. 정승 한 명을 임명하기 위해서 신하들을 위협하고 달래야 했던 나약한 존재였다. 현재의 대통령보다도 훨씬 약한 권력자이었다.
조선 중,후기에 가면 조선사대부들은 아예 중국의 황제를 명실상부 황제로 모시고 조선 국왕은 조선의 대표 사대부로서 조건부 충성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다.
어떤 역사가는 조선은 이씨는 길어야 80년이었고, 훈구 즉 외척이 100년, 서인 150년 , 안동 김씨 문중이100년 등 이렇게 가문중심의 왕조였다고 한다. 이씨는 초기 80년을 빼고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국왕이 처음 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조선은 고려 말 정몽주, 조준등 신흥사대부들이 무인세력인 이성계를 등에 업고 건국했다.
사실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 이씨 조선을 열기는 했지만 조선 건국 설계자는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이 꿈꾼 세상은 국왕은 그냥 명목적으로 있고 재상들이 나라를 다스르는 것이다. 즉 지금으로 보면 입헌군주제를 꿈꿨다.
그러나 조선은 이성계가 왕이 된 이씨 왕조의 국가였다. 따라서 왕권이라는 것은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이었다.
그것을 잘 파악하고 있는 정도전은 자신이 지은 '조선경국전'에 자신의 건국의 이념을 제시하고 정책화 하려한다.
'국왕의 자질에는 어리석음도 있고 현명함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으니, 재상은 국왕의 좋은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 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는 일은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대중(大中)의 경지에 들게 해야 한다'고 한 것이나, '국왕의 직책은 한 재상을 선택하는데 있다'고 한 것, '국왕의 직책은 재상과 의논하는 데 있다'고 한 것 등은 재상, 즉 신하의 역할을 특히 강조한 것이다.
1392년 조선이 건국 되었을 당시 이성계는 58세의 그 당시 나이로는 상당한 노인이었다. 무신으로서는 최고의 활약을 보인 인물이었지만, 새로운 국가를 경영할 비전이나 정치 문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런 태조 이성계는 말년에는 권력욕이 더 없었던 거 같다. 재상중심정치를 주장하는 정도전의 뜻대로 어린 방석을 세자로 앉히고 정도전에게 실권을 준 것을 보면 말이다.
정도전의 이런 꿈을 단번에 엎어버린 것이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이다. 그리고 태종으로 등극한 이방원은 사병을 혁파하고 처남들까지 죽여가며 왕권을 강화시켜 나간다. 조선 왕조에서 태종이 절대왕권을 확립했고 행사했다.
하지만 세종은 아버지 태종과는 달리 왕권과 신권을 적절하게 조화시킨 것이 백성을 위한 정치라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신권을 인정해준 현명한 왕이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왕권이 존중되었다.
하지만 믿었던 세종의 큰 아들 문종이 너무 빠르게 급사하는 바람에 어린 단종이 등극하고 김종서, 황보인 등 실세들에게 실권이 주어지면서 신권이 강대해진다.
이러한 것을 도저히 보아 넘길 수 없던 수양대군은 왕권회복을 명분으로 계유정난이라는 쿠테타를 일으키고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로 등극한다.
세조는 태종처럼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왕권을 강화 시킨다. 하지만 세조 말년부터 계유정난을 같이한 공신들인 한명회, 신숙주등의 신권도 강화되는데 이들을 훈구파(조선 세조의 찬위를 도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관료학자들)라 부른다.
세조의 첫째 아들이고 인수대비 남편인 의경세자가 갑자기 급사하고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이 즉위하지만 그때는 한명회등 노회한 훈구파 신하들에 의해 신권이 완전 자리잡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예종도 2년만에 후손 없이 갑자기 죽고 만다.
한명회는 인수대비와 손잡고 왕을 맘대로 정한다. 즉 자기 사위인 인수대비 둘째 아들 자을산군을 첫째 월산대군을 제끼고 왕으로 정한다. 그가 바로 성종이다.
이처럼 성종은 태생부터 정통성 문제에서 자유롭지도 못했고 왕이 되리라는 생각도 없었는데 신권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왕이 되었으니 재위기간 내내 신권에 의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한명회, 유자광등 노회한 훈구파들은 세조때부터 장기 집권을 하면서 어린 성종을 휘둘리려고 했다. 이에 장성힌 성종도 거기에 대항해서 지방 향리출신이며 성리학으로 무장한 등 영남출신 사류(士類)를 등용 한다. 이들을 사림파라고 부른다.
드디어 조선에 사림파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는 김종직이다.
연산군의 친엄마인 폐비 윤씨는 남편인 성종의 후궁들 문제로 성종과 다투다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낸 일로 인해 폐비(廢妃)된 후 사사되었다.
사실, 아무리 용안이라고 해도 부부싸움에 불과 했다. 그 정도로 한나라 왕비를 사사 시킬 정도의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성종이 인수대비나 한명회등의 눈치를 보다가 자기 부인을 폐비 시킨 것도 부족해 사사까지 시킨 것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 이것 또한 신하들 눈치보기에 급급한 왕권이 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연산은 아주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이라 친엄마가 그렇게 돌아간 줄 몰랐다고 한데 나중에 말하겠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연산은 세자 시절부터 성종이 신하들에게 너무 휘둘리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래서 결심했을 것이다. 자기가 왕이되면 아버지같이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확실한 왕 노릇을 한번 해보리라 결심했을 것이다.
연산은 세자때는 해동성자라고 듣을 정도로 똑똑하고 훌륭한 왕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즉위 초기에는 별 말썽없이 나름 왕노릇을 잘했다.
앞서 말했지만 조선시대 왕조내내 왕권과 신권이 대립을 해왔다. 그리고 성종때 부터 신권이 왕권보다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연산의 돌연변이적인 이탈 행위도 알고 보면 이렇게 약해지는 왕권을 다시 강화 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그리고 연산은 두 번의 사화로 신하들을 개박살 내는 공포정치를 시작하면서 연산은 조선 왕들 중 어쩌든 최고의 절대왕권을 휘둘렀다.
연산처럼 왕권을 강화시키는 것은 왕조시대 왕으로서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강화시킨 왕권을 연산은 백성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연산의 개인적 쾌락을 즐기는데만 사용했다. 그리고 변태적이고 종 잡을 수 없고 어처구니 없는 공포정치를 실시한다.
요즘 북한의 김정은이 연산의 공포정치를 그대로 따라하는 느낌이다.
신하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떨다가 드디어 조선최초로 신하들이 왕을 쫒아낸 쿠데타를 일으키니 바로 중종반정이다.
이제 조선은 신하들이 왕을 선택하는 택군의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이제 연산의 시대로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다음은 연산과 무오사화가 이어집니다.





